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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화방송/ 성서백주간 제1회 탈출기 개관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16 조회수591 추천수3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방송 성서백주간 최승정 신부님의  탈출기 개관

 

안녕하십니까?  성서백주간 두  번째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하자면 시즌 2가 시작을 합니다.

시즌 2를 시작을 하면서 저희들이 1년 동안에 창세기 1권을 했잖아요.

1년 동안에 창세기를 했어요. 그래서 요번에는 어떻게 할까?

똑같은 방식으로 할까? 이러다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어요.

 

여러분들 혹시 슬로우시티 운동이라는 거 아십니까?

1999년인가 '그레베 엔 키안티'라는 이태리 마을에서 시작한 운동이예요.

그런데 그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냐하면 1986년에 로마에 맥도날드 매장이 생겨요.

그런데 맥도날드라던지 이런 것들은 우리가 통틀어서 패스트 푸드라고 하잖아요.

빨리빨리 해서 빨리빨리 먹는다. 그런 뜻인 모양이죠?

 

그 맥도날드 매장이 생기면서 이태리에서 어떤 운동이 생기느냐하면,

그렇다면 우리는 슬로우 푸드 운동을 하겠다라는 그런 겁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김치를 담근다고 그러면,

배추를 사다가 절이고, 물을 빼고, 그 다음에 양념을 해서 이렇게 해서 익히고,

그 다음에 먹는데까지 시간이 걸리잖아요. 또 밥을 한다고 그러면, 밥솥에다 쌀을

씻어가지고 쌀을 안치고 그러잖아요.  요즘은 밥솥이 해 줍니다만 옛날 같으면

또 뜸을 들이고 뭐 그런 시간들이 걸리잖아요.  그런 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살아 가는데.

 

그래서 모든 것을 빨리빨리만 한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그레베 엔 키안티라는 그 도시의 시장이 그런 철학을 가지고 시민들을

설득을 해 나가요. 따라서 그 도시의 중앙 시가지 안에서는 예를들어 우리로

따지자면 사대문 안에서는 불가피한 일이 있지 않는 한은 걷자.

도심지 안에서는 걷자.

 

아니면은 도심지를 들어 올 때는 차를 갖고 오지 말고 뭐 그런 대중교통을 이용하자.

그 다음에 천천히 살자. 뭐 아니면은 낮에는, 이태리 사람들의 습성이기도 합니다만,

낮에는 상점 문을 닫고 한 시간 쉬자. 옆집도 안 열고 나도 안 열면은 경쟁할 필요

없으니까 우리 그냥 암묵적으로 쉬도록 하자.

 

그래서 뭐 2시부터 3시까지는 모든 사람이 좀 쉬는 시간을 갖자. 뭐 그런 식으로 그

슬로우시티 운동을 만들어 나갑니다. 천천히 살자. 그 다음에 되되록이면 가게 같은

여는 거 경쟁하지 말고 저녁 6시면은 다 문을 닫자.  저녁 때는 집에 일찍 들어가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전체적으로 갖도록 하자. 뭐 이런 식의 운동입니다.

 

그런데 이 슬로우시티 운동이 이 시장이 사람들을 얼마나 설득을 했는지 정말

괜찮은 지도자를 뽑은 거지요. 그게 잘 자리잡고 옆에 도시로도 퍼져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서 요즘 미국에서 그런 운동이 있지만 더 발달되는 게 유럽이니까

이태리라든지 블란서라든지 독일에서는 이 슬로우시티 운동이 굉장히 여러

도시에서 시도되고 있고 또 다른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어요.

 

예를들어 슬로우 푸드 운동과 관계된 로칼 푸드 운동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건 뭐냐하면, 그 지역에 나와 있는 생산되는 재료를 가지고 우리가 음식을

만들고 되도록이면 그렇게 하자. 멀리서 수입하다보면 어떻게 되겠어요?

 

예를들어 소고기가 미국이나 유럽이나 오스트레일리아나 이런데서 우리 나라에

온다면? 신선도가 떨어지고 더 중요한 문제는 뭔가하면 뭔가가 그것을 운송하잖아요.

