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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월31일(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聖 펠릭스, 聖女 맥틸다 님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30 조회수531 추천수0 반대(0) 신고



5월31일(금) 음 4/22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축일:5월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The Visita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Visitazione della Beata Vergine Maria
Our Lady of the Visitation
Visitatio B. Mariae V
Feast of the Visita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이 축일은 주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신 성서의 이야기(루가 1,39-56)를 기념한다.
이 방문은 ’성모의 노래’(Magnificat)라는 찬미가를 낳았다.
이 방문과 만남의 시간에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요한이 성화된다(루가 1,44).
성서의 이 이야기가 중세기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이 사건을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었다.
이 축일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전례적으로 기념하게 되었다.
보나벤투라 성인이 1263년 처음으로 그의 수도회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는데,
그때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팔일축제 다음 날인 7월 2일에 지냈다.
이 축일은 우르바노 6세와 보니파시오 9세 교황을 거쳐 비오 5세 교황때 보편 전례력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의무 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새 로마 전례력에서는 이 축일을 5월 31일로 옮겨 놓았다.
주님 탄생 예고와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 사이에 이 사건을 기념하고자 5월,
곧 성모 성월의 마지막 날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주님 탄생 예고(성모영보)축일:3월25일.인창동성당게시판1679번.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24일.게시판1238번.1836번.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8월29일.게시판1337번.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축일:7월15일.게시판1274번.
*성 비오 5세 교황 축일:4월30일.게시판1739번.
*성모님 축일 안내: 게시판1326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The Visitation

 성베다 사제의 강론에서 (Lib. 1,4 : CCL 122, 25-26.30)
마리아는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송하십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이다."
마리아는 이 말씀을 하실 때 우선 자신이 특별히 받은 은총의 선물 에 대해 감사 드리고,
다음으로 하느님께서 인류를 도우시려고 끊임 없이 베풀어 주시는 일반적 은혜들을 열거하십니다.

" 주님을 찬송하는 영혼은" 자신의 모든 내적 애정과 힘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섬기는데 바치고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 위엄의 권능을 항상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람의 영혼입니다. "

우리를 구하신 하느님께 마음 기뻐 뛰노는 사람은
"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창조주를 생각하는 데 기쁨을 두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완덕에 도달한 사람들이 모두 합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복되신 모친께서는
특히 그러했습니다.

마리아는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 태중에 기꺼이 모실 수 있었던 아드님에 대한 영적 사랑으로 불타 올랐습니다.

다른 성인들보다도 성모님은 예수님 곧 당신의 구세주께 대한 더욱 큰 기쁨으로 용약할 이유를 지니셨습니다.
마리아는 구원의 영원한 근원이신 분으로 알고 있던 바로 그분을 때가 이르면
자기 몸에서 낳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인 같은 위격 안에서 참으로 자신의 아들이시고 또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한 분’ 이시로다. "

여기서 성모님은 아무것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습니다.
권능과 위대함 자체이시고 당신의 빈약하고 연약한 종들을 강하고 위대한 인물들로 만드시고자
작정하신 분께로 자신의 온갖 위대함을 돌리십니다.
마리아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마리아는 자기 말을 듣게 될 모든 이들에게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또 그 이름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들 역시 "그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예언의 말씀대로
참되고 영원한 구원의 참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위에서 말한
"나를 구하신 하느님게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라는 데에서 말하는 그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저녁기도 때 우리 모두 이 성모의 노래를 매일 부르는 것은 훌륭하고도 유익한 관습입니다.

이렇게 하여 신자들이 더 자주 주님의 육화를 상기하고 신심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덕행을 견고하게 합니다.
교회는 또 이것을 저녁기도 때 바치기를 원했습니다.
하루가 끝나 피곤하고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갈라져 있는 영은
휴식을 맞는 시간에 흩어진 생각들을 이렇게 한데 모으는 것이 매우 유익합니다.

(가톨릭홈에서)

 *성 베다 사제 학자 축일:5월25일.인창동성당게시판1783번.

 

칠락 묵주기도 제2락:
원죄없으신 동정마리아님, 기쁨 중에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칠락묵주기도(The Franciscan crown)의 기원 및 기도방법:게시판1408번.(칠고묵주기도:게시판1657번)
 
이 축일의 기원과 동기에 대해서는 학자들간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 않다.
6세기경부터 대림 제 3주 금요일에 ’동정녀의 엘리사벳 방문’에 관한 복음이 읽혀졌다.
이 축일은 1263년경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견해일 뿐, 학자들간에는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확실한 것은 1386년 프라하 시노드에서 프라하의 대주교 요한 옌슈타인(Giovanni Jensteni)에 의해
이 축제가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축제의 설정 동기는 단순히 그의 교구만이 아니라 보편 교회를 위한 교회 일치를 기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당시 교회는 교황이 아비뇽으로 유배되고, 다른 교황이 선출되는 등 여러 가지 혼란을 겪던 상황이었다.
교황 우르바노 7세(Urbanus VII)는 1390년을 성년으로 선포하면서 더불어 이 축제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이 축제를 지내기 전에 승하하셨다.
결국 1389년 새로 교황이 되신 보니파시오 9세가 설정하였으나, 그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마리아의 옷이 보관되어 있다는 발케르네 성지의 축일(7월 2일)과 병행했다고 보고 있다.
또 요한 옌슈타인 대주교는 4월 28일에 거행하기를 원했다.
사순절의 시기를 피하고, 부활 시기 안에, 그리고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다음에 거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로마 전례 개혁은 ’주님의 탄생 예고’(3월 25일) 다음이면서, ’
세례자 요한 탄생’(6월 24일)보다는 앞서는 5월 31일에 거행하도록 하였다.

