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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가의 서, 반인반수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27 조회수394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마태오 8, 1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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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며 자신의 나병을 고쳐달라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 환자의 청원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비록 부족한 점이 있을지라도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도움을 간절히 빌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손을 내밀어 우리에게 대시며 자비로우신 응답을 해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부족한 우리의 기도 말을 그대로 받아서 입니다.

물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서 자신의 소원을 청할 때에, 무슨 부족한 점들이 없나 하고 자신을 꼼꼼하게 잘 살펴보는 일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병 환자에게서 볼 수 있는 부분은 그러한 점과는 다소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의 겉 모습은 분명히 남들이 기피할 정도의 아주 처량하기 짝이 없는 흉한 몰골일 것입니다.단지 그의 속 마음만큼은 깨끗하다고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그의 기도 소리 말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해 달라는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겉 모습은 남들에게 보기좋게 보이고자 하여도 자신의 속 마음 만큼은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번드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일종의 자신감을 불러 일으키는 자아 만족성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심리학적 내적 분석을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측면을 조금 이야기 할 뿐입니다.우리는 요즘 '반인반수'의 드라마를 접하는데 곧 '구가의 서'입니다. 인간이 되고 싶다면 정녕 자기 내면의 짐승같은 부분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겉은 사람이지만 속은 짐승같은 내면이 그 사람을 짐승이게 합니다. 반대로 누구나가 속은 짐승같은 내면성이 항시 상존해 있다고 할지언정, 밖으로는 사람다운 행동을 하는 진정한 인간이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참된 인본주의> 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거친 삯꾼은 자기 속 내면의 짐승같은 본성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러 하면서도 남들에게는 아닌 척하며 속이는 것을 봅니다. 어떤 경우에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악한 것들을 공유하게 합니다. 이러한 이중적 면이 오히려 진짜 나병 병자의 추한 몰골일 것입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사람이 아니고 짐승입니다. 짐승같은 짓을 하는 인간은 겉 모습이 추한 사람만이 결코 아닙니다.사람은 얼마든지 추해 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며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 인간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가리켜 <인간다운 것>이 아닙니다. 이를 두고 <가짜 인본주의>라고 일컫습니다. 진짜 인간은 자기의 잘못을 알며 자신의 실수를 고치는 일에 게으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짐승같은 내적인 본성을 잘 제어하며 사람답게 행동하고자 합니다. 

이는 자기 안에 짐승이 사느냐 아니면 자기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느냐에 따라서 자기 행동이 선택되어 지며 사람인가 혹은 짐승인가 하는 것이 결정되어 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신 말씀 그대로 한다면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오 12, 28 참조)]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안에 혹은 공동체 안에 바로 상기의 말씀에서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 이 '내가'는 틀림없이 예수님이시지만 자기 안에 그리고 공동체 안에 하느님 말씀의 '내가'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너희 안에 짐승이 와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자기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지 않으면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짐승과의 일치입니다. 따라서 버려진 이들에 대한 인간 보호라는, 예수님의 구원 행위가 공동체에서 (자신에게서) 나타나지 않습니다.(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교서 참조) 

버려진 아기와 노약자들에게 짐승같은 삯꾼에 의해서 악에 의한 고통이 끊이지 않고 죄에 의한 죽음이 멈추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혹은 공동체 안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머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고통에 결합하지 않고, 짐승같은 짓들을 오히려 보호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스런 배경이 될까요. 

이미 너희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짐승들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안에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지 않고 그 대신에 자기 안과 공동체 안에는 짐승이 사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마귀라고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없다면,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도 그 공동체 안에는 사시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하느님의 영입니다. 성령이신 하느님의 영이 없는 까닭으로 마귀라고 불리어질 그 짐승들은 보호받고 도리어 버려진 이들은 재차 버려지게 되었다 말할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이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1코린토 6, 16 - 17 참조)]
에서도 알 수 있는데, 먼저는 주님의 몸과 결합하고 그 다음이 주님의 영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영(성령)과도 결합되지 못합니다.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없으므로 이어 성령께서도 없고, 짐승같은 (마귀같은) 삯꾼들과 거짓 예수의 형제들이 공동체를 지배하게 되며 주님의 은총(죽과 이불과 기저귀 등)으로 버려진 아기들과 노약자들에게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을 주어도 이를 없애지 못합니다.

가난의 영성 보다는 돈의 힘(돈 바람)으로 '한 통속'(짐승과 한 몸)이 되었으니 겉 모습은 사랑이라고 번드러하면서도 속은 추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자기 속이 깨끗해야 자신의 겉도 깨끗해 지기 마련입니다.자기 혹은 공동체가 깨끗한지는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통에 빠지고 죽음에 빠진 이들이 그 나무(공동체)의 열매인 것입니다. 

증거가 되는 아기들과 노약자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깨끗하게 되었는지 혹 아닌지는 그 공동체가 또는 자기 자신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있는 처지에 대하여, 회개하고 간절하게 '예수님의 사랑'이 공동체 안에 있기를 청원하였는지 그래서 자기 혹은 공동체가 노력하였는지에 달렸다 하겠습니다. 




 


<참고> 예수님 앞에 엎드린다는 의미는 ; 예수님을 밖에서 찾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기 안에 공동체 안에 사시게 한다는 의미인 것을 의미합니다. <게시글 참조; 예수님을 밖에서 찾다 (와) 예수님을 안에서 찾다 ; 상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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