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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23 조회수826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5월 23일 연중 제7주간 목요일



Anyone who gives you a cup of water to drink
because you belong to Christ,
amen, I say to you, will surely not lose his reward.
(Mk.9,41)


제1독서 집회 5,1-8
복음 마르 9,41-50

오늘 새벽 묵상 글을 시작하기 전에 공지사항 한 가지 알려드립니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1박 2일 동안 강원도 강릉에서 성소국 MT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일 새벽에는 묵상 글을 올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내일 모레 25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차에 중요한 거울이 붙어 있지요. 일명 사이드미러 또는 도어미러라고 하는 거울입니다. 그런데 이 거울을 자세히 쳐다보면 이런 글씨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objects in mirror is closer than they are)’

이 사이드미러는 볼록거울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보다 멀리 보이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면 똑같이 보이는 평면거울을 쓰지 왜 볼록거울을 써서 운전자가 헷갈리게 하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평면거울로 차의 뒤쪽을 완벽하게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근감을 극대화시켜 뒤쪽을 완벽하게 보게 해주는 볼록거울의 특성을 담아 사이드미러를 만든 것이지요. 따라서 거울 그대로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즉, 거울에 보이는 옆 차선의 차량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운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사이드미러의 특성을 기억하면서, 문득 우리에게 다가오는 죄 역시도 비슷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죄’는 항상 우리 곁에 멀리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 죄에 물들어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보는 것보다 항상 가까이 있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고 있는 내 눈만을 믿고서는 안 됩니다. 더욱 더 단호하게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철저하게 죄가 내 곁에 다가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러한 모습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물론 너무나 극단적인 표현이라서 ‘왜 그러시지?’라는 생각도 들게 하지요. 그러나 죄에 대해서는 타협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손, 발, 눈이 죄짓게 하면 자르고 빼 던질 정도로 죄에 대해서는 일체의 타협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아직도 나에게서 멀리에 있네.’라고 어영부영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 가까이에서 나를 죄에 물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나요? 계속된 타협으로 내 곁에 아주 가까이에 다가오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죄는 우리가 보는 것보다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새 신발을 신으면 발이 좀 아픈 법이다. 삶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원치 않을 때, 그리고 필요치 않을 때도, 삶은 우리를 의외의 무언가로 사로잡아 미지의 세계로 이끈다(파울로 코엘료).


어제 모임 끝나고 나오면서 찍은 답동거리입니다. 유혹꺼리가 많네요.



위험경고

얼마 전에 들은 애기입니다. 미국의 어떤 여성이 사랑하는 고양이를 목욕시킨 후 빨리 말리려고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린 것입니다. 이 안에 들어간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맞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처럼 저 세상에 가고 말았습니다. 주인의 무식함에 사랑하는 고양이가 죽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 여성은 전자레인지 회사에 소송을 걸었습니다. 소송 이유는 ‘왜 그러한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소비자에게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지요.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 회사가 소송에 패해서 엄청난 위로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지요. 즉, ‘살아있는 동물을 넣고 전자레인지를 돌리지 마라.’라는 위험경고문이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생각해보니 주님께서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위험 경고를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나중에 주님께 왜 경고를 보내지 않으셨어요? 라고 따질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경고를 잘 보고, 더욱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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