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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어나라" - 2013.6.9 연중 제10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09 조회수452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3.6.9 연중 제10주일 열왕17,17-24 갈라1,11-19 루카7,11-17

 

 


"일어나라"

 

 


“어두움을 비추는 생명의 빛으로 이 세상 밝히셨도다.”

 

생명의 빛 눈부신 희망의 달, 신록의 6월 예수성심성월입니다.
그러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6월의 수도원이나 미사의 분위기는 그대로 하늘나라의 실현 같지만
임종을 앞 둔 중환자들 가득한 병원이나 끊임없이 장례예식이 거행되는 화장터는 인생 고해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인생은 하늘나라인가 고해인가?
인생은 선물인가 짐인가?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얼핏 보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고해의 현실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그대로 빛과 어둠의 명암이 공존하는 현실입니다.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조우하는 극적인 순간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으로,
짐 같은 인생은 선물 인생으로 바뀝니다.

 

죽음은 생명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어둠은 빛으로 바뀝니다.

 

생명의 주님이 아니 곤
아무도 우리를 고해인생으로부터, 절망의 어둠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인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내신 주님께 대한 고백은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우리 가운데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느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
큰 예언자이신 주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울지 마라.”

 

외아들을 잃은 과부는 물론 우리 모두를 위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외아들을 잃은 사렙타의 과부나 나인 고을 과부의 슬픔은 얼마나 컸겠는 지요.
누가 이들을 위로하고 구원할 수 있겠는지요.

이런 어머니의 슬픔의 깊이에 도달하여 위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어제 조카네 집에 축복식 차 방문했을 때
5 살 된 손녀가 예쁘게 그린, 카드를 자랑스럽게 보여줬습니다.

카드를 펼쳐보니, “엄마 사랑해요.”라는 서툰 글씨였지만
저에겐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아이에겐 엄마가 전부입니다.
아이 마음 전부가 담긴 최상의 표현입니다.

 

성인들의 ‘하느님 사랑해요.’라는 말의 무게를 지닌 아이의 고백입니다.

만일 이런 사랑스런 자식을 잃는다면
그 어머니의 슬픔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슬픔의 저 깊이에서 만나는 주님입니다.

슬플 때는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 슬픔에 빠져있다 보면 몸과 맘이 다칩니다.

 

어느 정도 과부의 울음이 진정 되자 주님은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 위로하십니다.

 

어제 읽은
‘중생(衆生)의 병은 무명(無明)에서 오고
보살(菩薩)의 병은 대비(大悲)에서 온다.’ 라는 불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의 대비는 그대로 하느님 마음입니다.

 

보살처럼, 고해인생을 힘겹게 살아가는 중생들로 인해
늘 대비의 병을 앓았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울지 마라.’나인 고을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위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절망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슬퍼하지 마라.’
‘낙심하지 마라.’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절망스런 처지에 있을 때 찾아주시어 위로와 힘을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위로와 치유, 평화와 기쁨, 샘솟는 활력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십시오.

 

 

 

 

 

“일어나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비단 죽은 젊은 이만 아니라 과부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외아들의 죽음과 더불어 과부의 마음도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절망의 어둠 속에 살아가는 영혼들,
몸은 살아있어도 영혼은 죽어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벌떡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늘 즐겨 인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이다.’ 라는 말입니다.

 

정말 절망의 자포자기로 일어나지 않는 게 대죄이고
이런 이들은 주님도 도울 수 없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을 때가지 끊임없이 넘어지면 일어나고…하는 과정입니다.
이래야 영적 탄력, 믿음의 탄력도 보존됩니다.

믿음의 탄력이 떨어지면 내적으로 서서히 무너지고 망가지기 마련이며
이런 경우는 아무도 도울 수 없습니다.

 

의미 깊게 들은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아이의 삶 중에 돌이 지나 네발로 걷다가 두발로 걷는 것은
획기적인 변화라 합니다.

뒤뚱 뒤뚱 걷다가 넘어지면 또 일어나 걸어가고,
그러다 두발로 제대로 걷게 될 때는
아이들은 너무 좋아 펄쩍펄쩍 뛰어다닌다 합니다.

두발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하여 바오로 사도는 끊임없이 기도하라 하십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넘어지면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찬양하라.”

 

일어나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 부르며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외아들의 소생기적을 목격한 이들의 즉각적 반응은
하느님 찬양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잘 나갈 때, 건강할 때 하느님 찬양 많이 하십시오.

영육의 건강에 하느님 찬양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유별난 기적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
눈만 열리면 기적의 선물로 가득 한 우리의 삶입니다.
‘삶은 기적이다.’라 고백할 만합니다.

 

찬양하는 삶이 건강하고 아름답습니다.
일상의 기적에 대한 감사에서 저절로 샘솟는 찬양입니다.

하여 바오로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 하십니다.’
하여 우리는 매일 찬미와 감사의 성무일도와 미사를 봉헌합니다.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삶의 기적을 잘 깨닫게 합니다.
슬픔의 어둠을 기쁨의 빛으로 바꾸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장례미사 때마다 은혜로이 목격하는 사실입니다.
절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찬미와 감사의 미사입니다.
절망과 슬픔을 영원한 생명의 희망과 기쁨으로 바꿔주는 미사은총이
모두의 마음에 평정을 줍니다.

 

몸과 마음이 상할 정도로 슬픔을 주체치 못하는 믿지 않는 이들의
장례식과는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믿는 이들의 장례미사입니다.

 

다음 사렙타 과부의 고백은 일종의 하느님 찬양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이제야 저는 어르신께서 하느님의 사람이시며,
어르신 입으로 전하신 주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하느님 찬양과 감사도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자기를 불러주신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의 고백을 드립니다.

 

“그러나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눈만 열리면 주님 베풀어 주신 사랑의 기적이요
이에 대한 자발적 응답이 찬양과 감사입니다.

 

 

 

 

 

오늘 연중 제10주일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시며 위로하시고 격려하십니다.

 

“울지 마라.”

“일어나라.”

“찬양하라.”

 

참 신기하게도 바오로의 권고와 일치합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지 말고 기뻐해야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로 ‘넘어지면 일어나는 일’에 항구해야 합니다.
매일 하느님 사랑의 기적 선물에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우리 모두를 당신 생명의 빛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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