마리아는 천사의 메시지를 따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한다.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이러한 이웃 사랑은 위대한 두 인물을 만남의 터전이 된다.

세례자 요한이 어머니 태중에서 "기뻐하며 뛰놀았다"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신비를 아울러 암시한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홈에서) 

 성 즈가리야와 성녀 엘리사벳 부부 축일:11월5일(게시판1455번)

San Zaccaria Padre di Giovanni Battista
Sant’ Elisabetta Madre di Giovanni Battista
Zaccaria = "servitore di Dio", dall’ebraico oppure "il Signore ricorda"
Elisabetta = Dio e il mio giuramento, dall’ebraico

1세기경. 예루살렘. 팔레스티나
즈가리아는 히브리말로’야훼 기억하시다’라는 뜻이며,
엘리사벳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은 나의 맹세’란 뜻이다.   루가1,39-45

39 며칠 뒤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 가서
40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 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드렸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에 그의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42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43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44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45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46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47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48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50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51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53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54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55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 달 가량 함께 지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 갔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주님의 탄생과 요한 세자의 탄생 사이에 기념하고자 하는 뜻으로 5월(성모성월)의 마지막 날
의무축일로 지내게 됩니다.

방문 축일의 의미는 우리가 성모님을 본받아
이웃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정으로 진정코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려는 겸양의 덕을 배우고 익히는데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주님의 잉태소식(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심)을 듣게 된 마리아가
예루살렘 남족의 유다 지방에 사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를 기념합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홈에서)



 


주님을 잉태하신 몸으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동정녀 마리아 다정한 어머니시여

이웃을  만날 때
언제나 주님 사랑 안에서 대화할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5월31일(금) 음 4/22

聖 펠릭스, 聖女 맥틸다


 


펠릭스(5.31)

