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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주는 만큼 되돌아오는 건/신앙의 해[197]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06 조회수376 추천수1 반대(0) 신고


                                                                         그림 : [풍수원] 성모 동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내리사랑’이란다.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자식이 무슨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가 아니라 자신의 자식이기에. 그래서 이 사랑을 도덕적
의무로 규정할 수가 없다. 부모로서의 본능이기에 굳이 의무로 정할 필요가 없다.
허나 자식은 부모를 사랑하려면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실천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할 게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효도를 의무로 규정한다.

하느님의 우리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건 우리가
무슨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었다는 게 아니다.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에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인간사랑은 억제할 수 없는 그분의 본능일 게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려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하느님과 이웃을 다 사랑하려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하느님 사랑에는
그분께 받은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할 게다. 그 기억은 기도에서 나온다. 우리는 기도로
하느님과 그분의 자녀인 나와 나의 이웃을 사랑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그분 사랑과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이웃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단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에.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와 나를 거쳐 이웃에게로 흘러가야 하니까.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단다. 예수님은 일러 주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너의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영원하다. 그분은 당신의 사랑을 나누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사랑은 이념, 사상, 환상이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인 현실이다.
당신은 언제나 현재이시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사랑으로 감싸시며,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시키신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은 이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온갖 어려움을 들어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아끼고
배려해야 할 게다. 사랑은 고정된 틀이 아니다. 거저 베푸는 것이며,
되받지 않아도 기쁨이 되는 거다. 그렇기에 사랑은 모든 것을 자유롭고 풍요롭게 한다.우리를 만드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자유로우신 분이시기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신다.
온몸으로 매달리란다. 그렇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총동원해야 사랑이 깨달아질 게다. 우리는 사랑의 본질인 ‘삶의 기쁨과 슬픔’을 만나면서 반복되는 ‘사랑’을
체험하며 산다. 이건 오래된 경험이다. 온몸으로 다가가서 느낀 체험이다.
그 상대가 배우자이건 자녀이건 ‘그 어떤 이’라도 될 게다. 어떤 형태로 체험했건
사랑은 축복이다. 온몸으로 다가갔기에 만날 수 있었던 영적 체험이니까 그렇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도 먼저 그분을 느끼고 만나야 할 게다. 그러려고 유다인들은
율법을 붙잡았다. 그러나 ‘철저한 율법 준수’로 하느님께 매달리면서 차츰 본질을
잊었다. 그것을 지키는 것보다 율법 ‘그 자체’에 매달렸다나. 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지의 초심을 망각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질책을 듣는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만나고자 신앙생활을 한다. 당연히 온몸으로 다가가야 할 게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때의 그 열정을 기억하면서. 그러면 어느 순간 ‘그분의 모습’이 깨달아질 게다.
 

사랑은 감동을 준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감동받고 싶은 마음이리라.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성을 다해 사랑한다는 건 그렇게 감동을 준다는 말일 게다. 어느 한 사람에게
그러한 자세로 다가간다면 그가 어찌 감동받지 않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계명을 지키려고 했다. 온몸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과 온몸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을 동일시했다. 율법 준수와 하느님 사랑을 같은 자리에 놓으려 했던 거다.
그토록 그들이 율법에 매달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감동이 생략된 채 형식으로만 흐른다면 참으로 삭막한 일 아니랴!
신앙의 해를 보내는 우리가 온몸으로 애정을 쏟는다고 말만 앞세운 채
뒤로는 메마른 행동이라면,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을 게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리라. 마음과 목숨과 정성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감동을 주라는 말인데도.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그러한 감동을 준다면
자신의 삶의 질이 분명 달라질 게다. 감동은 정녕 주는 만큼 되돌아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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