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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03 조회수917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My Lord and my God!"
(Jn.20,28)


제1독서 에페 2,19-22
복음 요한 20,24-29

어제 신학생 한 명이 성소국 사무실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머리카락을 너무 짧게 자른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해 보이더군요. 다른 사람들도 이 신학생을 향해서 머리카락을 왜 이렇게 짧게 잘랐느냐, 너무 어색하다는 말들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학생이 휴대전화에 있는 어떤 사진을 보여주면서 억울하다는 말을 합니다.

이 신학생은 미용사에게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는 모델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모델처럼 머리카락을 잘라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시원하게 머리카락을 자른 모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지요. 사진을 잘 보니 분명히 비슷하게 이발했습니다. 그러나 왠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스타일이 신학생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이 모델과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면 자기도 멋있을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일상 안에서 이 신학생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항상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그 틀 안에만 맞추려고 합니다. 남의 모습만을 부러워하고, 그렇게만 살면 행복할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세상의 틀 안에 우리를 가두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틀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고 멋있는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축일을 지내고 있는 토마스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제자로써 능력도 많고 용기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모든 판단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의심하고 믿지 못했던 것이지요. 다른 모든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증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면서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그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틀을 벗어나 주님을 향해 그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눈으로 보고 직접 만져봐야 믿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지 않고 또 만져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혜안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틀에만 맞추는 내가 아닌, 주님의 틀에 맞추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매 순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라며 고백하면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라. 그러면 그 순간의 에너지가 모든 경계를 넘어 퍼져 나갈 것이다(코리타 켄트).


왼쪽 사진대로 컷트해 달라고 했는데, 오른쪽 모습이 되었습니다.



겉모습 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카레이서 같이 험하게 운전하시는 분들을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도 바쁜지, 물론 바쁘니까 저렇게 운전하겠지 라는 생각은 들지만 사실은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닙니다. 단지 바쁜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줄여주는 것뿐이겠지요.

며칠 전, 이렇게 운전하시다가 신호에 걸려서 어쩔 수없이 서 있는 차 옆에 저 역시 신호대기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신호도 바뀌지 않았는데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진짜로 성격이 급한 분이신가보다.’라는 생각과 함께, 어떤 분이기에 저렇게 험한 운전을 하나 싶어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주 얌전하게 생긴 어려보이는 자매님이셨습니다. 솔직히 험한 운전을 보면서 우락부락한 형제님을 떠올리고 있었거든요.

겉모습만으로는 운전습관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겉모습만으로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도 그 사람의 일부 모습만을 보고서 마치 전부인 것처럼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닌,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판단으로는 그 사람의 전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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