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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안토니오의 빵 / 민성기 신부 * (펌)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13 조회수648 추천수4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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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또니오의 빵

어릴 때부터 저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빠도바의 성 안또니오를 바라보면서 자랐습니다. (부산) 대연 성당 전면에 붙박이처럼 자리하고 있는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성인입니다. 첫영성체를 할 때도, 주일학교를 다닐 때도, 조금씩 철이 들면서 청소년기를 거쳐 청년이 되어가면서도 저는 늘 안또니오 성인을 바라보며 성인을 닮으려 하였습니다. 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처럼. 그리고는 대연동을 떠났습니다.

 

 

   수도회에 입회하면서 서울로 간 것입니다. 다시 돌아온 것이 부제서품을 받을 때와 사제서품을 받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그 아름다운 두 번의 서품을 대연 성당에서 발하고 사제로서의 첫 번째 사목인 보좌신부로 삼 년을 부산 대연성당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주임신부로 이곳 똑같은 대연 성당에서 사랑하는 본당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온 짧은 생애 안에 이루어진 이러한 일들을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대연동에서 자란 제가 수도자가 되고 사제가 되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인데,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은 지금 제가 바로 이 아름다운 성당에서 사랑하는 대연동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들어서면 느낌이 따뜻합니다. 먼저 제단 위에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가만 봅니다. 살아 있습니다. 왼쪽으로 고개를 향해 계십니다. 세상 많은 곳의 성당을 참배하고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보아왔지만 우리 성당의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우리 본당의 예수님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 예수님을 우리 본당의 예수님으로 모신 것이야말로 사실 크나큰 영광입니다. 제단 오른쪽으로 까만 수도복을 입고 왼팔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안또니오 성인의 동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동상을 가만히 살펴봅니다. 가난 정결 순명을 상징하는 매듭이 지어진 하얀 띠와 칠락묵주가 허리춤에 걸려 있습니다. 교회에서 선포한 복음학자를 상징하듯 성인의 왼손에 성서가 들려 있고 그 성서 위에 아기 예수님이 앉아 계시는데 예수님의 왼손과 성인의 오른손이 손가락을 맞대고 있습니다. 마치 천지창조를 이야기하는 그림 속에 야훼 하느님과 아담의 손가락을 마주하듯이. 그리고 성인과 아기 예수님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서로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왠지 차원이 다른 세상을 이야기하듯 맑고 신선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성인은 오른팔로 밑둥이 꺽여 있는 백합 여섯 송이를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세 송이는 활짝 피어 있고 나머지 세 송이는 꽃망울을 틔우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밑둥이 꺽여 있기에 여섯 송이의 꽃들이 시들어야 마땅한데 아기 예수님이 안겨 있는 성인의 품에 보금자리, 쉼터를 마련하고 있는 탓에 시들지도 않고 싱싱하기만 합니다. 줄기를 바라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푸르고 생기가 있습니다. 성인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님과 같이 포근히 안겨 있는 여섯 송이의 백합, 그들은 버림받은 백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결코 버림받음이 없이 포근하기만 한 보금자리, 성인의 품에서 활짝 꽃피울 날을 기다리면서 쉬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십자가상의 예수님이 성인의 품으로 아기 예수의 모습을 한 채 내려와 있고 그 품안에서 여섯 송이의 백합화를 활짝 꽃피우고 또 꽃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여섯 송이의 백합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대연동 가족들입니다. 어렵고 힘든 세상의 삶 안에서 우리가 매일처럼 아니 힘들 때마다 찾아오는 이 성전, 우리 본당의 주보로서 우리의 삶에 용기와 힘, 그리고 희망을 주시는 성인의 품안에 계신 아기 예수님과 마주 보고 있는 여섯 송이의 백합화, 그것이 바로 우리들 대연동 가족입니다. 저는 6+1, 즉 성인의 품에 안겨 있는 그 여섯 송이의 백합과 또 다른 한 송이의 백합인 아기 예수님이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을 생각합니다. 그 정원이 바로 한가족으로서 기쁨과 슬픔, 아픔과 어려움 등을 나누며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우리 대연동 성당이요 대연동 공동체이며, 그 꽃들이 바로 우리 대연동 가족입니다. 저는 대연성당 본당신부로서 이 일곱 송이 백합화를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매 미사때마다 우리 본당 가족들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가수 양희은, 비비안나가 노래한 <일곱 송이 수선화>(지웅 작사 · 외국 곡)를 일곱 송이 백합화로 생각하며 노래합니다.

