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참 자유인(自由人)에로의 소명(召命) - 2013.6.30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30 조회수346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3.6.30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열왕기 상19,16ㄴ.19-21 갈라5,1.13-18 루카9,51-62

 

 


참 자유인(自由人)에로의 소명(召命)

 

 

자유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뜁니다.
6월 예수성심성월 마지막 날,
주님은 우리에게 ‘참 자유인에로의 소명’이라는 좋은 강론 주제를 주셨습니다.

산책 중 향기 맡고 찾아 낸 자귀나무 꽃 은은한 향기였습니다.
그대로 자연의 향기, 자유의 향기, 존재의 향기, 겸손의 향기,
주님의 향기를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유로워 사람이요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은 그대로 자유를 찾는 갈망입니다.

어느 자매님이 기도부탁 차 수도원을 다녀갔습니다.
고 3학년의 아들이 가출한 지 10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답답하여
점집에 가지 않고 하느님 집인 수도원을 찾은 것입니다.

바로 이 아이 역시 자유를 찾아 가출한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자유를 찾아 탈출을 꿈꾸는 사람이 어디 한 둘 이겠는지요.

 

어제 어느 현자와의 대화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이제 다 써먹어 남은 것이 없어 후손들에게 남겨 줄 유산이 없습니다.”

 

즉시 공감하여 말을 받았습니다.
“맞습니다.
가장 좋은 게 자연 유산인데 자연도 망가졌고 문화 유적도 많이 망가졌고,
가치관도 윤리도덕도 무너져 사람도 망가졌으니
도대체 뭐를 남겨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람 역시 자연입니다.
환경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연과 자유는 함께 갑니다.
자연이 병들면 사람이 병들고 자연이 망가지면 사람도 저절로 망가집니다.

하느님은 자연을 만들었고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 합니다.

사람이 만든 자본주의 사회 도시들은 그대로 연옥이요 지옥이 되어 갑니다.

도대체 자연친화적인, 자연과 조화와 공존을 이룬 집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한국을 방문한 어는 외국인은 아파트가 흡사 성냥갑을 싸놓은 듯 보였다 합니다.

 

‘집(house)’은 있어도 ‘가정(home)’은, 자연의 고향은 사라져 가는 현실에서
자유를 찾는 싸움은 치열할 수뿐이 없습니다.

하여 무수히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자연의 고향을 찾듯
자유의 하느님을 찾아 수도원에 옵니다.

부정을 통한 긍정의 자유입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자유를 찾는 싸움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자유는 제멋대로의 방종이 아닙니다.
자유에의 소명은 자유를 위한 끊임없는 싸움을 의미합니다.
결코 저절로 공짜로 얻는 자유가 아닙니다.

 

 

 

 

 


첫째, 주님의 제자가 되어 살 때 참 자유인입니다.

 

마음 향해 따를 희망의 대상이 없으면 자유도 없습니다.
답답하면 저절로 눈 들어 하늘을 보는 것, 또 길게 난 길을 바라보는 것,
먼 산을 바라보는 것, 아득한 지평선을,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
모두가 자유를 찾는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아, 이제 괴물 같은 위압적인 대형 건물들이 가려
바라볼 하늘도 산도 사라져 가는 현실입니다.

온갖 난개발로 인한 자연 파괴로 바라 볼 길도, 지평선도 사라져 가는 현실입니다.

 

바로 하늘이, 산이, 길이, 지평선이, 수평선이 상징하는바 희망의 주님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입니다.

이런 환경에 좌절할 게 아니라 참 자유의 원천이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바라보고 따라야 할
유일한 희망의 하늘이요 산이요 길이요 지평선이요 수평선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따를 때
우리 역시 하늘이, 하늘과 땅이 닿은 지평선이, 길이 되어 자유롭습니다.

주님을 따름도 역시 선택의 싸움입니다.
세상에 우리를 유혹하는 우상도 많고
파멸로 인도하는 화려한 거짓 길도 많기 때문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둘 곳조차 없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주님의 모습입니다.

소유에 소유되어 살 때 참 자유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거대한 성곽 같은 저택을 보면 참 마음 답답해집니다.
잠시 머물고 하느님 찾는 여정에 올라야 할 우리 삶의 여정인데
도대체 이런 집이 왜 필요한지요.

최소한도의 의식주에 만족할 때 자유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자유에의 소명이, 제자의 길이 참 엄중합니다.
초점은 죽은 이들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 자유의 나라에 있습니다.

이미 지난 죽은 이들에 대해 쏟는 에너지를 최소화하고
활짝 열려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에너지를 쏟을 때 자유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하느님과 재물을, 하느님과 세상을, 미래와 과거를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과거는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두고
현재에 충실할 때 비로소 자유인의 제자입니다.

열왕기 상권의 주인공, 엘리사 역시 엘리야의 부름에 지체 없이 대략 정리한 후
스승 엘리야를 따라 자유에의 여정에 오릅니다.

 

 

 

 

 


둘째,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갈 때 참 자유인입니다.

 

성령의 인도 따라 영적 삶을 살 때 참 자유인입니다.
그래야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반대되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온갖 장애물을 넘어 영적고공 비행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과 육은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그렇다 하여 영육 이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삶을 통해 서서히 육을 영화(靈化)할 때 참 자유인이요
육적 삶을 통해 영이 육화(肉化)할 때 육의 노예입니다.
이 또한 영과 육의 투쟁을 의미합니다.
이래서 수행생활에 영적훈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성령 따른 참된 자유인의 영적 삶인지요,
육의 욕망을 따른 육에 노예 된 육적 삶인지요.
멸망에 이르는 길은 넓고 편하다 했는데 참 쉽고도 편한 게 육적 삶입니다.

 

 

 

 

 


셋째, 사랑으로 서로 섬기며 살아갈 때 참 자유입니다.

 

자유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자기만을 위한 자유는 추하고 역겹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무엇을 향한 자유로 완성됩니다.

바로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 있는 자유요
사랑의 섬김을 통해 선사되는 자유입니다.

그러니 섬김과 자유는 함께 감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찬미의 감사의 사랑으로 섬기고 이웃을 사랑으로 섬길 때
참 자유인입니다.

하여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합니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하신 계명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영성이 있을 뿐이요,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뿐입니다.

사랑의 종이, 성령의 종이 되어 섬김의 삶을 살 때 참 자유에 참 나의 실현이지만 육의 종이, 세상의 종이 되어 현세적 이기적 삶을 살 때 자유를 잃습니다.

진정 자유로운 영성가인지는 사랑의 섬김으로 판명됩니다.
진정한 권위와 리더십도 섬김의 권위, 섬김의 리더십뿐임을 깨닫습니다.

프란치스꼬 교황님도 “새 주교 후보자는 군주가 아니라 목자여야”된다 하시며
주교는 양떼인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목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누구나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참 자유인에로의 소명으로 불림 받은 우리들입니다.

유일한 참 자유인의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항구히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 따라 영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시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며 살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주님, 당신이 저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다.”(시편16,11).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