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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집트로 보내시고 이집트에서 다시 이끌어 내시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11 조회수362 추천수0 반대(0) 신고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의 손이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
요셉은 자기 병거를 준비시켜, 아버지 이스라엘을 만나러 고센으로 올라갔다. 요셉은 그를 보자 목을 껴안았다. 목을 껴안은 채 한참 울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렇게 너의 얼굴을 보고 네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금요일 제1독서 말씀 / 창세기>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오 /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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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의 말씀과 오늘의 복음 말씀이신 '두 개의 하느님 말씀'을 봅니다. 만일 정확하게 읽지 않았다면 다시 보아야 합니다.무엇을 들었고 또 말하여야 하는지 일러 주시는 분은 "너희 안에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전의 글에서 "말씀은 영이시다"(요한 6, 63 참조)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은 영이시다'에서 말씀 안에는 "진리의 영"이 있으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이십니다.(요한 17, 17 참조)]  그러므로 '말씀'에 영적인 사람, 하느님의 사람은 말씀 안에서 - '진리의 영(성령)'을 통하여 '말씀이신 진리'를 보고 말하게 됩니다.이는 사람의 머리에서 결코 지어내지 못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십니다. 

[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8, 31 - 32)  /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 13 참조) ] 하셨습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지어내지 못한다 함은 '진리의 영'께서는 <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말씀'을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 한다는 글에 '영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이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말씀 안에서, 말씀의 영을 통하여, 말씀만을, 이야기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말씀 밖의 말'은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따라서 언제나
말씀은 말씀으로 현상을 (인간과 삶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누가 어떤 상태인 것인가 하는 점에 있습니다. 이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서 영적으로(성령적으로) 들을 수가 (볼 수가) 있습니다. 곧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8, 31 - 32) 입니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아버지의 말씀) 안에 머무르면'입니다.머무른다는 것은 진리을 따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말씀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이것이 예수님의 말 안에 머무름인 것입니다.말씀 안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은 명백하게 사랑 안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진리이시며 그 진리가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너희가 말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면서 <진리 안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하지만 다음과 같은 '속이는 영'들도 있기 마련입니다.즉 사랑을 요구하면서도 자기 및 공동체 그 자신은 사랑을 저버리는 속이는 유혹이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속이는 유혹'들은 태초에 인간에게 '거짓말'을 한 존재였기도 합니다. 

사랑을 요구하면서도 악을 자행하는 불의한 자들입니다. 그 자신 및 공동체가 악을 행하면서도 동시에 악행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사랑을 요구합니다.그러면서 지속적으로 악행의 죄행을 멈추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게 아니고 이용하려는 술수가 몸에 배어있는 것들입니다. < 속이기 위해서 거짓말하는 유혹 >이 있다는 설명을 말합니다. 

회개를 하면 하느님께서 용서를 하십니다. 인간의 용서 보다도 앞서 있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용서를 요구하며 악행을 계속하려는 유혹은 하느님의 자비를 모욕하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이리 떼들인 것입니다. 

이집트로 들여 보내시고 다시 이집트에서 건져 내시려는 하느님의 말씀을 보게 됩니다.굶주림을 피해서 재물(돈)의 부유가 된 이집트로 들여 보내시지만, 버려진 이들을 (하느님의 백성을) 학대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이집트에서 그들을 다시 이끌어 내십니다.이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보는 것입니다.그러나 '유혹자'는 이와 다르게 봅니다

사랑의 자기 자신과 사랑의 공동체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을 보지 않고 세속에 갇혀 세속적으로 판단하면서 버려진 길 잃은 어린양들과 양들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이리 떼들(거친 삯꾼과 가짜 제자들)이 잡아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 냅니다. 이같은 거짓된 것들이 실재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이르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하셨습니다. 이집트의 부유한 물질에 따른, 죄악에 물들어 세속적인 판단에 빠지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진리)에 지혜로우며 사랑에 머무를 수 있는 마음으로 순박하라는 명령이신 것입니다.

버려진 이들을 굶주림에서 구제하기 위해서 이집트에 들여 보냈지만 이집트에서는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으로 버려진 이들이 거친 삯꾼들과 가짜 제자들에 의해서 끊임없는 학대를 당하자, '하느님의 사람'을 (사랑을 지닌 자를) 이집트로 보내시어 그들을 이집트의 죄악상에서 다시 이끌어 내시어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구제의 사랑이 아닌, 구원의 사랑입니다.악에서 해방시키시고 죄에서 해방시키고자 하시는 구원의 사랑입니다. 유혹자들은 이 구원의 사랑을 행동하지 못합니다.  세속의 재물에 빠져서 버려진 양들이 겪고 있는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을 올바로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이미 믿음에 순박하지 않고 말씀에는 지혜롭지 않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사랑을 미워하는 사람들 가운데로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지닌 하느님의 사람'을 보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거기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죄악상(죄악스런 배경)은 사랑을 미워하게 하였고 사랑을 없애어 버리도록 타락되었습니다.  

이런 곳에는 반드시 '사랑을 속이는' 사랑에 반대되는 거짓말들을 잘하는 유혹자들이 당연히 있기 마련입니다. 버려진 이들의 사랑에 의한 평화와 기쁨과 생명과 행복을 위해서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이 필요합니다.그들의 사랑의 힘이 마귀들의 차원을 쫓아내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성인)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일꾼이며,  세속의 삯꾼이 아님을 알고 자신들을 하느님께 봉헌한 자로서의 마음과 행동으로써 구원의 사랑을 힘들고 고생된다고 하여도 용기있게 행동하여야만 합니다.  그것은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어 지는 피흘림 없는 백색 순교의 자기 십자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 의지 없이, 하느님께만 오로지 넘겨 버리는 것은 '진정한 겸손'이 될 수 없고 겉과 속이 다른 교만한 위선자가 되어 집니다. <교리서 2001.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신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원의(願意)를 일으키심으로써 일을 시작하시며, 우리의 의지에 협력하심으로써 일을 완성하십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서 인간의 노력을 회피하는 것은 하느님께 향한 올바른 기도와 활동의 통일이 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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