    눈부신 아침햇살에 산과 들 눈뜰 때
    그 맑은 시냇물 따라 내 마음도 흐르네
    가난한 이 마음을 당신께 드리리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도

    긴 하루 어느 덧 가고 황혼이 물들면
    집 찾아 돌아가는 작은 새들 보며
    조용한 이 노래를 당신께 드리리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도.

 

    I may not have a mansion I haven't any land.
    Not even a paper dollars to crinkle in my hands
    But I can show you morning on a thousand hills
    and kiss you and give you seven daffodils.

    I do not have a fortune to buy you pretty things.
    But I can weave you moon beams for necklaces
    and rings.
    And I can show you morning on a thousand hills
    and kiss you and give you seven daffodils.

    Oh seven golden daffodils
    all shining in the sun
    to light our ways to evening
    when our day is done
    And I will give you music
    and crust of bread
    and a pillow of piny boughs
    to rest your head.

   안또니오의 빵!
   저는 이 노래 <일곱 송이 수선화>에서 노래되는 것처럼 안또니오 성인의 품안에 자리한 일곱 송이 백합화의 또 다른 의미를 안또니오 밥집에서 찾습니다. 매주 화요일이면 구걸하다시피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노숙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성당으로 들어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3동 390번지에 자리한 대연 성당입니다. 대연 성당의 주보는 빠도바의 성 안또니오입니다. 빠도바의 성 안또니오가 우리 대연 본당의 주보이십니다.

