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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 중심 - 2013.5.22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22 조회수297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3.5.22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집회4,11-19 마르9,38-40

 

 

 


하느님 중심

 

-사람 중심-

 

 

“온 세상아, 주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추어라.
즐기어라, 기뻐하라, 고에 맞춰 노래하라.
주께서 오시나니, 주님 앞에서, 세상을 다스리러 주께서 오시나니”

 

아침 성무일도 중 마음에 와닿은 시편구절입니다.

 

신록의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세상이
흡사 세상을 다스리러 오신 주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추는 듯합니다.

참 아름다운 축제의 달, 5월입니다.

오늘 역시 두서없는 여러 깨달음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신록으로 우거진 나무들이 창 밖 푸른 하늘을 가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환히 드러내는 숨겨진 삶이 새삼 깊고 아름다움을 깨닫습니다.

어제 부산 명상의 집 분원에 들렸다가
숨겨진 아름다운 삶을 사시는 수사님을 보며 깨달은 진리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기쁘게 하느님 중심의 숨겨진 삶을 사는 이들이 깊고 아름답습니다.

 

2.수도원 정문 옆,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의 몸통이
천으로 꽁꽁 잘 묶여진 모습이 궁금해 수사님께 알아 봤습니다.

 

“나무에 벌레가 먹을 것 같아 몸통을 천으로 에워싸 꽁꽁 묶어놨습니다.
개미가 나무껍질들 사이에 공존하는 건 문제가 없는데
벌레들이 몸통을 갉아 먹기 시작하면 나무는 죽습니다.”

 

몸통의 중심이, 뿌리의 중심이 건강해야
건강한 줄기, 건강한 나뭇잎들의 건강한 나무입니다.

가지가 꺾이고 나뭇잎이 병들거나 떨어지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닌데
뿌리의 중심이, 몸통의 중심이 병들면 나무는 서서히 죽습니다.

 

사람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중심의 영혼이, 정신이, 마음이 병들면 삶 역시 서서히 죽어갑니다.
하느님 중심에 뿌리 내려야 건강한 영혼에 건강한 육신임을 깨닫습니다.

 

3.수도원 주차장을 온통 에워싸고 있는
이팝나무 꽃들의 하얀 사랑이 숨 막힐 듯합니다.

하늘의 하느님 향한 찬미의 사랑이요,
수도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환대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상징하는 이팝나무 꽃들입니다.

 

4. “안셀름 그륀 신부님에게 책을 쓰는 시간은 쉬는 시간이라 합니다.”

 

수녀님이 들려 준 말도 생각납니다.
20세기 영성가 토마스 머튼에 버금가는
21세기 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님입니다.

글을 쓰는 노동이 기도가 된,
기도와 일이, 관상과 활동이 하나가 된 관상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이런 영성의 대가들에게는 따로 쉬는 시간이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쉬는 시간이자 일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 시간에 이어 강론을 쓰는 시간도
서서히 쉼의 시간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이 깊어지면서
관상과 활동이 하나가 될 때 이뤄지는 ‘은총의 쉼’입니다.

 

5. ‘사람이 먼저다’ 예전 문재인 대선 후보의 대선 모토도 생각납니다.
돈이, 일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입니다.
‘저녁이 있는 삶’ 열렬한 호응과 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시 손학규 씨의 모토입니다.

이 또한 ‘사람이 먼저다.’라는 모토와 그대로 일맥상통합니다.
신자본주의의 병폐를 통찰한 말 그대로 복음적 모토들입니다.

 

사람 있고 돈 있지, 돈 있고 사람이 있지 않습니다.
사람 있고 일 있지 일 있고 사람이 있지 않습니다.
사람 중심의 세상을, 사회를 이루겠다는 열망이 담긴 모토입니다.

하느님 중심에서 저절로 진정 사람 중심입니다.

사람 중심은 자칫하면 사람이 절대적 우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중심이 빠진 사람 중심의 인간지상주의는 위태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과 삶’ 이게 분별의 잣대입니다.

 

지혜로운 분별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만 가능합니다.

주님이 바로 지혜이자 지혜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집회서의 말씀이 참 신선합니다.

“지혜는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지혜를 붙드는 이는 영광을 상속 받으리니,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리라.

지혜를 받드는 자들은 거룩하신 분을 섬기고,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지혜에 대한 사랑’(필로소피아)이 바로 철학의 어원입니다.

의인화된 지혜가 가리키는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지혜 자체이신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 때
저절로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사랑은 바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 지요.
내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안목에서 분별의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의 안목 없이 다양성의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정말 너그럽고 자비하신,
관대하기가 하늘 같이 넓고 바다 같이 깊은 하느님의 화신 예수님이십니다.

 

“막지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그리스도교신자가 아니면서
공동선을 위해 애쓰는 익명의 크리스천은 얼마나 많은지요.

종파에 관계없이 평화를 위해, 공동선을 위해 애쓰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사는 이들은 모두 궁극에는
우리 편이라는 예수님의 넉넉한 마음이 정말 좋습니다.

아마 이런 경지라면 종교 간의 모든 갈등과 불화도 저절로 해소되어
평화롭게 될 것이며 하느님 안에서 모두 한 형제들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 안에 깊이 뿌리내릴수록
이런 드넓은 지평의 시야에 관대한 마음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본원장 신부님과 주고받는 덕담도 생각납니다.
“두 분의 아빠스님을 모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원장 신부님의 성덕도 더욱 높아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부끄러움만 가득 남습니다.”

 

보고 배움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관대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편협하고 옹졸한 마음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 안에 항구히 정주할 때
지혜로워지고 관대해지는 마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지혜롭게 하시며
당신 중심 안에 항구히 정주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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