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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원한 생명의 길 - 2013.7.14 연중 제1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14 조회수434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3.7.14 연중 제15주일 신명30,10-14 콜로1,15-20 루카10,25-37

 

 

 


영원한 생명의 길

 

-찾음, 배움, 행함-

 

 


찾을 때, 물을 때 사람입니다.

의미를 찾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을 때 찾고 묻습니다.
죽어있으면 찾지도, 묻지도 않습니다.

부단히 찾고, 물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왜 사느냐?’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나는 무엇인가?’ 등
찾고 물어야 답도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교사의 물음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누구나의 내면 깊이에 잠재해 있는 근본적 물음입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전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사막 수도자들의 공통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루카10.25절에서 율법교사와 똑같은 질문을
루카18.18절에서는 어떤 권력가가 합니다.

많은 학식을, 많은 재물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원히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시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찾아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영원한 생명의 길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을 찾아 만나야 합니다.

‘없는 자들아, 주님을 찾으라. 너희 마음은 살리라.’

방금 화답송 후렴 역시 주님을 찾을 것을 촉구합니다.

주님을 찾아 구도자(求道者)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교사는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습니다만
제대로 주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 질문이지만 그의 영적갈망의 표현입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세상에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묻고 답을 확인해야 할 질문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인 주님을 찾아 만날 때 비로소 충만한 삶입니다.

답인 주님을 찾아 만나지 못하여 허무하고 무의미한 삶입니다.

 

이런 물음은 그대로 회개의 발단이 됩니다.
주님을 찾아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 바로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궁극적인 질문을 가슴에 품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둘째, 주님께 배우십시오.

 

주님께 배워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 배워 깨달아 학인(學人)입니다.

주님은 누구입니까?

매주 수요일 저녁기도 때 마다 바치는 2독서 콜로사이 찬가가
주 예수님의 심오한 정체를 잘 보여줍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고,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며,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이런 우주만물과 역사의 시작이며 마침이신 우주적인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라니 참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시며
그분을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화해시키셨습니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스승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을 찾는 우리들에게
주님 친히 바오로 사도를 통해 베풀어주시는 가르침이 놀랍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아주 실제적입니다.

직답하지 않고
율법학자에게 되물어 그의 답변을 통해서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바로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하였습니다.”

 

머리로만 알고 행하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사랑을 실행할 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율법학자가 이대로 행했더라면 결코 이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 쉽고도 가까이 있는 답입니다.
진리는, 구원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은 모세를 통해 명쾌하게 가르쳐 줍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몰라서 못사는 게 아니라 알아도 실행하지 않아 못삽니다.

우상은 환상을 먹고 자랍니다.

바로 주님을 만나 사랑을 배워 실행할 때 환상에서 벗어나 실재를 삽니다.
주님께 배우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환상 속에 우상을 섬기며 삽니다.

새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셋째, 사랑을 행하십시오.

 

주님께 배운 사랑을 실행하여 수행자(修行者)입니다.
주 예수님이 수행자의 모범입니다.

막연한 수행자가가 아니라 사랑의 수행자, 환대의 수행자입니다.

 

복음 중 다음 두 말마디에 주님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랑의 이중계명을, 구체적으로 사마리아인처럼 곤궁 중에 있는 이들에게
환대의 사랑을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심오합니다.

이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마리아인 같은 사랑의 수행자 되어 살게 합니다.
종파를 불문하고 곤궁 중에 있는 이들을 살려 내는 사마리아인이 상징하는바
바로 예수님입니다.

세상 곳곳에서 곤궁 중에 있는 이들에 사랑을 실행하는 사마리아인 같은 이들
모두가 살아있는 예수님입니다.

 

사마리아인 비유 중 사제와 레위인 같은 종교인들은 많아도
사마리아인 같은 종교인들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사마리아인 뿐 아니라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이 역시
수난 중인 주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들을 돕는 것이 바로 곤궁 중에 있는 예수님을 돕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곤궁 중에 있는 이들을 돕는 것이 예수님을 돕는 것임은
이미 최후심판 이야기에도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얼마 전, 천주의 성 요한 의료수도회 수사님들의 피정지도 차
피정 집에 도착했을 때 피정 집 벽면에 글씨와 그림이 생각납니다.

환대의 영성을 표방하는 수도회답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오늘 복음 구절과 더불어
초주검이 된 이를 환대하여 치유하는 사마리아인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대로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어 곤궁 중에 이웃을 환대로 섬기며
치유하는 수사님들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연중 제15주일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우리 모두에게 알려주십니다.

 

‘찾아라.’ 늘 주님을 찾는 구도자(求道者) 되어 살 때,

 

‘배워라.’ 늘 주님의 사랑을 배우는 학인(學人)이 되어 살 때,

 

‘행하라.’ 늘 곤궁 중에 있는 이웃에게 사랑을 행하는 수행자(修行者) 되어 살 때,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
평소 당신 사랑의 구도자와 학인, 수행자로 살아 온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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