성인명

펠릭스(Felix)
축일 5월 3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활동지역 니코시아(Nicosia)
활동연도 1715-1787년
같은이름 펠리체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Felix)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는 1715년 11월 5일 시칠리아(Sicilia) 섬의 니코시아에서
아버지 필리포 아모로소(Filippo Amoroso)
어머니 카르멜라 피로(Carmela Pirro)의 아들로 태어나 그날로 바로
필리푸스 야고보(Philippus Jacobus)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구둣가게를 운영하던 제화공이었는데,
그가 태어나기 한 달 전쯤인 10월 12일에 아내와 세 자녀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은 비록 가난했지만 매우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어린 소년 시절에 펠릭스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조반니 카바렐리(Giovanni Cavarelli) 제화공의 작업장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종종 수도원 공동체를 방문할 기회를 얻어 수도원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그들의 삶의 방식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시칠리아 섬의 소년들처럼 그 역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펠릭스는 더 많은 시간을 수도원에서 보내면서 수도자들의 생활,
즉 그들의 자발적인 엄격함과 자유로운 가난, 참회와 기도,
애덕과 선교 정신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20살 때 그는 니코시아 수도원의 원장에게 평수사로 입회할 수 있도록
메시나(Messina)의 관구장 신부에게 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문맹이었던 그는 성직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평수사로서의 성소는 그의 겸손하고 단순한 천성에 비추어 더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뜻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8년 동안 계속해서 입회를 요청했지만 매번 돌아온 것은 거절의 답변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실망하지 않고 자신의 성소를 더욱 굳건히 키워갔다.
이렇듯 그는 충분한 숙고의 기회를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잘 준비한 성소자였다.
그토록 많은 거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른 비슷한 수도회에 입회할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사람과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하나이자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1743년 메시나의 관구장 신부가 니코시아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펠릭스는
그를 만나 오랫동안 간직해온 자신의 소망을 설명하고자 청했고,
마침내 관구장 신부로부터 입회 허락을 받고
미스트레타(Mistretta)에 있는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1743년 10월 10일 수련기에 들어가면서 그는 펠릭스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그에게 있어서 수련기는 많은 덕행들을 실천하며 지낸 특별한 해였다.
그의 전기를 쓴 모든 작가들은
펠릭스 수사야말로 순명과 순결, 금욕에 대한 사랑과천사적 인내에 있어서
그 수도원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다고 말했다.
이런 덕행들을 간직한 채 그는 1년간의 수련기를 마치고
1744년 10월 10일 첫 서원을 발했다.
첫 서원 후 미스트레타의 수도원장은 평소 관례와는 달리
펠릭스 수사를 고향인 니코시아의 수도원으로 보냈다.
사실 젊은 수도자가 고향 마을로 파견되는 것은 친척과 지인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예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이 세상의 모든 애착으로부터 초연한 펠릭스 수사라면
그곳에서도 영적 성장을 이루는데 있어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펠릭스 수사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금언대로
수도자는 이 세상에서 순례자요 이방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코시아 수도원에서 구호금 모금의 소임을 받는 그는
매일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탁발에 나섰다.
그는 부자들의 대문을 두드리며 그들의 부유함을 나누도록 초대했고,
가난한 이들의 초라한 대문을 두드리면서는
그들이 매일 필요로 하는 구호품을 제공하였다.
거리에서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면서도 그는 늘 평온함과 신중함을 간직했다.
그는 어떤 것을 받든지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으며,
심지어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조차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라고 응답하였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수가 없어 교리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지만 마음으로 배우고 삶으로 풀어가며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갔다.
그는 수도원 식탁에서 들려주는 교훈적인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온몸으로 느끼고자 노력했고,
니코시아 성당에서 강론을 들을 기회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는데,
매주 금요일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3월의 매 금요일에는 단단히 굳은 빵과 물만 먹으며
십자가 모양으로 두 팔을 치켜 올리고 무릎 꿇은 상태로
십자고상 앞에서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는 또한 성체성사에 대한 특별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기에
매일의 고된 일들을 마친 후에도 감실 앞에서 몇 시간씩을 보내곤 했다.
그는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다.
엄격한 참회와 금욕 생활의 결과로 육체적으로 병약해져
모든 의무에서 벗어난 펠릭스 수사는 수도원의 병실에 머물면서도
늘 다른 병든 수사들을 위해 어떠한 봉사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지만 하느님께 대한 그의 집중과 기쁨
그리고 단순한 순명의 정신은 더욱 더 강해졌다.
1787년 5월 말경 정원에서 일하던 펠릭스 수사에게 갑작스런 고열이 찾아왔다.
마카리오(Macario) 원장 신부는 그에게 순명의 자세로 누워서 쉬라고 요구하였다.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깨달은 그는 약을 처방하는 의사에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소용없다고 말하고,
5월 31일 새벽 2시에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유해는 1891년에 니코시아의 주교좌성당으로 옮겨 안치되었다.
성 펠릭스 수사는 일생 동안 엄격한 고행과 탁발로써 큰 덕을 쌓았으며
이웃에게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표현하며 살았다.
또한 그에게는 육체는 물론 영적인 병을 앓는 사람까지 치유하는 놀라운 은사가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부터 위로를 받고 회개하였다.
60세가 지난 후에도 그는 늘 하느님께 간구하며 병자들을 치료하고
노동을 계속하였다.
허가 없이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일생을 순명하며 살았던 그는
1888년 2월 12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6월 2일에 기념하고 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수도자는 이 세상에서 언제나 순례자요 이방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성 프란치스코의 금언을 몸으로 실천하여
아름다운 영성으로 구걸의 삶을 실천했던 평수사
 


글자를 몰랐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지만
엄격한 고행과 탁발로 덕을 쌓으며

순종의 미덕을 보여주신
성 펠릭스 님이시여

당신이 보여주신 천사적 삶을
세속 가운데서도 닮고자 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천상의 기도를 보내주옵소서!....아멘

 

 

 


 

 

 


멕틸다(5.31)

성인명

멕틸다(Mechtildis)
축일 5월 31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녀
활동지역 에델슈테텐(Edelstetten)
활동연도 1125-1160년
같은이름 맥띨다, 맥틸다, 메히틸다, 메히틸디스, 멕띨다


에델슈테텐의 성녀 멕틸다(Mechtildis)


 



바이에른(Bayern)의 안데흐스(Andechs)에서 태어난 성녀 멕틸다는
불과 다섯 살 때부터 부모들이 그들의 영지에 세운 수도원에서 자랐다.
수녀들의 교육을 받은 성녀 멕틸다는 신심 깊고 모범적인 소녀로 자랐으며
기도와 고행에도 열심이었다.

그녀의 약점은 성미가 급하고 말을 지나치게 빨리하는 것이었는데,
성장한 뒤에는 이를 완전히 극복하였다.
오히려 그녀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할 때가 많았는데,
가끔씩 천사와 담화할 동안에만 입술을 움직일 뿐이었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의 주교의 명에 따라 개혁 임무를 맡았는데,
순종이 희생보다 뛰어나다는 말씀을 듣고
이 과업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성취시켰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병자들을 치유하는 은사를 받았는데,
벙어리를 완쾌시킨 일은 아주 유명하며
동료 수녀의 시력을 회복시킨 것으로 더더욱 유명해졌다.
그녀는 자주 탈혼에 빠졌으며, 긴 시간 동안 계속되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급한 성미에 말이 빠른 결점 투성이 아이였으나

수녀원에서의 교육을 통해 침묵을 배워
천사와 얘기를 나눌 때만 입을 떼었다는
성녀 멕틸다 님이시여,

언제나 주님 사랑 안에서 대화하는 영성을 갖추도록
저희를 위하여 천상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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