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10 조회수294 추천수3 반대(0)

교우 분들 중에 이렇게 이야기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신부님 바쁘신데 환자 방문까지 하실 시간이 없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환자방문, 기도, 가정 방문은 다른 일들 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사제가 환자방문을 하고, 가정방문 기도를 하고, 집 축성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소중한 직무입니다.

차 중에 ‘제네시스’라는 이름의 차가 있습니다. 제네시스는 성서의 창세기의 영어 이름입니다. ‘태초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창세기의 명칭은 "태초에……"라는 말로 이 책이 시작하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모세의 저서로 알려져 왔으나, 문학적 내용의 분석으로 볼 때는 시대를 달리하는 여러 자료에서 편집된 것임이 명백합니다. 즉, 야훼 자료, 엘로힘 자료, 제사자료(祭司資料)의 세 가지 자료로 이루어졌으나 다만 자료의 집성에 그치지 않고, 사계의 여러 학자들이 편집하여 거기에는 통일된 의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들의 자료는 모두가 훨씬 그 이전에 있던 자료를 사용한 것입니다.

창세기는 크게 보아 2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1부는 태고사(1~11장)로서 만물의 기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 세계와 인류의 창조(1~2장), ② 죄의 기원과 낙원 추방(3장), ③ 문명의 기원과 사람의 증가(4~5장), ④ 노아의 홍수 이야기(6~9장), ⑤ 제민족과 히브리인의 기원 및 바벨탑(10∼11장)이며, 제2부는 족장사(族長史:12∼50장)입니다. ① 아브라함의 생애(12∼25:18), ② 이사악의 생애(25:19∼28:9), ③ 야곱의 생애(28:10∼36장), ④ 요셉의 생애(37∼50장)입니다. 이 책은 역사적인 기술이 아니며, 그 편집자가 의도하는 방향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인류 구세사(救世史)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며, 야곱의 가계가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12가지의 시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의 시작. <창세기1:1~30>, 인류의 시작. <창세기1:26.2:7>, 죄의 시작. <창세기3:1~7>, 죽음의 시작. <창세기2:17. 3:19>, 구원 약속의 시작. <창세기3:15>, 가정의 시작. <창세기4:1~15>, 제사의 시작. <창세기 4:3~5>, 살인의 시작. <창세기48~9>, 도시문명의 시작. <창세기4:16~24>, 국가 형성의 시작. <창세기10:1~9>, 언어 분산의 시작. <창세기 11:1~9>, 선민 역사의 시작. <창세기12:1~50:26>과 같은 것입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부르셨고, 12명의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서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아들 중에서 요셉은 예수님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예수님의 ‘패러다임’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점이 예수님과 비슷할까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라는 점입니다. 요셉은 형제인 유다에 의해 은 20에 팔렸고, 예수님은 제자 가롯 유다에 의해 은 30에 팔렸습니다. 요셉은 주인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지만 이겨냈고,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지만 이겨냈습니다. 요셉도 부당하게 고소당하였고, 예수님께서도 부당하게 고소당하였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근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은 영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을 때 용서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였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송봉모 신부님은 요셉의 이야기를 하면서 용서와 화해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요셉과 형들의 화해장면을 대하면서 기쁘기 보다는 씁쓸한 느낌이 드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요셉을 본받고 싶어서 지금까지 그의 생애를 공부해 왔는데 실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면, 요셉처럼 화해의 삶을 살아가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다.

첫째, 요셉은 깨어진 형제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창조적으로 이용했는데, 그러한 권력과 지위도 없는 나 같은 보통사람들은 어떻게 화해를 주도해 갈 수 있단 말인가? 둘째,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생각도 않고 있는데다가, 알고 있다 해도 용서를 청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나같이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어떻게 요셉처럼 화해를 주도해 간단 말인가?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한 마디 하자면, 화해는 무엇보다 관계회복이 주목적이다. 그러나 용서는 화해와 다르기 때문에 관계회복이 아니다. 어느 한 편이 일방적으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화해할 수는 없다. 화해는 쌍방향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이다.

언제까지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원망하면서 온갖 독소를 가슴에 품고 살 수는 없다. 상호간의 관계회복이 어려울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용서이다. 내 편에서 상대를 용서하고 내적 평화를 찾는 것이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용서하는 이유는 내 마음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이다.”

오늘 하루를 지내시면서, 나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용서하는 마음으로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