그것은 우리 환경을 위해서 좋은 일일까요, 나쁜 일일까요? 나쁜 일입니다.

 

우리 환경을 조금은 보호하는 입장에서 그거는 운송 수단을 하지 않고 되도록이면

그 지역에서 우리 식으로 좀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 텃밭에서 나는 걸로 우리

식탁을 꾸미도록 하자. 뭐 물까지 수입해서 먹지 말고 물은 우리 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자.  아니면 옷 같은 거를 만들어도 너무 합성수지라든지 아니면

모피라든지 이런 거 입지 말고 몇년 입고 그 다음에 버리면은 자연스럽게 썩는 것

입자.

 

요즘은 양말도 구멍이 안 나요. 참 이상하게 옛날 저 초등학교 때는 실과 시간에

전구 넣고 양말 기우는 법, 그랬던 기억이 있는데 요즘은 양말에 구멍이 안 나요.

또 구멍도 안나고 오래오래 그것이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들은 결국에 환경을

위해서 좋은 일은 아니겠드라.  뭐 그런 식의 어떤 생각입니다. 그래서 전국에

지금 이런 슬로우시티 운동을 하는 도시가 몇개나 있냐하면 전세계 25개국에

151개 도시가 있습니다. 놀라운 건 우리나라에 10개가 있어요.

 

※ 슬로우시티(Slowcity)

1999년 10월 이탈리아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ti)의 파올로 사투르 니니

전 시장을 비롯해 몇몇 시장들이 모여 위협받는 달콤한 인생의 미래를 염려하여

치타슬로우(cittaslow) 즉 슬로우시티 운동을 출범시켰다. 2012년 현재 전세계에서

25개국 150여개 도시 우리나라에서는 10여개 시군이 참여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전남의 4개지역인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 마을, 장흥군 유치면,

완도근 청산도, 신안군 증도와 경남 하동군 악양면(차 지배지로서 최초), 충남 예산군

대흥면, 전주 한옥 마을, 남양주시 조안면, 청송군 파천면, 상주시 이암면 등 10곳이

슬로우시티로 지정되어 있다.

 

예, 그런 도시에서 실지로 슬로우시티를 하겠다고 했지마는 글쎄요

제일 중요한 건 실천 이전에 그 지역 공동체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는 겁니다.

아, 이렇게 살아야 되는구나! 어떤 사람이 그럴 수 있잖아요.

"어, 싫어요. 나는 밤 10시까지 장사할래." 뭐 이럴 수 있잖아요.

"아, 싫어, 난 자동차 타고 시내 다닐래. 내가 세금내고 내 맘이지."

이럴 수 있잖아요. 그러면 몇몇만 그렇게 하면 그 운동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높이는 거. 이게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한 거 같애요.

 

제가 대학생 시절에 저만 같애도 버스를 타고 사람이 없으면은 담배를 폈어요.

그 텅빈 버스에 나랑 뭐 한 두 사람 있다. 그러면 담배 당연히 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말 암만 험악한 인생을 사는 사람도 버스를 타고 담배 핍니까?

안 핍니다. 그게 상식이 돼 버렸잖아요. 우리 의식 수준이 높아진 겁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공공 장소에서 담배를 피면 벌금을 물리고 그랬지마는 요새는

단속을 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우리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의식을 높이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일인 거 같애요.

 

예, 그래서 이 슬로우시티 운동의 일환으로 저희도 슬로우 성서 공부를 해서 굉장히

천천히 할 겁니다. 제가 그래서 계산을 해 보니까 요번에 한 학기 동안에 아마

탈출기 5장이나 6장 정도 읽지 않을까? ^^* 아주 천천히 갈 겁니다. 우리가 천천히

나가다가 뭐 하느님 나라 갈 때까지 구약을 다 못 읽고 가면은 어떻습니까?

중요한 거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건대 우리는 뭐든지 자꾸 속성으로

할려는 거 같애요.

 

우리 성서 백주간 입니다. 그러면 아, 그거 너무 길고 지루해요. 그쵸?

그리고 뭐든지 빨리빨리 끝내려는 속성반, 두달만에 뭐뭐 완성, 뭐 이런 식의.

