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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금 시대에서도 삐뚤어진 공동체 지도자들의 무엇 [없는 성체]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03 조회수342 추천수0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태오 9,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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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병자들과 예수님의 만남이 많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병자보다는 병자 주위의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지금껏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들이 밝혀주었습니다.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았다는 점을 나타내 주었던 것입니다. 개인의 믿음있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의 믿음있는 기도에도 어김없이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 사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마태오 18, 7)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 18, 19 - 20) 하셨습니다.

남을 구렁에 떨어지게 하여 죄짓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남을 구렁에서 손을 내밀어 죄에서 건져주는 사람들이 또다른 한편으로 있기도 합니다. 자신의 세속적인 조그만한 권세에 도전하였다고 해서, 쾌심한 심정으로, 남을 구렁 속으로 빠뜨리고 마는 경우를 인간사에서 겪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이러했습니다.예수님께서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이들의 고통에 민감하시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으로 그들의 고통에 결합하여 구원하였다고 해서 결국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종교 지도자들의 무지와 교만이 거기에 있습니다.돈(재물)과 연관되어진 어떤 지배 체제를 유지시키고자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규정들과 방침들 때문입니다.그들의 중심 지배체제가 무너지면 재물(돈)을 쌓을 수가 없는 까닭인 것입니다. 

재물에 대해서는 예수님 시대에서도 지금의 시대와 결코 다르지가 않았습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루카 16, 13)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 24 - 25)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게 종교 지도자들을 무지와 교만에 이르도록 합니다.재물을 가지고자 한다면 재물의 지배를 당연히 받기 마련입니다. 또한 삯꾼의 지배 구조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삯꾼의 지배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이 눈에 보이고 삯꾼이 눈에 보이기만 할 때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그분에게 있는 버려진 이들의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지는 법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버려진 이들이 겪는 악과 죄에 의한 고통과 죽음에 결합하여 인간 안에 깊이 뿌려내려진 죄악스런 배경을 없애어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종교 지도자들처럼 자신들의 규정들과 방침으로써가 아니었습니다.이를 극복해야만 하였던 '하느님에게서 온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느님 말씀의 강력한 메시지는, 그때나 오늘에나 여전히 인간의 규정들과 방침에서 극복해 낼 수 있게 하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이라는 점입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변함없이 재물과 지배 체제의 유지라는 인간의 죄악성들에 자꾸 뿌리를 내리려고만 합니다. 왜 '사랑의 뿌리'는 거스리려고만 삐뚤어 질까요.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은 '이중의 무지'에 불과합니다. 그가 아는 것은 정말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는 그 실재인 것입니다.다른 사람들과 같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게 아니라, 모른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했으니 '안다'는 것은 그게 바로 '이중의 무지'인 것뿐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하고 물으십니다.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어느 쪽이 더 쉬울까요. 율법 학자들은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하고 생각했다 합니다.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온갖 병자들이나 혹은 버려진 이들이나 또한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어쩌면 종교 지도자들과 또 세상 왕국의 지배자들 그리고 진짜 죄인들에 근거할 것입니다.우리는 이에 대하여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진실을 밝혀주는 빛들과 한편 종교의 진실을 밝혀주는 빛들이 어둠 속에서 비추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마귀들에게서 풀어주셨으며 불치의 병에서 벗어나게 하셨고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이 모든 것들은 실재이었지만 또한 표징이기도 했습니다실재와 표징 안에 담겨져 있는 본질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자기 안에,공동체 안에 사시고 있느냐 아니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자기 자신과 그리고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본질의 문제입니다그리스도는 그때 뿐만 있었고, 지금은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그리스도께서는 죽었을까요.살아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고통은 과연 없어졌을까요.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기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먼저 받아들이고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자신들이 정해 놓은 지배 체제의 규정들과 그리고  재물과 연관된 방침들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 보다도 더욱 우선시 되어지고, 그럼에 따라서 죄악에 근거한 고통과 죽음들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해 버리는 삐뚤어진 그리스도인 및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예수님의 사랑을 없애어 가고만 한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권세를 지니고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 '없는 성체' ㅡ 성체성사적인 삶 ; 성체는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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