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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인들의 특징 - 2013.6.24 월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24 조회수526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3.6.24 월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사49,1-6 사도13,22-26 루카1,57-66.80

성인들의 특징

오늘은 ‘성인들의 특징’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하느님 사랑에 푹 빠져 살았던 이들이 성인입니다.

가톨릭교회의 큰 보물들인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 증거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하느님 증거도 없습니다.

웬만한 신학서적이나 에세이보다 성인의 전기나 일기, 자서전을 읽을 때
큰 감동에 도움을 받곤 합니다.

성인들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사랑에 소진했던, 100% 삶을 사셨던 분들입니다. 6월 중에 기념했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가 그랬고, 성 로무알도가 그랬고,
며칠 전의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그랬습니다. ‘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 살았느냐 로 판별되는 성인들입니다.

“그는 1초도 허비한 적이 없다.
그는 수면과 음식을 최소한 취하면서 모든 에너지를 저술, 강의, 기도에 바쳤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 대한 짧은 증언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대축일입니다.
성 요한을 중심으로 하여 성인의 특징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성인들은 하느님이 보내신 분들입니다.

모든 성인들에게 공통적인 자의식입니다.
우연한 존재가 아닌 하느님께서 사명을 주어 파견하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복된 세례자를 보내시어’ 미사 본기도 역시
하느님께 파견 받은 요한 세례자에 대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세례자 요한 역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주께서 나를 태중에서 부르셨고, 내 이름을 태중에서 기억하셨도다.”

이사야서 말씀이 그대로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첫 후렴에 반복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께서 보내셨음은 복음의 그 이름에서도 드러납니다.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는 순간,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바로 이 찬미가는 매일 아침성무일도 때 우리 역시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요한’이란 뜻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신다.’
‘하느님이 은총을 베푸신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주어가 된 요한의 삶임을 깨닫자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즈카르야입니다.

진정 하느님이 우리 삶의 주어임을 깨달을 때
하느님 향해 활짝 열린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찬미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이 보내주셨다’ 라는 믿음의 고백,
바로 이게 우리의 성소요 자존감의 원천입니다.


둘째, 성인들은 모두 겸손한 분들이셨습니다.

겸손해서 성인입니다.
겸손이 성덕의 표지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제 자리와 제 역할을 알 때 겸손입니다.

자기를 몰라 교만이지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알 때 비로소 겸손입니다.
진정 성인인지, 하느님을 만났는지 알려면 그의 겸손을 보면 압니다.
가장 쉬운 게 남 판단이요 가장 어려운 게 자기를 아는 겸손입니다.

세례자 요한 진정 겸손한 성인이셨습니다.
다음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되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렇게 주님 앞에서 자기를 아는 게 겸손입니다.
주님을 떠나선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겸손도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이런 겸손이 진정한 매력입니다.
성인들의 매력 역시 겸손에서 기인됨을 봅니다.


셋째, 성인들은 광야의 고독과 침묵을 사랑하셨습니다.

성 요한 세례자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이를 입증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 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광야의 고독과 침묵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 정신도 굳세어진 요한임이 분명합니다.

어떤 형태로는 광야의 고독과 침묵 없으면 그 삶은 천박해질 수뿐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나를 잊게 됩니다.
광야에서 내공을 쌓은 후 세상의 백성들 앞에 나타난 성 요한입니다.

수도원의 앞문은 세상에 뒷문은 사막에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관상과 활동의 조화를 뜻합니다.
하여 예수님 역시 하루의 활동 후에는
광야의 고독과 침묵을 상징하는 외딴 곳에 머무셨습니다.

우리 모두 각기 고유의 성인들이 되라 불림 받았습니다.

하느님께 파견 받은 존재임을 믿으십시오.
겸손한 삶을 추구하십시오.
광야의 고독과 침묵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이렇게 살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편149.14r).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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