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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을 닮은 삶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30 조회수629 추천수9 반대(0) 신고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루카 9,51-62



 

예수님을 닮은 삶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한 한 주간 되시길 빌며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기쁨충만 하시길 희망합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길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에게 정복당한 북왕국 이스라엘에 정착한 토착민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짐산에서 하느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자기들만의 성전을 그곳에 건립하였습니다. 이 믿음이 장벽이 되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다인 사이에는 적대감으로 인한 싸움도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냉대를 받으시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사실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태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지냈는데 그들의 태도는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눈먼 이들을 보게 해 주시고,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의 생명을 파괴하러 오지 않으시고 구원하러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 안에서 원수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 있는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보면 오해도 있고, 모함과 시기질투, 미움과 싸워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겨내는 승리의 길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하시며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냉대하는 마을을 피하여 다른 마을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무와도 맞서지 않고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목적지를 향합니다. 그의 목적지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누가 반대를 하든 상관없이 당신의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가야할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마음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에 직면할 때 예수님의 처신인지? 아니면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격하게 반응하고 있지 않은지? 사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통해서 내 마음의 너비와 폭, 깊이를 보게 됩니다. 그는 어떻게 보면 은총의 도구입니다. 개구리는 개굴개굴 울다가도 위협을 느끼면 소리를 멈춥니다. 안전하다 싶으면 또 울지요.. 강아지는 먼저 짖어대고 그 다음에 자기에게 유익할 것 같으면 꼬리를 칩니다. 우리 신앙인의 처신은 일단은 침묵하고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논어의 ‘선진’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공자께 여쭙니다.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곧장 하다니?”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는냐?는 말씀입니다. 제자 ‘염유’가 똑같이 묻습니다.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십니다. “들었으면 곧장 해야지!” 이에 ‘공서화’가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는 까닭을 묻자 공자께서 대답합니다. “염유는 물러서는 사람이라 나가게 했고, 자로는 나서는 사람이라 물러서게 했다.”

 

참 스승은 상대에 따라 다르게 대답하십니다. 눈높이를 맞춰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길을 떠나고 냉대를 받으며 가정이라는 안전한 처소조차 없이 지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이는 말합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시며 우선순위에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하는 이에게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시며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서로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게 얘기하고 있습니까? 자녀에게, 이웃에게 내 것을 강요하고 가르치려는 욕심을 부리지는 않나요? 자녀들도 큰 아이, 작은아이가 받은 탈랜트가 다릅니다. 상대를 위하기보다는 내 유익을 먼저 챙기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어른과 어린이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시죠? 어른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 선포는 다른 어떤 일에도 우선합니다. 주님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은 입으로 선포되기도 하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의 모범, 표양을 통해 선포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삶’, ‘육을 거스르는 삶’을 통하여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당부하셨습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 왜 그러셨을까요? 철저한 ‘무소유’는 가진 것으로 행세하는 세상에서 세상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한 눈 팔지 말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다른 헛된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해야 할 일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은 정처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이미 지나간 일에 매여 있어도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를 자꾸 돌아보아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마침표를 찍은 것에 대해서 물음표를 달지 마십시오. 그분께는 오직 ‘지금여기’가 유일한 삶의 자리였습니다. 우리도 약속된 천상의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지금여기’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천상은 여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여기서 열립니다. 그러므로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드십시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라티아5,13).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사랑을 사는 나의 처신에 따라 복음이 선포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사랑합니다.

 




 

 

이기는 사람은 넘어지면 앞을 보나

지는 사람은 넘어지면 뒤를 본다.


이기는 사람은 눈을 밟아 길을 만들고

지는 사람은 눈이 녹기를 기다린다.


이기는 사람의 호주머니에는 꿈이 들어있고

지는 사람의 호주머니에는 욕심이 들어있다.


이기는 사람이 잘 쓰는 말은 ‘다시 한 번 해보자’이고,

지는 사람이 잘 쓰는 말은 ‘해봐야 별 볼일 없다.’이다.


이기는 사람은 걸어가면서 계산하지만

지는 사람은 출발하기 전에 계산부터 한다.


이기는 사람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지만

지는 사람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이기는 사람은 행동으로 말을 증명하지만

지는 사람은 말로 행위를 변명한다.


이기는 사람은 인간을 섬기다가 감투를 쓰지만

지는 사람은 감투를 섬기다가 바가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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