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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꾸며진 것들이 강력하여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 능력도 모르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05 조회수392 추천수0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마르코 12, 8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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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보면 여러 삶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삶'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때의 삶은 여전히 오늘의 삶과 전혀 다른 것들이 아니다는 점을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그때의 물음은 오늘의 물음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때의 형편은 지금의 형편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인간의 내면은 조금도 다르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에서'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되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진정한 대답 역시 그때나 오늘에 와서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나오는 물음이고 예수님의 대답은 하늘에서 오는 대답입니다.이와같은 물음과 대답은 세상과 하늘의 차이에 있습니다. 세상과 하늘은 같을 수 없다는 진정성으로 표현하게 되어 집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보고 들은 것들에서 물음이 있고,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들에서 대답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요한5, 20)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요한 8,28 참조)]

오늘도 물음이 있고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물음이고 하늘의 대답입니다.  다른 차원입니다. 세상의 삶이고 하늘의 삶입니다. 세상에서 보고 들은 삶은 하늘에 있는 삶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해할 수 없어 믿지도 못하는 게 세상 삶의 모습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해의 정도를 넘어 서야만 합니다. 진리의 깨달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이해를 초월하여 믿게 됩니다. 세상의 이해에서 하늘의 깨달음입니다. 진리에 대한 지혜는 그래서 하늘에서 오는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되어 집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불교와 다른 측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깨닫게 됩니다.

진리의 지혜는, 진리이시고 지혜이신 분 하늘의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진리의 지혜는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이 사랑은 '세상의 사랑'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사람에게서 오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1요한4, 7 참조) 

하늘의 하느님은 세상에서 보면 '사랑의 차원'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이유로 사랑의 지혜를 알 수 없고, 모든 진리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 힘들어 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늘을 알기도 합니다.

사람 자신 안에 그리고 공동체 안에 <사람에게서가 아닌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없다면 그는 그리고 그 공동체는 죽은 것입니다. 악에 의한 고통이 멈추지 않고, 죄에 의해서 죽음이 일어납니다. 그냥 고통과 그냥 죽음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없다면, 예수님이 없다면 그리하여 사랑이 없다면, 진리가(말씀이) 없고 생명과 평화가 없게 되어 집니다. 겉으로 거짓된 사랑과 거짓된 평화 거짓된 생명이 설칩니다.보기에는 사랑과 평화와 생명이 있는 것 같지만 꾸며진 것들입니다.

'하느님이 없어' 세상으로 꾸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진실한 것처럼 봅니다. 반면에 '하느님이 있어'라면 세상으로 꾸미지 않습니다.세상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으로 진실인 것처럼 꾸미는 것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것이 마치 진실이다 싶습니다. 진실에 대하여 사람을 현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이 진리(혹은 진실)의 전부가 아닙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사람들은 세상의 일들을 진리로 여깁니다. 악에 의한 고통과 죄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진리(진실)을 속이려 달려듭니다. 예를들면, 방관을 침묵으로 미화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하느님이 없어' 죽은 이들에게, 혹은 '하느님이 없어' 죽은 공동체 안에는,  우리가 아직 믿지 못하는 것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것들의 진실이며 이를 구원하시고자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사랑이 죽어' 고통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 안으로 평화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들어 왔습니다.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거짓으로 꾸며진 것들이 강력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힘'을 그들 스스로 없애어 버립니다. 

그리고 돈의 지배를 받는 자신과 공동체는 '이윤 계산'이라는 세상의 가치를 더욱 중요시 하게 되어 집니다. 악과 죄에 의해서 초래되는 고통과 죽음이, 다르게 표현되어지고 이윤 추구가 하느님 사업의 진실이다고 여기도록 합니다. 죄스러운 배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그들에는 한 가지 잘못이 명확한 게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와 같습니다. '가난의 영성'은 잊혀지고 사라진 것이 오래되어 갔습니다. 돈 바람(돈의 신바람)이 평화와 행복의 기초로 여기게 되어 졌습니다. 

한국에서 세계를 향해, 이런 거짓된 가치가 인간의 삶 속에 뿌리 내려지면 인간을 보호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삯꾼의 지배 체제 아래에서, 버려진 이들과 그리스도적 고통에서 사랑의 열정으로 함께 하며 구원 사업에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꾸며진 것들이 강력하여, 가난의 영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은총을 욕되게 하고 하느님의 능력을 조롱하며 성경(진리의 말씀)을 멸시하게 됩니다.더욱 새롭게 꾸미는 일도 말로써 한층 교묘해 지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죽은 이들에게는 그리고 죽은 공동체에는 사랑과 평화와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적 고통에 일치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따르는 일에 재빠른 규정과 방침들로 많은 십자가의 죽음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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