저희는 그런 거 추구하지 않고 한 줄을 읽고서 하루 종일 묵상하는 좀 다른 방향으로

세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교회가 갔으면 좋겠고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백주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따라서 성서백주간이 이름이 내년 쯤이면 성서 천주간이나

만주간으로 이름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  따라서 신부님, 저는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거 못합니다." 하시는 분은 어쩔 수 없지요. 뭐

설롱탕집 오셔 가지고 비빕밥 달라고 하시면 안 되고 저희는 천천히 나갈 겁니다.

 

예, 그런 의미에서 먼저 시작하면서 일단은 전체적인 책에 대한 안목을 가져야 될

것 같아서 제가 한 한달쯤 전에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탈출기 개관이라는

유인물 하나를 마련했습니다. 제가 한번 읽으면서 설명의 말씀을 드릴테니까

눈으로 한번 따라 읽으시면 좋을 거 같애요.

 

탈출기는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여겨진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구약 성경이 '구약(舊約)'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탈출기가 전하는 내용이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 구약성경이 구약인 이유는 시나이 계약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ㅡ 탈출기는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건인 출애굽

    (이집트 탈출)의 역사와  시나이 계약에 대해 전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은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원체험(Urerfahrung)인 동시에 이스라엘과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원계시(啓示)이기도 하기에 탈출기는 (단지 한 민족의

역사라는 제한적 틀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구원역사라는 보다 보편적 지평 위에서

읽혀져야 한다.

 

이스라엘의 원체험인 동시에 하느님의 원계시; 가장 출발점이다. 이겁니다.

예를들어 어떤 영화에서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걸 보면서 그 남자와

여자가 우리들에게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안에서 전해주고 있는 겁니다.

 

예, 따라서 그렇게 하느님의 탈출기는 하느님의 그런 한 민족의 역사라는 제한적

틀을 뛰어넘는 그런 하느님의 구원 역사라는 보편적 지평 위에서 읽어져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이런 틀에서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항상 좋은 틀에서 생각을 하는데 예를들어, 어느 일본의 과학자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어요. 그럼 "일본 사람이 받았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조금 넓은 틀로 "아시아 사람이 받았어."라고 얘기할 수도 있죠?

우리 아시아 사람이 이렇게 받았어. 이번 올림픽에서는 우리 아시아에 있는 나라가

3위랑 4위를 했어. 뭐 그렇게 우리가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따라서 이거는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이 쓰여질 때는 그 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신이 갖고 있는 하느님의 신앙 안에서 반성한 그와 같은 작품을 쓴 거지만

오늘날 탈출기에 대한 평가는 어떤 겁니까? 인류가 하느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따라서 탈출기의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로서 탈출기를 읽어야 하나? 많은 분들이 이런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그런 불만을 이야기하시잖아요. 저한테 와서도 그런 말씀 많이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이거 이스라엘 역사 아닙니까? 다른 민족 역사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입니다. 인류가 하느님을 어떻게 만났게 되었나?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셨나?

 

꼭 박태환과 김연아만 문제가 아니라 박태환이 금메달 따고 김연아가 금메달 따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림픽에서 좋은 기록이 나올 때마다. "아, 인간이 저렇게

빨리 뛰게 되었구나!" "아,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니까 저렇게 빨리 헤엄치게 되고,

저렇게 아름답게 스케이팅 하게 되었구나!" 이런 시선으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겁니다.

 

예, 단지 이스라엘 역사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로서 인류가 하느님을 어떤 자신의

역사 안에서 어떤 역사의 과정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느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나? 이거를 조금 더 폼나는 신학적인 얘기로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였나?

 

영어에서는 Revelation 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이 측면에서 탈출기를 읽어보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탈출기를 구분하는 방법은 탈출기 연구가 100명이

있으면은 100명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저도 저 나름대로의 길을 갑니다.

첫번째 대목은 탈출기 1,1-6,27 제목은 부르심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 탈출기는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여겨진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구약성경이 "구약(舊約)"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탈출기가 전하는 내용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출기는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건인 출애급(이집트 탈출)의 역사와 시나이 계약에 대해

전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은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원체험(Urerfahrung)인

동시에 이스라엘과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원계시 (Uroffenbarung)이기도 하기에,

탈출기는 (단지 한 민족의 역사라는 제한적 틀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구원역사라는

보다 보편적 지평 위에서 읽혀져야 한다.

