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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는 게 은총이다/신앙의 해[208]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17 조회수559 추천수2 반대(0) 신고


                                                                그림 : [베론] 성당 외부와 잔디밭

예수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셨다. 물론 침묵하지도. 그러니 왼뺨마저 돌려 대라는
것은 ‘무조건 참고 또 참아라.’라는 게 아닐 게다. 실제 많은 이가 ‘참고 참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라며 자신의 화를 털어놓는다. ‘착한 이’에 대한 강박 관념에
시달리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교회에서 말하는 ‘착함’은 ‘정의’가 배제된 게 아니다.
덮어놓고 굴복하라는 것도 아니다. 불의에 무조건 당하지 말고, 폭력에 대항하되
비폭력적인 방식을 찾으라는 거다.

예수님도 대사제 한나스의 심문을 받으실 때 성전 경비병으로 부터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라며 뺨을 얻어맞았다. 이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무조건 맞기만 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

상대방의 양 뺨을 때리려면 손바닥과 손등을 차례로 사용해야 할 게다. 손등으로
상대방을 때린다는 건 심한 모욕과 멸시까지 담는단다. 예수님은 누가 오른뺨을
때리거든 다른 뺨마저 대어 주라신다. 이런 행동은 그의 노예가 되라는 게 아니다.
이는 그의 마음을 움직여 하느님의 자녀로 평화롭게 살자는 초대의 몸짓이리라.
예수님은 악보다는 선을, 법보다는 사랑을 택하라면서 우리를 초대하신다.
나의 아픔을 너의 것으로 갚지 않으려면 온유함과 겸손함을 지녀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예수님은 악의를 품고 달려드는 이에게 저항하지 말고, 달라는 이에게 주라신다.
이해관계를 따지지 말고 오로지 ‘사랑으로 악을 이겨라.’신다. 도저히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다. 이건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렇다. 신앙인의 삶은 계산된 생활이 아니며, 폭력적인 방법으로
일을 해결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건 그분처럼 다른 이에게
베풀며 살아가는 사랑의 삶을 사는 거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온갖 모욕과 멸시를 참으시면서 당신께 다가오는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다.

그러므로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으신 그분의 거룩하신 마음을 닮아, 그 길을 따라야 할 게다.
살면서 억울한 일이 참 많다. 직장에서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주위의 오해와 편견으로
소외를 당하면서 미움도 받는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벌이나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고, 누명을 쓰거나 이유 없이 해를 입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산다는 게 이렇게 녹록하지는 않으리라.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은 가끔은 ‘사랑’이란다. 악을 악으로만 갚을 때는
그 세력은 더욱 번창해질 게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 대 주는
누군가의 ‘바보 같은 사랑’과 희생이 있어야 악은 그 힘을 잃는다.
사회에 질서와 정의를 세우는 게 인간이 만든 법과 힘일 것 같지만,
실은 더 깊은 곳에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이 있을 게다. 전능하신 그분께서
결국에는 십자가를 지시면서 바보 같은 사랑을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건 ‘삶의 억울함’을 인정하시는 모습이다. ‘인생의 불공평함’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이다. 그렇다. 우리의 삶에는 억울함과 불공평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 역시 살면서
억울함을 당한다. 때로는 모함도 받고 때로는 이용도 당한다. 오해 때문에 멍들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하였는가?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였나? 아니면 악쓰며 반항하였을까? 결과야 어떻든 남은 것은 상처일 게다.

이젠 받아들여야 한다. ‘억울함의 상처’가 십자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게다. 생각하면 가슴 떨리고 증오가 솟더라도 끌어안자. 그러면 은총이 함께하리라. 누군가가
‘오른뺨을 치더라도’ 눈은 흘길지언정 참자. 실제로 예수님도 불의에 항거하시면서도
왼뺨마저 내놓으시는 용기를 보여 주셨다. 이것이 그분의 정신이다. 그분께서는
신앙의 해를 보내는 우리에게도 당신의 이 정신에 따라 살기를 정녕 바라실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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