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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의 도가니 영화는 예고 [성욕이 아닌 고통과 죽음의 비밀]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11 조회수358 추천수0 반대(0) 신고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마태오 10,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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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게시글들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을 행동한다'는 것은 사람의 머리나 입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랑이 어렵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자기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희생적인 사랑을 저버린다면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더구나 사랑이 없는 세속에 빠지면 신앙의 힘은 잃어가기만 합니다.  세속은 육적인 감흥에 특히 좌우됩니다. 그래서 영혼의 영적인 영성에 시선을 돌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육이 영을 지배하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선택의 문제에 빠집니다. 어쩌면 간단할 수도 있습니다. 육적인 것들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보다도 수훨한 것은 없습니다. 거짓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만큼 쉬운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단지 그것을 인지하지 않는다는 자기와의 약속과 같은 것일 경우에서 입니다.  그때는 이미 자기 안에 '하느님의 눈길'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한다면 '하느님은 없다' 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그 답은 하느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육에 의해서 영이 지배를 받으면 육은 영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영이신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올바른 신자들은 '말씀'을 믿습니다.그들 역시도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말씀'은 받아들입니다.

['말씀'은 영이십니다.(요한 6, 63)] 그러므로 결코 그들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영이신 하느님(요한 4, 24)]에 대한 믿음과 과연 틀리지 않습니다.그런데도 육을 따르고 영을 따르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말씀'에 따라 사랑을 행동해야 하지만 사랑을 행동하기가 어렵고 힘들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규정들과 방침들을 더 신뢰합니다.  완전하지도 않고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규정들과 방침들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거짓 만족과 거짓 평화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여러 '거짓의 유혹'들이 하느님에게서 부터가 아니라, 자신들에게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영을 따르지않고 육을 따라' 만들어 내는 규정들과 방침들이 비록 사랑을 거스린다 하더라도 이를 중요시하도록 정합니다.

마귀들이 (더러운 영들이)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기분 나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육이 영을 지배하고 있는 실재'가 벌어집니다.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의 실재) 

인간의 규정들과 방침들을 극복하도록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인간의 법이 있다면 하느님의 법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법을 따르라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사랑이 오신 것입니다.

완전하지도 못하고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규정들과 방침들의 '육'을 극복하고 언제 어디서나 완전한 사랑의 '영'(하느님은 사랑이시다)이 사람을 평화와 생명을 결정합니다.하느님의 선물로 주신 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은 육에서가 아니고 영에서 비롯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과 같이 그들 자신들의 공동체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규정들과 방침들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간에게 참으로 보여주신 사랑을 섬기고자 하는 일에서는 멀어지기 마련입니다.그리고 결국에는 사랑을 죽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대항하는 '악이 하는 일'입니다. 불완전한 규정들과 방침들을  '말씀' 보다도 완전하다고 믿게 하고 사랑을 없애는 일입니다.인간이 하느님께 대항하고 불순종하게 하는 교만이다 할 것입니다. '사랑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인 것입니다.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돈의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이다고 해서 '돈의 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대에 재물을 갖지 말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난의 영성'에 대한 가르침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불순종하면 그때의 원로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힘으로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버려진 이들 때문에 내려진 주님의 은총입니다.버려진 이들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얻어지는 돈 또한 '주님의 돈'입니다. 주님의 힘과 주님의 돈을 거저 받았다면 한편으로 거저 주는 것이 또한 마땅합니다. 

그리스도의 힘과 돈을,  단지 '돈의 힘'으로 변질되고  '가난의 영성'에서 떨어져 나가서 주님께서 보호하시고자 하는 버려진 이들의 평화와 생명 그리고 행복에 책임을 저버린다면, 그들의 심판 날에는 모두가 '자기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속이고, 죄악을 숨긴다고 해서 감추어 지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쌓이는 크기에 따라서 결국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회개하여 고통과 죽음의 죄악을 멈추지 않으면, 친(악한) 삯꾼과 이를 용인한 제자들 모두는 그 죄값에서 자유롭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뜻입니다.'하느님의 구원의 사랑'이 작용하기도 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보다도 돈과 규정들을 숭배하는 더러운 영들의 유혹에서 회개하는 길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마태오 27, 52 - 53)]  사의 무덤은 열려 거짓된 것들을 누르고 예수님의 부활(사랑의 부활)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에 의한 평화와 생명이 존중되고 행동으로 실천될 때, 죄악은 멈추고 자기 자리를 잃어 없어 집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랑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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