   안또니오 성인을 주보로 모신 성당을 가면 대부분의 성당 마당 한 가운데 아름다운 동상이 있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안또니오 성인이 내미는 빵을 받는 동상입니다. 그것이 바로 안또니오의 빵입니다. 저는 다른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안또니오의 빵과 관련된 동상을 바라보면서 저도, 그리고 안또니오 성인을 주보로 모시고 있는 우리 대연동 공동체도 언젠가는 저 동상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빈첸시오 모임이나 본당의 신심단체, 그리고 평신도 사도직협의회 상임위원회에서 몇 번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넌지시 던지는 이야기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은 말 그대로 무관심이었습니다. 안또니오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세상의 많은 수도원과 수도원 성당에서는 매주 화요일마다 안또니오의 빵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주고 있는데 말입니다. 제가 본당신부로 다시 대연 성당으로 왔을 때부터 저는 언젠가는 안또니오의 화요일에 안또니오 성인을 모시고 있는 우리 본당에서 우리 본당의 고유한 영성으로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안또니오 성인의 대축일인 지난 6월 13일 본당의 날 대축제에 본당의 날 음악회를 마치고 길쭉한 바게트 빵을 하나씩 손에 들고 나아갔습니다. 그날 사제는 그 빵을 우리 자신이 먹지 말고 길을 가다 참으로 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빵을 내어놓질 못했습니다. 우리가 먹어 치워 버렸습니다. 가족끼리 서로 자신에게 맡겨진 빵을 서로 서로 맞바꿈 함으로써 진정으로 빵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으로 여긴 것입니다. 안또니오의 빵의 의미를 살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는 나누어주지는 않았지만 그 빵에 대한 기억이 하나의 여운으로 언제나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지난 7월 12일 임동빈 보좌신부님의 첫 미사에 우리 모두는 다같이 한가족이라는 의미를 살리면서 비빔밥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함께 먹었는데도 밥이 많이 남았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남았던 성서의 빵의 기적에 나오는 열 두 광주리나 남은 빵을 누가 먹었을까 궁금했던 그 빵처럼 그렇게 많은 밥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했습니다. 결국 고민한 끝에 밥과 반찬들을 차에 싣고는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비빔밥들을 만들어 아직도 끼니를 때우지 못한 노인들이며 노숙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성서 이야기의 열두 광주리나 남은 그 빵이 어떻게 쓰여졌는지 알 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련의 사건을 치르고 난 어느 날 신자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본당 신부님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대화가 나누어지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본당 평신도 사도직협의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안또니오 밥집에 관한 안건이 공식적으로 제안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토의 끝에 안또니오의 빵의 영성을 이 시대에 살리기 위한 실천사항으로 안또니오 밥집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정말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나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안또니오 성인의 얼굴이 모처럼 환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성모님의 애타함에 끝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의 기적과도 같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안또니오의 빵을 나눕시다" 라는 현수막을 내걸어 홍보를 하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본당주보란에 안또니오 밥집에 관한 홍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단골 고객이 될 매일 본당으로 찾아오는 삼촌(?)들에게 밥집에 관한 소식을 다른 동료 삼촌들에게 전해줄 것을 권하고 홍보하였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밥집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자 밥집 설립에 호응하는 관심 있는 분들이 의견을 전해왔습니다. 밥값에 보태라고 성금을 보내오기도 하고 격려의 글도 보내오기도 하고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우리가 시작하려고 하는 안또니오 밥집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안또니오 빵을 함께 나눕시다" 라는 표어에 맞게 안또니오 밥집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본당에서 밥집을 열 수 있게끔 특별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를 드리면서 1998년 9월 1일 화요일, 안또니오 밥집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밥집을 열었습니다. 우리 본당 가족들 뿐 아니라 불교의 심산 스님, 개신교의 방영식 목사님이 함께 미사에 참여하시면서 기뻐하셨고 김경태 원불교 교무님도 오셨습니다. MBC 라디오와 텔레비젼 등의 메스콤에서 취재를 왔고, 우리 교구의 주보인 가톨릭 부산에서 지면으로 짧게나마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밥집을 시작하기 위한 그 전날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는 꿈이었습니다. 미사 중에 복음을 선포하고 강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론 중에 난데없이 낯익은 얼굴들이 나타나더니 강론을 듣고 있던 신자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었습니다. 그 낯익은 얼굴들은 다름 아닌 우리 가족들 중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몇몇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성당에 거지들이 판을 칠 수 있느냐는 등 고함을 지르면서 미사를 못하게 하고 강론을 방해하였습니다. 성전 안이 아수라장이 되고 어처구니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 꿈이 이어지면서 미사가 끝나고 예정대로 밥집이 시작되었습니다. 꿈속에서 밥집을 찾은 사람들에게 밥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줄을 서서 밥을 먹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 노숙자들인 삼촌들은 하나도 없고 복사단, 합창단, 그리고 우리 신자가족들뿐이었습니다. 노숙자들을 위한 밥집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닌 바로 우리 신자들인 것입니다.