문학적 관점에서 탈출기를 읽는다면 크게 여섯 부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 부르심 (1,1-6,27)

탈출 1,1-6,27을 시작하며 저자는 우선 창세기 후반부에서 파라오의 환대와 함께

이집트로 이주해 온 야곱과 그 아들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비참한 억압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환경에서 모세가 탄생하여 왜

미디안으로 도망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하느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오게 되었는지를 서술한다. 그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와 아론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파라오에게 가서 하느님의 명령을 전하지만

파라오는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억압을 가중시킴으로써 그를 무시한다.
 

 

ㅡ 두 번째 단락은 탈출/ 해방이라고 이름을 붙인 6,28ㅡ 13,16 까지의 내용입니다.

 

2. 탈출/ 해방(6,28ㅡ13,16)

탈출 6,28-13,16, 하느님은 새로이 모세와 아론을 파라오에게 보낸다.

그리고 파라오에게 여러가지 표징과 기적들을 보여주지만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내보내는 것을 거부한다. 

 

여기서 표징과 기적이라고 얘기하는 건 뭡니까? 재앙입니다. 여러분들 탈출기

공부 다 하셨으니까 어떤 재앙이 생각 납니까? 결국 맏아들과 맏배의 죽음을 겪고

나서야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나가게 합니다.

 

탈출기 저자는 이 부분에서 단지 사건 자체를 보도할 뿐만 아니라 그를 이스라엘의

축제와 제의적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파스카 축제, 누룩 없는 빵의 축제,

그와 같은 축제들과 나중에 저희가 텍스트를 자세히 보게 되겠습니다만 그와 같은

축제들과 그런 사건들을 연결시키는 그와 같은.

 

오늘날 우리들은 에수님의 사건을 어디에서 가장 잘 기억합니까?

미사에서 기억하잖아요. 그런 미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기억하듯이 이스라엘도

그런 축제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미사의 의미도 그런 의미에서는 바로

이런 축제의 의미입니다.

 

축제를 통해서 그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사건을 어떻게 기념하는지 이제 탈출기

두 번째 맥락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은 여러분들과 함께 텍스트를 읽으면서 설명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광야의 이스라엘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장소적인 면에서 이집트를

떠난 겁니다. 광야로 나왔지요?

 

3. 광야의 이스라엘(13,17ㅡ 18,27)

탈출 13,17ㅡ18,27.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나 광야로 나선다. 하지만 마음이 달라진

파라오가 그들을 쫓아오자 하느님은 마른 땅을 만들어 이스라엘은 바다를 건너도록

하고, 이집트인들은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다. 이 놀라운 사건은 모세의 노래와

미르얌을 노래를 통해 기억된다. 광야로 나선 이스라엘은 일단 파라오로부터

벗어나지만, 물과 식량이 부족하여 위기를 맞이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의 위기를 맞습니다. 참 웃겨요.

갈대 바다를 건널 때는 물이 너무 많은 게 문젭니까, 물이 적은 게 문젭니까?

물이 너무 많은 게 문제예요. 그런데 광야로 일단 나가니까 물이 너무 적은 게

문제입니다. 따라서 물은 어떻게 있어야 됩니까? 적당히 있어야 됩니다.

 

예,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같이 주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을 구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나 이야기, 메추라기 이야기, 마싸와

므리바 이야기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의 머리 안에 스쳐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전투도 한 번 일어납니다. 광야에서 아말렉족과 전투가 일어나는데 모세가

지팡이를 든 팔을 들면 이기고 내리면 지니까 사람들이 그 팔을 받치고 있는.

