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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우리 의로움과 그들 의로움의 차이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13 조회수1,035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복음: 마태오 5,20ㄴ-26






스테파노의 순교



렘브란트(Rembrandt) 작, (1625), 오크, 리용 미술관


     < 우리 의로움과 그들 의로움의 차이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란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강동원은 배신을 많이 당한 끝에 삶이 싫어 죽고 싶어 일부러 살인 누명을 쓴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나영을 만나고 나서는 이젠 살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이나영도 엄마를 그렇게 증오하여 죽고 싶었지만 강동원을 알고 나서는 중병에 걸린 엄마를 용서하고 죽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강동원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설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런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상대에게 가지는 똑같은 감정으로 나를 대한다는 것입니다. 즉 상대가 밉고 죽이고 싶다면 내 자신도 밉고 증오스러워 죽이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시대의 살인마 유영철에게 어머니, 아내, 아들을 살해당한 고정원씨는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은 그 안에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누가 죽였는지도 모르는 바로 그 사람과 가족을 지키지 못한 자신도 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영철을 용서하겠다고 결심합니다.

내 아들을 죽였어도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양자로 삼고 싶다. 유영철이 허락하고 상황이 된다면 그가 남긴 자녀 둘을 내 친손자, 손녀처럼 돌봐주고 싶다.”

그는 유영철에게 편지를 보냈고 사죄의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기 전에는 오로지 죽고 싶은 마음 하나였는데 다 용서하고 나니까 그런 마음이 없어졌어요. 아이들을 위해 좀 더 내가 살아야겠구나 했어요.”

 

유영철씨는 용서라는 것을 했지만 결국 그것은 유영철을 살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끝까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면 결국 그는 자살을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미움이란 것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줄 알지만 결국 자신도 그 안경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절의 깃발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한 승려는 깃발이 펄럭인다 하고, 또 하나는 바람이 펄럭인다 했습니다. 이렇게 둘이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자, 육조가 말했습니다.

바람이 펄럭이는 것도, 깃발이 펄럭이는 것도 아니고, 다만 너희들의 마음이 펄럭일 뿐이다.”

불가의 선문답에서 보듯이 그들은 이미 자신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마음 상태에 따라 세상도 보이고 자신도 그렇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색안경을 끼지 말고 맑은 마음으로 자신과 우주를 비추어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성철스님은 이렇게 말하시고 입적하였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

무학대사도 이성계와의 대화에서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남을 어떻게 보느냐가 자신까지 결정하게 된다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 색깔이 없는 안경을 쓰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 보이지만 만약 돈의 색이 입혀지면 산도 돈으로 보이고 물도 돈으로 보이고 자신도 돈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는 방법은 거울에 비추어 보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그 거울을 볼 때는 색안경을 끼고 있는 자신이 그 색을 통해서 보여지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빛으로 자신도 보이게 마련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안경의 색을 빼내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좋은 색이 입혀진 안경을 끼는 것이 목적입니다. 사랑의 안경을 끼면 그 사랑으로 사람들이 사랑스럽고 자신도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무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빛깔의 안경을 제공하러 오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림자를 잡으려고 앞으로 가면 그림자도 앞으로 가 버려서 잡히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그는 점점 빨리 걷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그림자도 점점 빨리 달아났습니다. 그는 뛰기 시작했습니다. 속도는 점점 빨라졌지만 그림자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그림자를 잡으려고 뛴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습니다. 결국 저녁이 되자 그는 탈진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쫓던 그림자는 저녁노을과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만약 그림자를 쫓는 일을 멈추고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갈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나에게 화가 나거나 증오가 치밀어 오를 때 그것에 집중하여 그것을 제거하려 해서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빛을 받지 않도록 자리만 옮기면 그만입니다. 마찬가지로 안경만 바꿔 쓰면 그만이란 것입니다. 나무그늘에 들어가면 더 이상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안경만 바꿔 쓰면 그런 감정들이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모든 안 좋은 감정들이 일지 않도록 감싸주는 그 나무그늘은 무엇일까요?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이 산을 산이도록, 물을 물이도록 직시할 수 있게 만드는 깨끗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겸손의 그늘에서는 어떤 안 좋은 감정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안 좋은 감정의 씨앗이 교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이고,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형제들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라고 욕하고, 멍청이라고 하면 지옥에 넘겨진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판단하는 그 안경으로 나를 심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상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런 현상으로 보이게 만드는 나의 시선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본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돼지에서 부처가 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했던 스테파노 성인처럼 아예 미움과 증오의 씨앗조차 존재하지 않게 우리 온 자신을 변화시켜 겸손과 사랑의 그늘이 우리 자신을 완전히 뒤덮을 수 있도록 변화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화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미움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미움이 일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됩시다. 억지로 사랑을 실천하려고 힘들이지 말고 그냥 사람 자체가 사랑인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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