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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문화사에 따른 전례: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배 장소들 - 성전, 회당, 집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22 조회수7,249 추천수0

[문화사에 따른 전례]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배 장소들


성전, 회당, 집

 

 

2. 예배의 장소들

 

종교마다 특징적인 예배를 거행하기에 적합한 공간이 있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유다교의 성전과 회당,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정 교회(집)에 대해서 살펴본다.

 

 

유다교의 공식적인 예배 공간인 성전은 세 차례 건축되었다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은 한 장소나 건물에서만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경건한 유다인은 어떤 곳에서라도 정한 시간이 되면 기도해야 했다. 그러나 어떤 유형의 기도나 예식은 특정한 장소에서만 해야 했다. 그러한 장소 가운데 성전과 회당은 매우 중요하다.

 

성전은 세 차례 건축되었다.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 임금(기원전 922년경 사망)이 아버지인 다윗 임금의 원의에 따라 예루살렘에 건설했으며, 공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1열왕 5,15-6,38; 2역대 2,1-5,14 참조). 이 성전은 이스라엘을 침략한 바빌론 군대가 기원전 587년경에 파괴했다.

 

두 번째 성전은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키루스 임금이 유배 온 이스라엘인들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한(에즈 1,1-11 참조) 뒤인 기원전 515년경 그의 지원과 즈루빠벨을 중심으로 재건축했다(3,1-6,22 참조).

 

긴 세월과 여러 전쟁을 견딘 이 두 번째 성전을,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유다인을 박해하고 희랍화시키려고 성전 제단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며 모독했다(1마카 1,29-64 참조). 이에 유다 마카베오가 이스라엘 민중과 일어나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봉헌했으나(4,36-61 참조) 수많은 전쟁과 침략으로 말미암아 기원전 1세기경에는 상당히 황폐화되었다.

 

기원전 20년경 헤로데 임금(기원전 4년 사망)은 자신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장엄한 성전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성전 공사는 64년에야 끝났으나 70년 로마 군대가 파괴하였고 이로써 유다인들의 성전 예배는 끝이 난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의 현현(顯現)을 드러내고 계약을 상기시킨다

 

키드론 계곡을 내려다보는 높은 언덕에 세워진 새 성전의 규모는 솔로몬의 성전과 비슷했지만 일련의 벽과 뜰로 구획되었기 때문에 좀 더 장엄하게 보였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는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 ‘여인의 뜰’은 모든 유다인에게 개방되었으며 ‘이스라엘의 뜰’은 남성 유다인만, 그리고 가장 안쪽 ‘제사장의 뜰’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다.

 

성전은 등잔대와 상과 제사 빵이 놓인 첫째 성막, 곧 ‘성소’와 둘째 휘장 뒤 ‘지성소’라는 성막으로 나뉘는데 지성소에는 만나가 든 금 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 그리고 계약의 판이 든 계약 궤가 있다(히브 9,1-4 참조). 계약 궤가 있는 지성소는 하느님의 현현을 드러내고 하느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계약을 기억하게 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헤로데가 건설하기 시작한 성전에서 기도하고 가르쳤다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셨다(루카 2,41-50 참조).

 

공관 복음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성전에 계셨다고 전한다. 요한 복음은 특히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에 성전을 자주 방문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기도하시고 가르치셨으며 치유하시고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는 제자들도 성전에서 기도하고 가르쳤다. 초창기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다인과 구별되고자 하면서부터 성전에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으나, 그들은 성전과 성전 예배를 완전히 배척하지는 않았다(사도 3장 참조).

 

 

예수님께서는 회당 예배에도 참석하셨고 가르치셨다

 

성전과는 달리 유다 회당은 그 기원이 불분명하다. 역사학자인 조셉 구트만은 회당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세 가지 전통적인 이론으로 요약한다.

 

첫째, 많은 연구자는 회당이 바빌론 유배 때 생겼다고 본다(기원전 597-538년). 둘째, 다른 이들은 신명기적 기원 이론, 곧 요시아 임금이 통치하던 기간에 회당이 만들어졌다는 이론을 지지한다(기원전 640-609년). 셋째, 소수는 회당이 헬레니즘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기원전 3세기).

 

세 이론 모두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다. 회당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당시 회당 예배에 참석하셨다는 사실이다(마태 13,54-58; 루카 4,31-37; 6,6-11; 13,10-17 참조).

 

초기에 사용되었던 ‘교회’(그리스어 ekklesia[에클레시아])를 의미하는 용어처럼, ‘회당’이라는 단어 ‘시나고그’(그리스어 συναγογη[시나고게], 히브리어 תםנכ

תיב[베트 크네세트])도 여러 사람이 모이는 집회와 건물 모두를 뜻할 수 있다. 회당은 집회에 참여하는 많은 유다인의 다양한 필요와 물리적 환경, 경제적 수단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발전했다.

 

따라서 1세기 회당의 형태를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회당 예배에서 성경 독서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토라(율법서) 보관함도 진화되어, 기존에는 가지고 다니도록 만들던 것이 나중에는 한 곳에 고정되어 화려하게 꾸며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러한 회당 예배에서 예수님과 제자들도 설교했다.

 

 

그리스도교의 예배 공간인 가정 교회

 

성전이 제사를 위한 장소이고 회당이 학습과 모임의 장소였다면, 가정 교회(Domus ecclesiae)는 축복과 기도, 식사예식을 위한 장소였다.

 

가정 교회는 로마의 주택을 교회로 개조한 것이다. 로마 시대 주택은 크게 도무스(Domus)와 인술라(Insula)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도무스는 주로 부유층을 위한 개인 저택이고 인술라는 도심의 집합 주택이다.

 

개인 주택이 교회의 출발점이 된 데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다. 현실적으로 보아도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감시의 눈길을 피해 안전하게 종교 집회를 하기에는 개인 주택이 적합했을 것이다. 또 다행히 교회의 기능을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큰 무리 없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에 필요했던 기능은 집회, 세례, 식사, 교육의 네 가지였는데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를 가장 잘 만족시키는 곳이 개인 주택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6-47).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 시복 미사 때 전례 실무자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0년 3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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