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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의 집을 부정하고 거부하다 [위선의 힘에 갇혀버린 집]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18 조회수361 추천수1 반대(0) 신고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오 6, 1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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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2코린토 2, 9 - 11>.  이는 제 1독서의 성경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많은 가르침을 배우고 있습니다.오늘 이 시대에서도 여전히 율법적이고 바리사이적인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살아서 움직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시대에서나 또는 지금의 시대에서나 사람을 살리는 사랑보다는 온갖 규정들과 방침들에 의해서 평화보다는 고통을 생명보다는 죽음을 불러 일으키도록 합니다.여기에는 물론 서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서 어떤 체제 아래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만들어 낸 여러 규정들이, 가난한 사람을 고통과 죽음에 내던지게 하였으며 지금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로 어떤 체제 아래에서 많은 규정들과 방침들은 버려진 이들을 고통과 죽음에로 내몰아 갑니다.

이 모두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어떤 지배적인 체제 유지를 위해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 말씀의 가르침을 거스리고 세상의 논리에 (이치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할 것입니다. 하기야 그들이 유지하고자 하는 체제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이같은 생각 때문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의 논쟁을 벌이게 되는 그 가운데서 결국, 자신들의 규정과 방침들에 따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나 그리고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랑(사랑에서 난 사랑)을 더욱 강조하십니다. 하지만 사랑을 가볍게 여기는 인간의 생각은, 사랑에서 난 사랑을 알지 못하고 단지 인간(세상)에서 난 사랑에 대하여서만 아는 까닭에 있습니다.그리하여 하느님에서 온 사랑을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나타나신 사랑을, 그저 세상에서 난 사랑으로 하잘것 없이 보고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그런 짓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드러나신 사랑은, 인간에게서 온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 곧 사랑에서 난 사랑입니다.
 
사랑의 차원이 다릅니다. 율법적인 세상의 온가지 규정들과 방침들을 따르는, '세상에서 오는 사랑'의 정도와 그 차원의 수준이 크게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가리켜 <큰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까지 제 게시글에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라고 끊임없이 말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신 이 큰 사랑은 세상(체제)의 규정들에 의한 인간의 사랑 차원과 다른 차원인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구별을 하지 않는 세속에 빠진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그들은 하느님 곧 사랑에서 온 사랑이신 예수님 보기를 하찮은 사랑의 정도로 따지고서는 자신들이 만든 규정들과 방침들의 힘을 내세워 '예수님의 사랑'을 마침내 없애어 버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우고자 했던 집을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고자 한 '사랑의 집'과 다릅니다.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에서 해방하시려고 했던 하느님의 집이셨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이 '사랑의 집'을 부정하고 거부한 것입니다.

세속의 육적인 감흥에 빠진 종교 지도자들은, 남들에게 <사랑을 행동하는 집>으로 보이려고 사랑을 가르친다고 말하지만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까지,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보라, 너희 집은 버려져 황폐해질 것이다.(마태오 23, 38 - 39 참조) 와 같아질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사랑을 복되시다고 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사랑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이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없애고서도, 사랑의 행동을 말하며 사랑을 가르친다 하고 위선에 갇혀버린 집은 황폐해 진다 할 것입니다.지금의 이 종교 지도자들이 만든 규정들과 방침들은 예수님 시대의 그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지혜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그들의 생각과 마음들은 지금이다고 달라진 것은 아닌 것입니다.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나 삯꾼의 지배 아래에서나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은 복되어라'고 말하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이 멈추지 않는 집을 남들에게 감추고 뿐만아니라 남들 앞에서는 이를 다르게 보이고자 하는 사랑의 위선은 (거짓 사랑, 죽은 사랑은) 육적인 감흥에 빠져 악을 결코 볼 수 없는 그들의 죄 때문에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위선에 갇혀 악과 죄의 종살이를 하면 그들에 의해서 세계로 퍼져 나가는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이라는 어둠의 세력이 그 씨앗을 뿌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점점 없애어 가는 것들의 '악한 권세'가 됩니다.이는 예수님의 복음 사랑의 토양을(하느님의 나라를) 가로 막는다는 뜻입니다. 

'가난의 영성'은 오래 전에 잊혀지고, 대신에 '돈과 삯꾼의 영성'이 자리를 잡았으니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은 세계로 뻗쳐 나가게 되었습니다.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품 속 있었던 참으로 가장 보잘것 없는 어떤 한 어린 아기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시는 고통으로 그들의 죄값을 대신 감당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힘이신 십자가와 그리스도에 의지하기 보다는, 당연히 필요는 하지만 돈의 힘과 삯꾼의 힘에 의지해야만 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만들어 낸 규정들과 방침들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가리키신 큰 사랑을 거스리며 위선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죽은 사랑, 죽은 행동이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어지는 것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곧 '사랑에서 난 사랑'을 없애어 버리고자 하는 악의 세력, 죽음의 세력을 퍼지게 하는 일입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무엇을 뿌리며 어떻게 뿌리는지, 하느님의 힘(십자가와 그리스도)에 의지하면 '하느님의 씨앗'을 뿌리게 됩니다.
십자가와 그리스도는 큰 사랑의 힘(씨앗)입니다.그리스도의 고통이라고 할 십자가에 결합하지 않는 '위선의 힘'을 결코 뿌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결합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형제들은) 결코 위선의 힘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위선의 힘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동체에 그리스도적 고통이 없다는 것은,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반증하는 것입니다. 

이를 볼 수 있는 참된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일치하여 틀림없이 회개하며 '사랑의 집'을 또한 분명히 희망하고 인내롭게 나아갑니다.참된 '큰 사랑'의 형제들에게는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신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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