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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08 조회수961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7월 8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Courage, daughter!
Your faith has saved you.
(Mt.9,22)


제1독서 창세 28,10-22ㄱ
복음 마태 9,18-26

저는 매일 아침에 운동을 합니다. 날씨만 좋다면 2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있으며, 돌아온 뒤에는 제 방에서 30분 정도의 헬스를 하고 있지요. 따라서 2시간 30분씩 매일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낮기도를 위해 성당에 들어가서 묵상을 하다가 부끄러운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운동을 위해서는 2시간 30분씩 매일 운동을 하는데,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아침기도와 묵상 1시간, 낮기도 20분, 저녁기도와 묵상 1시간, 그리고 미사 30분.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고작 2시간 30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시간도 바쁠 때에는 줄여나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 자신의 건강을 위해 쓰는 시간은 빼놓지 않으면서, 어 중요한 내 영혼의 건강을 위해 쓰는 시간을 소홀히 하는 모습에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종종 하십니다. 아직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아서 그 일들을 모두 마친 다음에 기도할 수 있을 듯이 이야기하십니다. 세상 일이 녹녹치 않아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 있다면 분명히 기도 시간을 더 늘릴 것이고 또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우선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겉으로 보이는 세상의 것들에 더 큰 믿음이 있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들을 소홀히 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만지지요.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혈루증이란 당시에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병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엄청난 손가락질을 당했을 것이고, 사람취급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병을 앓은 지가 자그마치 열두 해입니다. 그동안 병의 치료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요? 좋다는 약을 다 썼을 것이고,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이 낫지 않고 열두 해를 보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보았을 때, 의심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용하다는 의원도 나를 고치지 못했는데, 과연 저 예수라는 사람이 내 병을 치유해 줄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오히려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예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듣고, 실제로 병의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을 믿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굳게 믿는 것이 바로 구원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내 자신의 믿음을 다시금 점검하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우선시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 늘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맞게 잘 조율된 사랑을 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김선희).


지난 7월 5일 사제서품 받으신 새 신부님의 첫미사 시작 전.



등을 보는 사랑(윤준현, ‘행복한 동행’ 중에서)

오늘은 한 잡지에 기고가 된 글을 그대로 올려 봅니다. 내가 바뀌어야 편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글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비교하고 반성해 봅시다.

20대에 시작한 직장 생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상사들 비위 맞추면서 살지 않겠어!”하고 외치며 툭하면 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마지막 직장을 나올 땐, 문득 ‘한 직장을 오래 다니는 사람도 많은데 왜 난 그렇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삼십 대 후반이 된 때였다. 안정적이고 보람 있는 일을 찾아 꾸준히 일하고 싶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사회 복지사에 도전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못다 한 효도가 늘 가슴에 남아 있었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는 양로원에 취직했다. 일은 보람되었지만 비슷한 상황이 오고 말았다. 상사에게 지적당하자 불만이 쌓였다. 그날도 사표 쓸까 하는 생각에 인상을 쓰고 다녔다. 그러자 나를 아끼던 한 어르신이 조용히 불렀다. “무슨 일이기에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가?” 상사 흉을 실컷 보자 어르신이 말문을 열었다.

“남들이 지적하면 일단 받아들이게. 등의 때를 혼자 밀 수 없잖아? 우린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네. 다른 사람 눈에 비춰지는 게 진정한 내 모습이야.

” 어르신은 이어서 말했다.

“어떤 직장을 가도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절대 그곳을 바꿀 수 없네.”

그 말에, 내 의견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얕보던 습관을 발견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자 조금씩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어느새 양로원에서 일한 지 4년이 되어 간다. 지금은 어르신들의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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