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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관계는 행위가 아니라 실존이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02 조회수771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성 토마스 축일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복음: 요한 20,24-29







토마스의 의심



렘브란트(REBMBRANDT) 작, (1634), 목판 유화, 53 x 51cm, 모스크바 푸쉬킨 박물관



     < 관계는 행위가 아니라 실존이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학교로 발령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신학교 들어가면 가장 힘들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실 된 관계가 많이 줄어들 것 같은 것이 걱정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처음 신학교 들어갔을 때, 어떤 선배가 손가락으로 한 교수 신부님을 가리키며, “저 신부님만 조심하면 신부 될 수 있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학교 신학생들은 저를 교수로 여기고 잘못하면 자신에게 재시나 과락도 주고 신학교에서 쫓아낼 사람으로 볼 것이고, 깍듯이 예의는 차리지만 참다운 사랑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관계로부터 오는데 관계가 그렇게 위선적이면 삶이 메마를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저에게 대하든지 친 가족처럼 느끼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왠지 신학교를 군대와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자연스레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전에 군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기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요즘 널리 퍼져있는 SNS를 통해 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찾고 싶으면 어렵지 않게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시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동기이지만 군대에 일찍 들어와 나이가 저보다 어리고, 또 저는 사제가 되어 있기에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서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시간이 될 때 보자는 식으로 끊었습니다.

저는 반갑기보다는 놀랐습니다. 군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은 군대 제대하면 각자 자신의 고향으로 가서 살기에, 또 각기 가야할 길이 다르기에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습니다. 아마도 군대에서도 그렇게 그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는데 불쑥 연락이 오니 그들을 대할 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만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니, 잠깐 만났다가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 사람들과의 관계, 그 관계의 대부분은 위선으로 이루어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우라고 하면서 서로를 위해 목숨을 바칠 듯 단결하지만 내심 제대만 하면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선임에 대한 예우는 아무리 싫은 사람일지라도 내가 편해야 하니 말년 병장들이 제대를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대우해 주지만 실제로는 다시는 안 봤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후배들에게는 내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평생 못 배울 것처럼 대단한 것을 가르쳐 주는 양 모질게 교육했지만 밖에서는 마주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뭐 다시 만날 사람들 아닌데...’, 그 때는 이렇게 믿고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그러니 모든 관계가 진실 된 관계가 될 수 없었고, 그 때의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하셨을 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고 말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겉으로는 누구보다도 그분의 충실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분을 하느님보다는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자신과 함께 있다가 떠나실 분이었지 바로 부활하셔 영원히 사실 하느님은 아직은 아니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게 됩니다. 즉 관계는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상대를 어떤 사람으로 믿었느냐가 중요한 것이란 뜻입니다. 즉 성모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말을 하시지는 않았을지언정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다시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누구와 친해지기 위해 외적인 노력을 하기보다는 먼저 상대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즉 관계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 실존이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이가 어머니가 계모가 아닐까 의심하지만 그래도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고, 어떤 아이는 말썽을 부려도 어머니가 친모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둘 사이의 관계가 외적으로는 계모에게 하는 아이가 더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친 어머니임을 믿는 아이가 더 어머니와 가까운 관계란 것입니다.

 

가끔 우리도 성당에서나 직장에서, ‘어떻게 하면 그와 더 친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관계는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냐를 먼저 정립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아무리 굽실거린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쁠 수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이 맺어주셨고, 또 영원히 함께 갈 형제라는 것을 믿읍시다. 가족끼리 어떻게 하면 나의 가족에게 잘 보일까고민하며 행동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가족이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행동해도 가족으로서 받을 수 있는 사랑을 받습니다. 행동은 저절로 그 존재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먼저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을 실존적으로 대하려고 해야지 그 순간만 피해 안 받고 넘어가려는 식의 위선적인 관계는 지양해야합니다. 실존적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이고 상대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아야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될 형제들에게 우리가 한 번 스쳐갈 사람처럼 대하는 때는 없습니까? 지금 만나는 사람, 그 사람들은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할 형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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