그러면서 여기에서 계속되는 이야기는 뭡니까? 갈대 바다에서도 하느님이 구해

주셨고, 광야로 나와서 먹을 것, 마실 것이 없을 때에도 하느님이 구해 주셨고,

그리고 아말렉에서의 전쟁에서도 하느님이 구해 주셨다.  이스라엘을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반대로 갈대 바다를 건너기 직전에 아니면 마라에서 쓴물이었을 때, 아니면 먹을

것이 부족했을 때, 아니면 마싸와 므리바에서 물이 없을 때, 아말렉족과의 전쟁에

부딪쳤을 때 이스라엘은 항상 어떻게 합니까?

 

그거를 잘 받아들이고 기도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합니까? 아니면은 불평합니까?

불평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 잘 보십시오. 두 번째 탈출과 해방의 대목에서는

야훼 하느님과 파라오가 갈등을 벌이지만 이제 광야로 나오면서는 그 갈등이

천천히 파라오와 야훼 하느님과의 갈등에서 이제부터는 이스라엘과 야훼 하느님의

갈등으로 전환됩니다.

 

그 남자와 그 여자가 맨 처음에 좋아 했을 때는 뭐 부모님이 반대하고 두 사람의

사랑을 시기하는 누군가가 반대하고 어려웠지만, 그 일막이 지나가면은 그래서

결혼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갈등은 그 남자와 그 여자의 갈등인 겁니다.

이제 이스라엘과 야훼 하느님의 그런 갈등인 겁니다.

 

예, 그리고 마지막, 그와 같은 갈등을 마무리 하면서 조금은 전체적인 흐름과는

관계가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역사를 적을 때 항상 마지막 부분에는 부록같은

이야기를 남겨 놓습니다. 후기, 부록 뭐 이런 의미로, 그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의

장인 이트로가 모세를 찾아오고 장인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모세가 자기를 대신해서

작은 일들을 다룰 재판관을 세운다는 약간은 제도적인 그와 같은 이야기를 세 번째

부분이 마무리가 됩니다.

 

그리고 네 번째 부분, 어떻게 보면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19,1ㅡ24,11. 이제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그 대목에서 이스라엘은 드디어 시나이 산에 도착합니다.

 

4. 시나이 계약(19,1ㅡ24,11)

탈출 19,1ㅡ24,11에서 이스라엘은 드디어 시나이 산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계약체결을 준비시키고, 십계명과 함께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계약의 규정들을 전한다.

 

이스라엘은 그 규정들을 받아들이고 계약이 체결된다. 무지하게 단순한 내용인데

읽어보면 힘듭니다. 왜냐? 그들이 지켜야될 계약의 내용이 법전의 형태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말 성경에도 보면 탈출기 20장 22절에 제목이 뭐라고 되어

있느냐하면, '계약의 책'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리고 이때부터 성경을 함께 읽어 가는 사람들에게는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왜냐? 여러분들 중에 집에서 혼자 6법전서 읽는 분 있습니까? 오늘 심심하다.

오늘은 법전이나 읽어볼까? 이런 분들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럼 누가 읽습니까?

뭐 사법고시 준비하는 법관들이 읽는거지. 우리는 읽어도 그 용어도 그렇고 너무나

생소하고 법전을 취미로 읽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 같애요.

 

여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는데 법전의 내용인

거고 더군다나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 법전을

읽는 것이 중요해요. 법을 알아야지 법을 어기지 않을 수 있으니까. 법을 알아야지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구약에 있는 법전의 내용들을 정말 법 규정으로서 받아

들이고 그것을 지킵니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정신만 지킵니다.

여기에 있는 분들 다 돼지고기 드시잖아요. 뭐 선지국들 드시잖아요.

구약성경에 돼기고기 아니면 소의 피 뭐 이런 거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이 규정

엄격하게 지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자신들이 가는 푸주간이 따로 있습니다.

그럼 푸주간에서는 어떻게 하나? 우리는 그냥 소를 잡아서 고기를 썰어서

사람들에게 팝니다만. 그래서 고기 집에 가면 잘 익혀서 드릴까요? 아니면 반쯤

익혀 드릴까요? 이렇게 해서 고기를 먹습니다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먹지 않습니다.

 

소를 잡으면 거꾸로 매달아서 몸에 있는 피를 다 뺍니다. 그래도 뭐 엄격하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피 성분이 남아 있겠지만, 하지만 자신들이 지킬 수 있는

한할 수 있는 한 모든 피를 다 제거하고 먹습니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데에 가서

보면 유대인들 전용 푸주간들이 따로 있습니다. 그들만을 위해서 준비된.

