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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월6일(토) 聖女마리아 고레티, 聖이사야 님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05 조회수421 추천수1 반대(0) 신고



7월6일(토) 음 5/28

聖女마리아 고레티, 聖이사야


 


마리아 고레티(7.6)

성인명

마리아 고레티(Mary Goretti)
축일 7월 6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890-1902년
같은이름 고레띠, 고레티, 메리, 미리암


성녀 마리아 고레티(Maria Goretti)



 




성녀 마리아 고레티(Maria Goretti)는 이탈리아 안코나(Ancona)의 코리날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는데 6남매 중의 맏이였다.
1896년 그녀의 집안은 갈리아노 교외의 콜레 지안투르코로,
그 다음에는 페리에레 디 콘카로 이사하였다.
이곳에 정착한 직후에 부친은 말라리아에 걸려 운명하니,
남은 식구들은 생계를 위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리아는 상냥하고 침착하였고 또 예의바른 아이였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기도, 순명 및 죄악에 대한 예민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12살이 되지 않은 나이였으나 꽤 성숙한 편이었다.
1902년 5월 29일 그녀는 첫 영성체를 하였으며 그해 7월 어느 날 오후,
그날도 그녀는 집안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알렉산데르란 청년이 자기 셔츠를 기워달라는 부탁을 하여,
그것을 손질하면서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이때 18세 된 알렉산데르가 올라와서 계획대로 문을 잠그고,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그녀를 끌고 침실로 가려고 하였다.
그녀는 소리치며 완강히 버티었다.
그녀가 끝까지 항거하자 그는 이성을 잃고 마리아의 가슴을 마구 찔렀다.
그녀의 몸에는 14군데의 깊은 상처가 생겼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약 24시간 후에 운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사제가 성체를 영해주면서 알렉산데르를 용서하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저 역시 그를 용서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천국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처럼 그를 천국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정결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한 것이다.
그녀는 1950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를 용서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천국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처럼
천국에서 그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결을 지키려다가 죽어가면서
그 범죄자가 회개를 위해 기도하였던

성녀 마리아 고레티 님이시여

청소년들이 주님 안에서 건전한 사랑의 꽃을 피우도록
그리고 저희들이 상대를 판단하기보다는 기도하는 영성을 갖추도록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이사야(7.6)

성인명

이사야(Isaiah)
축일 7월 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구약인물, 예언자,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8세기BC
같은이름 이사이야

예언자들과 왕
성 예레미야(Jeremias, 좌)와 성 이사야(Isaias, 중)와 성 다윗(David, 우)






"야(훼님)는 구원"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성 이사야(Isaias)
기원전 760년경 아모스라는 사라의 아들로 태어났다(이사 1,1).
이밖에 그의 가족이나 출신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문체나 언어 기법, 도시인들이 즐겨 쓰는 은유,
또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 때문에 그를 이 도성 출신으로 추론할 수 있다.
임금이 궁궐 밖으로 시찰 나갔을 때 그가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었음으로 보아(7,3), 귀족이었다는 추측이 강하게 제기된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이사야가 귀족처럼 왕궁을 수시로 드나들 수 없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또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소명 환시를 근거로
이사야가 사제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6장의 배경은 성전 안팎이 다 될 수 있다.
6장의 환시를 보기 위해서 이사야가 굳이 사제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격조 높은 문체를 구사하고 강력한 웅변력을 발휘하는 이사야가
평범한 집안 이상의 출신으로 고급 교육까지 받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사야가 임금이나 조정과 논쟁을 벌이고
그들의 종교, 정치, 사회 정책을 논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출신은 신학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Giovanni Battista Tiepolo,
The Prophet Isaiah1726-29, Fresco, 200 x 250 cmPalazzo Patriarcale, Udine



이사야에게는 아모스나 호세아처럼 ‘광야 전통’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는 이집트 탈출 등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알지만 별다르게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그가 시나이 계약과 함께 선택된 민족의 양 기둥을 이루는
다윗 계약(2사무 7장)을 강조하는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왕실과 가까운 계층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사생활은 그의 사명 수행과 관련된 사항만 몇 가지 간략히 제시된다.
그는 ‘여예언자’와 혼인하는데 두 아들에게 모두 상징적 이름을 붙인다(7,3; 8,3).
자식들의 이름까지 동원하여 자기의 메시지를 가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8,18).
이렇듯 이사야는 혼인과 가정 생활까지 통틀어
온몸으로 하느님 말씀 선포의 사명을 수행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찌야 왕이 죽던 해”(기원전 740년)에 소명을 받고(6,1)
그 뒤 세 임금의 치하에서 활동한다(1,1).

그에 대한 마지막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기원전 701년이다.
로마 순교록에는 이사야가 므나쎄 왕 시기(기원전 687-642)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여기며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예언자가 순교했다는 전통은 성서에 언급된 것이 아니며
분명히 외경에 속한다(이사야의 승천; 에녹 11,37).
이사야서의 머리글(1,1)에 따르면 이사야가 박해자 므나쎄 왕 시기에는
살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므나쎄 왕은 온갖 외국 종교 관습을 끌어들였고,
야훼 신앙을 따르는 자들을 심하게 박해하였다.
바로 이 점에 근거하여 이사야가 순교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야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루실 일이옵니다." (이사야 9:6~7)"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 (이사야 11:1~8)

구약의 완성자로서
우리 주 구세주를 예언하신
신약의 주춧돌, 성 이사야 님이시여

주님을 직관하는 영원의 복락가운데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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