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심리학으로 말하는 탈출기 / 족보의 의미 6,14~27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11 조회수584 추천수4 반대(0) 신고
 

 족보의 의미

심리학으로 말하는 탈출기/ 도반 홍성남 신부 

 

 


탈출기 : 6,14~27 
                             모세와 아론의 족보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족보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족보에 관심이 많고 족보를 내세우기도 한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족보를 내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마태복음도 족보얘기로 시작한다.
족보가 심리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족보의 중요성

사람이 갖고 있는 무의식에는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까지 내 위에 수많은 조상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무의식은 대체로
내 바로 위의 부모와의 관계에서 생긴 기억들로
그 관계 안에서 끝난다.

그런데 집단무의식으로 들어가면 내 부모위의 기억들이 이 안에 들어와 있다.
집단무의식 안에도 협의의 집단무의식이 있고 넓은 의미의 집단무의식이 있다.
넒은 의미의 집단무의식인, 즉 가지를 계속 쳐내려가는 것은 차별성을 갖고 있다.
우리집안은 이런, 이런 집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맨 꼭대기에는 그냥 사람이 있을 뿐이다.
기업인이나 정치인이나 거지나 공통점이 그냥 사람인 것이다.
이런 사람이란 공통점이 우리의 집단무의식 안에 들어와 있다.

족보란 것은 이 개별적인 집단무의식을 찾다가
나중에 사람이라는 공통점으로
집단무의식을 찾는 과정이 족보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창세기에서 아담(Adama), 즉 이 집단무의식의 맨 꼭대기의 사람이다.
Adam은 고유명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란 뜻이다.
아담과 하와는 실제존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를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 안에 여성적인 성향의 여성성(anima)과 남성적 성향의 남성성(animus)이 있다.
젊었을 때 여성성이 두드러진 여자가 40세가 넘어가며
원래 가지고 있던 남성성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남자들은 나이를 먹어가며 여성성이 많아져 부엌일에 잔소리하고 관심을 갖는다.

남자와 여자의 마음의 발달과정이 서로 엇갈려가게 만들어졌다.
남자들이 젊었을 때, 집밖으로 돌아다닐 때 여자들이 속상해하고
나이가 들면서 여자들이 나가면 남자들이 속상해하는 것이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교차가 일어나서 그런 것이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영원히 갈등관계에 있는 것이 결혼관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되었건 이런 남성성과 여성성 전체가 집단무의식 안에 들어와 있다.
이 집단무의식을 구체적으로 조상의 이름으로 표현한 것이 족보이다.

그런데 내 조상 중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구약의 족보를 보면 아담을 조상으로 한 후손들 중에
건강한 요소들을 가진 후손들이 있고 병적인 요소가 많은 후손이 있다.
병적인 후손들은 늘 사고를 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족보 안에서도
내가 어떤 조상들을 모시고 살았는가 하는 것이
현재의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내 조상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있는 것이 좋은가?
우리나라 정서상으로는 조상들 중에 학자나 고관자리의 사람이 있으면
괜찮은 집안이라고 얘기하는데 꼭 그것만은 아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사람이 갖고 있는 자존감이 약할 때에 내 마음 안에서 열등감이 생긴다.
자존감이 약해서 마음 안에 열등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늘 인생에 있어서 선택을 하는데 늘 좋지 않은 선택을 한다.
물건을 살 때도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은 안 좋은 것을 선택한다.

자식의 배우자에 대해서도 부모들이 본능적으로 집안이 비슷한 사람끼리 결혼을 시키려 한다.
레벨이 비슷하지 않으면 결혼생활이 편치 않으리라는 예측을 하게 되는 것이,
현실생활에서 삶의 격차는 경제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것이 많다.

정서적 수준이 차이가 날 때에 문제이다.
정서적 수준이 낮은 사람이 정서적 수준이 높은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면 많은 경우가 매우 힘들다.

정서적 수준이 낮고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이 가진 특징이 분노이다.
정서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정서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의 감성인 여유로움에 대해서 늘 화를 낸다.

예를 들어 부인이 길을 가다가 하늘을 보고 너무 예쁘다하면,
남편이 하늘이 예쁘면 저것이 돈을 주냐 떡을 주냐고 한다.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정서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이것은 이래서 화가 나고 저것은 저래서 화가 난다.
이런 정서적 수준의 차이가 나는데,
문제는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은 외적조건과 상관없이 정서적 수준이 낮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보다 정서적 수준이 더 밑에 있는 사람들을 선택한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선택을 하는 이유는
본인은 자기마음이 상대가 가지고 있는 수준이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결혼해서 살아보면 정서적 수준의 차이가 들어난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잘못된 선택을 해서 고생을 한다.
그리고 좋지 않은 물건들을 사서 손해를 본다.