 

음식 규정도 요즘 유대인들 가운데에서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들은 엄격하게

지키고 안식일 규정도 지킵니다. 우리가 만약 구약의 율법을 따른다면 안식일은

지켜아 되죠? 안식일은 무슨 요일이죠? 토요일입니다. 토요일 안 지키기잖아요.

우리는 대신에 주일을 지킵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주일 안 지키죠. 주일 미사만

오는 거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아무튼 그와 같은 계약의 내용들인 겁니다. 읽어보면 오늘날이랑 상관 없는

노예에 관한 그와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고, 또 우리가 생각하기에 상식으로

좀 이해하기 어려운 . 따라서 굉장히 읽으면 지루한 그와 같은 내용들입니다.

따라서 많은 분들이 이 부분에서 포기하시는 거 같애요.

 

이 부분에 관해서는 나중에 그 대목에 가면 아,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종교적인 의미는 무엇인가?왜 그런 규정들이 생기게 되었나? 뭐 이런 것에 대해서

조금은 여러분들이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는 몇 가지의 어떤 도움의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섯 번째 내용은 증언판이라는 주제입니다.

 

증언판(24,12ㅡ32,35)

그래서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증언판을 갖고 내려 오는데 어떻게 되죠?

금송아지 만들어 놓고 춤추고 있었다. 그래서 증언판이 깨지는. 따라서 전체적인

테마는 시나이 계약에서는 정작 증언판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24,12 이하부터 갑자기 증언판이 하나의 문학적인 모티브로 등장하게 됩니다.

 

5. 증언판(24,12ㅡ 32,35)

탈출 24,12ㅡ 32,35에서 모세는 시나이 산에 올라 40일을 지낸다. 그곳에서 모세는

앞선 규정들과는 차이가 나는 제의적 규정들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모세는 하느님이 새겨준 증언판을 들고 산을 내려 오지만 금송아지를 보고 돌판을

깨버린다. 레위인들은 모세를 도와 죄지은 백성을 죽이고 모세는 하느님의 용서를

청한다.

 

자, 여러분들 여기서 잘 보셔야 합니다. 어는 지파가 갑자기 등장을 합니까?

레위지파가가 등장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지파압니다. 레위 지파는 누구의

지파이기도 합니까? 모세와 아론이 속한 지파이기도 합니다.

 

예, 그래서 다섯 번째 대목은 증언판이라는 그런 테마가 아주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대목에서도 굉장히 많은 법 규정들이 나오는데

시니아 계약과는 조금 달라요. 내용상에 . 시나이 계약은 사회적인 규정들이 많이

있다면, 시나이계약 안에서는 그 공동체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규정들이 많이 있다면, 이 증언판과 관계된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증언판을 받는 과정 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들은 여러가지 내용들은 주로 종교적인

내지는 제의적인 내지는 제의적인 내지는 성막과 관련된 그와 같은 규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섯번째 대목 성막(33,1ㅡ40,38)

33장 1절 이하에서 이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출발을 명령합니다. 이제 떠나라.

그러면서 여러분들 기억하시죠. 떠나긴 하는데 니들 혼자가라. 나는 안 간다.

그러니까 모세가 나중에 당신이 안 가시면 무슨 의미입니까? 당신이 꼭 가셔야 

됩니다. 하느님을 설득하고 하느님이 가야 되는데 하느님이 이제부터는 옮겨가야

되니까 뭐가 필요한 겁니까? 성막이 필요한 겁니다.

 

이렇게 얘기 하면 좀 불경스러운건데, 하느님이 그전까지는 시나이라는 곳에

고정돼 있는 그곳에 거처가 있는 하느님이 이제부터는 포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동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이동하다가 하느님이 어디에 자리잡고 다시 정주하게

되는 겁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거쳐서

예루살렘 성전에 정주하게 되는 따라서 성막은 이제부터 이동하는 시나이 산입니다.

