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5월20일(월) 聖 베르나르디노 님..등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19 조회수298 추천수1 반대(0) 신고



5월20일(월) 음 4/11

聖 베르나르디노 님..등


 


베르나르디노(5.20)

성인명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축일 5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학자, 설교가
활동지역 시에나(Siena)
활동연도 1380-1444년
같은이름 베르나르디누스, 베르나르딘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Bernardinus,
)와

카피스트라노의 성 요한(Joannes, )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 또는 베르나르디노)
1380년 9월 8일 이탈리아 시에나 근방 마사 마리티마(Massa Marittima)에서
정치가였던 아버지 톨로 델리 알비체스키(Tollo degli Albizzeschi)
어머니 네라 델리 아베두티(Nera degli Avveduti)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다시 3년 뒤 아버지마저 여의고
고아가 되어 친척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1391부터 1397년까지 시에나에서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그곳 대학에서 3년 간 교회법을 배운 그는 라틴어 고전뿐만 아니라
성경과 신학에도 심취하였고 신심의 실천에도 열의를 보였다.
1400년 흑사병으로 온 나라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을 때,
그는 약 4개월 동안 시에나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Santa Maria della Scala)
병원에서 흑사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병에 걸리기도 하였다.
1402년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그는 이듬해 9월 8일
콜룸바요 수도원에서 허원을 하였고,
1404년에 사제품을 받고 다음해에 세지아노(Seggiano)에서 설교를 시작한 이래
죽기까지 설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성 베르나르디누스는 1408년부터 다음해까지 페라라(Ferrara)에서,
1410년에는 시에나와 파비아(Pavia)에서 설교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예수 성명에 대한 설교를 시작함으로써
롬바르디아(Lombardia) 지역의 복음화에 기여하였다.





1417년부터 그는 밀라노(Milano)에서 대중 설교가로서 활동하면서
뛰어난 웅변술과 정열적인 설교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걸어서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 지방을 순회하며 정열적으로 설교하였는데,
그의 주된 설교 주제는 예수 성명에 대한 공경과 참회와
사랑의 실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도박, 고리대금업, 마술, 미신 등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한편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정치적 권력 투쟁을 그 시대의 근본적인 악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특별히 예수 성명의 신심을 전파했는데,
이 신심은 교회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그 신심의 깊은 신학적 기초를 깨닫도록
그리스어 예수(ΙΗΣΟΥΣ)의 첫 세 글자를 로마자로 표시한
‘IHS’를 고안하였다.
그가 만들어 낸 이 모노그람마(Monogramma)
‘이 표징 안에서’(in hoc signo),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표징으로’
혹은 ‘인간의 구원자 예수’(Jesus hominum Salvator)라는 뜻이다.
그는 빛나는 태양의 중앙에 이 글자를 새긴 문장을 사용하여
설교를 마무리할 때마다 공경 예절을 행하였다.
그는 이 문장으로 어떤 미신적인 상징이나
특정 파벌의 훈장 등을 대체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예수의 성명을 성경의 요약이요 일치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그 후 성 베르나르디누스와 그의 제자들의 사도직을 통해서 예수 성명에 대한 공경은 널리 확산되었고,
이 문장은 교회와 가정, 공적인 건물 등에도 사용되게 되었다.
반면에 당시의 일부 인문주의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러한 그의 활동을 불신하고,
이 기도를 위험한 혁신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1424년 볼로냐(Bologna) 대학에서
예수 성명 신심에 대한 공식적인 반발이 시작되었다.
무려 8년 동안 그는 교도권과 신학계로부터 숱한 고발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1432년 1월 7일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의 칙서
“아포스톨리케 세디스”(Apostolicae Sedis)를 통해
논쟁의 종지부를 찍고 그의 활동이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 교황으로부터 시에나의 주교로 임명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설교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1430년부터 12년 동안 프란치스코회 엄률회의 총대리로 활동하면서
프란치스코회의 보다 엄격한 규칙을 회복하자는
수도회 내부의 개혁 운동에서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439년에는 피렌체(Firenze) 공의회에 참석하여
그리스 정교회와의 일치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1444년 고향에서 설교를 마친 후 그는 고령의 나이와 쇠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나폴리(Napoli) 왕국을 복음화하기 위해 출발하였으나,
아브르초(Abruzzo)의 라퀼라(L'Aquila) 부근에서 열병에 걸려 라퀼라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 머무르다가 그곳에서 5월 20일 사망하여 그곳 성당에 묻혔다.
그의 문장은 IHS가 새겨진 평판(平板) 혹은 태양이고,
광고업자들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1450년 5월 24일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에 의해 시성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예수 이름의 첫 세 글자, <I H S> 에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표징 안에>,
<인간의 구원자 예수님>을 깊이 묵상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님이시여,
 

 

저희도 주님의 참모습을 바르게 깨닫도록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골룸바 (5.20)

성인명

골룸바(Columba)
축일 5월 20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동정녀, 3회원
활동지역 리에티(Rieti)
활동연도 1467-1501년
같은이름 골롬바, 꼴롬바, 꼴룸바, 콜롬바, 콜룸바




리에티의 복녀 골룸바(Columba)


 


콜룸바(또는 골룸바)는 이탈리아 중부 리에티 태생으로
그녀의 부모는 양복 짓는 사람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생활을 하다가 딸을 낳게 되자,
천사처럼 보인다하여 안젤리카(Angelica)라고 불렀으나
세례 때에 콜룸바로 개명하였다.

그녀는 몸과 영혼이 매우 아름답게 성장하였다.
콜룸바는 그녀에게 읽기를 가르쳐 준 도미니코 수녀회 수녀로부터
성 도미니코(Dominicus, 8월 8일)와 시에나(Sien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4월 29일)
대한 신심을 배웠고,
그녀의 일생 동안 위의 두 성인 성녀가 자신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10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어느 부유한 청년과 약혼하기를 강요했고,
결국 콜룸바는 자신의 머리를 자르면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 몸과 마음을 드렸다고 선언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성녀 카타리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기회를 엿보았다.




 

한 번은 거의 5일 동안이나 죽은 상태에 있었는데,
후일 그녀는 그때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성지를 둘러보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19살 되던 해에 그녀는 도미니코 수도회 재속 3회원이 되었다.
그 후 콜룸바는 자주 감옥을 방문하여
죄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고해성사를 받도록 하였다.
그녀의 일생은 온갖 기적들로 장식되었다.
비테르보(Viterbo)에서는 마귀 들린 사람을 고치는 등 수많은 치유의 기적도 보였다.
물론 이런 이상한 기적들로 인해
교회 당국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의 고해신부이자 전기 작가인 세바스티아누스 안젤리 신부는
그녀를 적극 옹호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가 페루자(Perugia)를 방문했을 때
그녀를 직접 대면하였는데,
놀랍게도 그녀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게 되자 그녀의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얼마 후에 그녀가 마술을 한다는 소문으로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하였다.
차츰 차츰 그녀는 온갖 병에 시달리다가 34세를 일기로
주님 승천 대축일 아침에 운명하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교회 당국은 그녀의 공식적인 장례를 허용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1625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치유은사 등 은혜의 삶 가운데서도
이웃의 오해와 불신이 함께 따랐으나


고해 사제와 교황으로부터 참신앙으로 인정 받았던

리에타의 복녀 골룸바 님이시여


저희가 이웃의 신앙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로 저회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