문제는 이것이 대물림을 한다.
그 부모가 이런 모습을 보여준 대로 따라서 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다보면 이것이 무의식 안에 배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좋은 집에 살고 돈이 많아도
왠지 그것이 안 맞는 것 같은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

좋은 옷을 입어도 잘 안 맞는 사람이 있고 그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열등감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허름하고 초라한 옷을 입어도 그렇게 안 보이는 사람은
그 사람 안의 건강한 심성이 자기가 갖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높여주는 가치상승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갖고 있는 열등감을 어떻게 해소하느냐 하는 것이
인생의 행불행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내조상들 중에 열등감이 적은 조상들이 많은 분들은 행운이다.

열등감이 많은 조상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나와야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매우 어렵다.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석가모니 같은 경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들을 다 갖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자기가 그런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는 외적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가 제일 힘든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이다.
내가 먹고 사는 것이 늘 쪼들리고 앞날이 불안하면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가 어렵고, 하루하루 살기가 바쁘다.

심리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은 출가가 안 된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들,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너무 궁핍한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기가 힘들다.

그 한계에 대해서 베네딕토 성인이나 부처님도 똑같이 얘기했다.
너무 가난한 사람들은 수도자로 받지 말라는 것이 규칙이라고 얘기했다.
심리학적으로 이해가 된다.

그런데 가끔가다가 가난한 집 아이들이 성공하는 경우가 있고
부잣집 아이들이 망가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부잣집 아들이나 고관의 아들의 병역기피는
부모가 허용했다는 어떤 의미에서 인성문제와 관계가 있다.
사회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옛날에 전쟁터에 나갈 때, 사회지도층의 아들들을 먼저 앞장세웠다
(노브리스 오브리제, nobleness oblige- 높은 신분이나 직책, 경제력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라는 뜻).
그런 의미에서 옛날 로마인들이 상류계급들이 갖추어야할 덕목을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어떤 지도자가 될 사람이 뒤로 빠질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고달프게 살아야 된다.
대선후보가 나오면 그 사람의 가족에 대한,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궂은 일이 있을 때
거기에 솔선해서 들어갔는가, 안 들어갔는가를 제일 먼저 본다.
그리고 그 사람의 열등감이 얼마나 많은가, 적은가를 봐야 된다.

열등콤플렉스가 심하다는 것은 분노가 많다는 것이다.
특징이 다른 사람이 자기의견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의 의견을 듣지 못하고 반드시 칠 궁리를 한다.

그 사람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면 그 사람의 족보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 집안에 병역기피자가 있나, 없나,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 어떤 공헌을 했는가, 아닌가, 등을 봐야 된다.

사람의 무의식 안에는 우리가 보기 싫어하는 그림자가 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면(페르소나, persona)과 같은 인격,
즉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 내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남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또 하나는 나인 자아가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그림자, 즉 싫은 나, 미운 나, 내가 묻어버린 나,
보이고 싶지 않은 나, 마음의 골방 안에 쳐 박아놓은 나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다 숨기고 싶은 자기가 있다.
그런데 이 그림자는 숨기면 숨길수록 더 드러난다.
묻어버리면 자꾸만 올라온다.

그리고 이 그림자는 역동적이고 에너지가 많다.
내가 묻어버린 욕구가 분노로 올라오니까 화를 많이 낸다.

내 안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끄집어내어 밝은 태양아래 내어놓으면
이 그림자들이 연꽃으로 변한다.
내가 미워해서 쳐다보지도 않았던 나인데,
이 나와 내적대화를 하다보면 내 안의 그림자들이 처음에는 흉한 모습, 미운 놈들로 있다가
나중에는 점차 어린아이(내재아)모습으로 변한다.

이 미운 놈들과 대화를 나누어야지만 내 안에서 그것들이 연꽃으로 다시 살아난다.
무의식에 구정물과 같은 그림자 속의 아이에게 다시 손을 넣어
그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심리적 부활이다.

많은 아이들을 끄집어낼수록 내 마음이 피어나고 건강해진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해탈이라는 것은
무의식 안의 아이들이 연꽃으로 다 피어나게 되는 상태로
연민도 분노도 없는 것을 말한다.

그냥 있는 것 자체를 수용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이런 무의식의 아이들이 다 연꽃으로 피어난 상태인 해탈을
인격적 통합을 이루었다고 한다.(융)

그것이 안 되고 내 마음 안에 있는 분노를 미워하게 되면
늘 내 마음 안이 허전하고 고독하고
자기 자신이 고아가 된 것과 같은 느낌에 휩싸여 산다.

이런 내 안에 있는 그림자들을 하나하나 꺼내는 작업들이
내 족보들을 차례차례 들여다보는 것이다.
조상님들의 이름과 사진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보고 대화를 나누듯이
내 안의 그림자를 탐색하는 과정이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