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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행운보다는 행복을/신앙의 해[190]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30 조회수372 추천수2 반대(0) 신고


                                                             그림 : [한티] 입구에서 바라본 정경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외친다.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그 외침이 얼마나 애절한지 우리는 모를 게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장님의 심정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지? 잠시만 보이지 않더라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그것을 영원히 지속해야 하는 장님의 운명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프고 무거운 십자가이리라.

바로 그러한 십자가의 고통을 안고 있는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희망을
가진다. “혹시 그분이라면 눈을 뜨게 해 주실지 몰라.” 그는 희망을 믿음으로 바꾸며
애절하게 매달렸을 게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눈을 뜬 그는 평생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나는 이에게 ‘그분을 믿고 바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리라.

우리는 어떤가? 주위를 제대로 바라나 볼까? 자신의 삶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다른 이에게서 긍정적인 게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게다. 왜냐면 자신의 삶 속에 기쁨이 전혀 없거나 다른 이에게 긍정적인 게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눈먼 이가 되었는지도 모르기에.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 자비를 청한다.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달려갔다. 그가 바란 것은 ‘돈 한 푼 달라.’는 게
아닌 바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거지 근성 가운데 ‘자기 연민’이라는 것이 있다나. 이는 자신의 장애에 대하여 스스로
연민에 빠져 있거나, 그 장애를 남들에게서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생존을 도모하는
무기로 사용하는 게다. 그래서 거지는 단순히 물질만의 빈곤 상태에 있는 이가 아니다.
그 장애를 신체적, 심리적으로든 극복하려는 노력보다 오히려 장애를 앞세워서
의존하려 한다.

그런데 바르티매오는 분명 달랐다. ‘겉옷을 벗어 던지고’ 달려갔다는 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것을 뜻할 게다. 그렇게 그는 준비된 이였다. 누군가의 부름에 달려갈
자세로 기다리는 이였다. 주위의 눈치에는 아랑곳도 없이 준비된 것을 실천하는
이였다. 그 결과 그는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있는 건강한 이가 되었다.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약함과 죄스러운 상처만 붙들고 자기 연민에만
빠져 있지만 말고 용기 있게 툭툭 털고 일어나란다. 그리고 영적인 눈을 뜨고 건강한
신앙인이 되라는 것일 게다. 성경에는 이처럼 눈먼 이가 눈을 뜨는 이야기가 참 많다.
하느님을 뵈면서도 믿지 않는 이가 많기 때문에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리라. 


주님은 늘 ‘섬기는 사람’이 되란다. 그러신 뒤에는 꼭 눈먼 이를 낫게 하시고는 그를
섬기는 이가 되게 하신다. 우리는 얼마만큼 섬김의 생활을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게다. ‘막연히’ 손해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원인을 찾아봐야 한다. 그런 생각은
대부분 ‘유혹’이기에. 악한 기운이 ‘밝은 모습’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니 빨리 돌아서야
한다. 생각을 바꾸면 마음은 달라진다. 선한 생각이면 더 빨리 밝아지리라.

누구나 밝은 미래를 바란다. 그러기에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부적 같은 것’을 찾고
있다. 보험에 들고, 부동산을 마련하려 애를 쓴다. 그렇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간단하게 말씀하신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상이 많은 것도 아니다. 먼저 가족이고 다음이 도움 준 이웃이다.
그들을 우선적으로 섬기라는 가르침이다.

믿음의 길도 섬기는 생활이다. ‘주신 은혜’는 잊어버리고 새로운 축복만 바란다면
기쁨의 신앙이 될 수 없다. 감사는 별로 없고 ‘지켜 주시기’만을 고집한다면 여전히
어린이의 신앙이다. 예수님은 준비된 눈먼 바르티매오를 뜨게 하셨다. 신앙의 해를
보내는 우리도 이렇게 그분께 영적 깨달음을 청해야 할 게다. 그래야 은총을 만날
게다. 네 잎 크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란다. 그러나 세 잎은 ‘행복’이다.
언제나 행운만을 쫒다 보니, 늘 곁에 있는 행복을 못 보는 장님의 생활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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