   이 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사고방식의 차이로 본당 안에서도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본당 신부와 상임위원회에서의 결정에 무조건 반기를 들거나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소수의 집단은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꿈을 통하여 계시되는 것처럼 어쩌면 성당에서 밥집을 한다고 요란스럽게 떠벌리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지지 못함으로써 단지 남이 하니까 우리도 한다는 생색을 내는 꼬락서니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꿈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여 보니 결국 노숙자들에게 밥을 마련해 나눠준다는 것이 바로 결국에는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결국 돌아올 그 은총은 바로 우리 가족들의 몫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안또니오 밥집이었습니다. 지금은 본당 가족들 가운데서 자원봉사자들이 조를 만들어서 밥집을 위해 봉사하고 있으며, 밥집을 위해 성금을 내놓으시는 분들이며, 배추, 쌀 등 밥집을 위해 필요한 부식들을 알 게 모르게 마련해 주는 은인들이 참으로 많아졌습니다. 문임순 도미니꼬 할아버지는 자신의 평생 꿈 중의 하나인 밥집이 다른 본당도 아닌 우리 본당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에 감사하면서 밥집 운영에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계십니다. 어떤 모임에서는 간장을 담아주고, 어떤 모임에서는 김치를 담아주기도 했습니다. 내일 모레 15일 화요일 정오 낮 열 두시에는 이영근 남구청장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20kg들이 쌀 30부대를 직접 가져오실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안또니오 밥집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밥집에 관한 좋지 못한 소리들도 많이 들립니다. 나쁜 관심입니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성당 길 건너 옛 유아원 땅에 밥집이 들어설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성당에 찾아와서는 주민대표라 하고는 죽어도 유아원 땅에 밥집을 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고 가는 사람들도 있고 전화로 협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인십색 백인백색(十人十色 百人百色)입니다.
   "어렵고 가난한 분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돕겠다는 뜻에서 매일 첫 손님에게 팔은 매출금을 30일 동안 모아 적지만 성금을 냅니다. 좀 때늦은 감이 있지만 어렵고 가난한 분들에게 식사 한 끼라도 대접한다는 것을 결정하신 것은 참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것은 형식적이고 생색내기로 비춰지는 것 같습니다. 10월부터 1주일에 2~3회는 되야 하리라 사료됩니다." 그렇게 65,300원을 보내오신 분도 있는데 말입니다.

   어쨌거나 우리 본당에서는 지난 9월 1일 화요일부터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한 밥집을 열었습니다. 지금은 찾아오는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 삼촌(?)과 숙모(?)들에게 점심밥을 마련해 주고 저녁과 야식을 위해 준비해 온 도시락에 밥과 반찬을 마련해 줍니다. 또한 밥집을 찾아오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집집으로 도시락을 배달해 주고 있습니다. 하루 백이십 명에 이르는 삼촌과 숙모들이 찾아오고 있고 김창배 내과의 모이세 원장님의 배려로 하루 삼십에서 오십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무료진료와 함께 약을 타 먹고 있습니다.

   안또니오 밥집은 우리 본당의 얼굴입니다. 그나마 대연동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대연동의 얼굴이요, 우리 남구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밥집으로 인하여 본당 가족들이 변화해 가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변화하니 가족 개개인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을 표방하는 교회의 정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인 열린 마음 열린 공동체로 나아가는 교회 영성을 우리 본당의 주보성인의 영성에 맞게 토착화시켜 실천하고 있습니다. 빠도바의 성 안또니오의 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처럼>을 축으로 우리 본당 주보성인의 영성을 계속해서 살려 나가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로마 15, 7)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먼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절름발이들로 하여금 걷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병환자들로 하여금 깨끗이 낫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머거리들로 하여금 듣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 하여금 되살아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서로 서로 받아들입시다

    만일 여러분의 형제가
    교만으로 눈이 먼다면
    여러분의 겸손으로 보게 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형제가
    위선으로 발을 절름거린다면
    여러분의 진실로 걷게 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형제가
    퇴폐스런 욕망에로 빠진다면
    여러분의 단순한 말과 단순한 행동으로 깨끗이 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형제가
    탐욕으로 귀가 멀었다면
    가난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보여 주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형제가
    과식이나 과음으로 죽는다면
    여러분의 절제로 되살아나게 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형제가
    가난하다면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2천년 대희년의 정신을 안또니오 영성으로 살려나가야겠습니다. 안또니오의 빵을 나눕시다!

                            (출처: 고 민성기 요셉신부님의 저서'일상의 신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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