 

6. 성막(33,1ㅡ40,38)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출발을 명령한다. 모세는 시나이 산으로 올라가 다시

계약을 맺고는 두 증언판과 함께 내려온다. 그리고 모세는 하느님과  함께 여정을

떠나기 위해 성막과 그에 따른 성물들을 만든다. 그리고 그 모든 제작이 완성되자

모세는 그것을 축복하고 하느님께 봉헌한다.

 

모세는 시나이 산으로 올라가 다시 계약을 맺고 40일 동안 단식을 하게 됩니다.

합이 80일입니다. 두 증언판과 함께 이제 내려 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느님과

함께 여정을 떠나기 위해 성막과 그에 따른 성물들을 만듭니다. 모든 제작이

완성되자 모세는 그것들을 축복하고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출발을

명령하시는데 정작 이스라엘은 언제 길을 떠날까요? 이렇게 성막을 만들고 다른

규정들이 레위기 전체를 채웁니다. 이때 아직 안 떠나요.   민수기 전반부도 그런

규정들입니다. 민수기 10장 11절이 되면 그때서야 떠나요. 

 

명령하고 민수기 10장 11절까지는 다른 얘기 한참 하다가 10장 11절이 되고

나서부터 그때 시나이 산을 떠나서 새로 광야의 여정을 시작하는 따라서 탈출기는

이미 슬로우시티 운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천천히... 떠나라... 그러니까 그냥 뭐

책 한권을 그냥 건너뛰고 그 다음에야 천천히 떠나고 나중에 예루살렘까지도 그

가나안 땅까지도 빨리 갑니까? 천천히 갑니까? 40년을 갑니다. 아주 천천히...

 

예, 전체적인 줄거리를 마무리해 보지요.

탈출기의 전체적인 줄거리와 흐름은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개개의 텍스트를

접하는 순간 탈출기가 그리 편안하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안에는 굉장히 다양한 신관들이 숨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삶을 살아오면서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자꾸 바뀌지요?

처음에는 아, 하느님은 이런 분으로 생각했다가 그것이 자꾸 변화합니다.

아, 그렇지 않구나. 그렇지 않구나. 그러면서 제가 자주 쓰는 표현은, 하느님에

대한 체험들이 성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또는 풍요로워지기 시작을 합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신학교에 들어올 때 굉장히 단순하고 아름답고 그런 신앙을 갖고

있었고, 그런 하느님에 대한 그림을 갖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건 굉장히 중요하고

우리가 평생을 통해서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이지만 하지만 그것이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라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자주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어떤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까? 

씨앗에 대한 말씀을 하시잖아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체험은 씨앗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씨앗을 받아 가지고 난 이것을 변함 없이 그대로 보존할래.

그리고 그냥 유리병에 담아서 냉장고 냉동칸에 딱 넣어 둔다면은 그거는 옳은

겁니까? 아닙니다.

 

땅에 떨어진 밀알 하나가 썩어서 그것이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

그것들이 성장하는 것. 그런 어떤 변화를 우리가 그 안에서 성장하고 더

풍요로워지는 것. 그것에 대해서 꿈꿔야 하는 겁니다.

자, 이스라엘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원시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던 그런 야훼 하느님의 체험과 역사를

통해서 발전하면서 아, 지금까지는 하느님이 이런 분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구나.

그렇지 않구나. 그렇지 않구나라고 발달하는. 그래서 구약의 신관들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겁니다. 

 

가장 원시적인 신관은 어떤 겁니까? 하느님은 우리편. 따라서 우리를 못살게

굴며는 우리 대신 복수해 주시는 분. 많은 사람들이 그거를 가지고 구약의

하느님은 싫다고 얘기하잖아요. 하지만 구약의 하느님의 신관이 거깅서 딱 멈추고

성장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자신들의 역사를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체험과 함께 구약의 신관은

그냥 복수의 하느님, 우리 편인 하느님에 딱 멈추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부터

출발했지만 우리가 마치 어린 아기일 때 갖난 아가일 때 엄마 아빠는 뭐 우리 편,

하는 그와 같이 우리의 의식이 성장해 나가듯이 나중에 우리 예언서에 가면은

보편적인 하느님에 관해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에 관해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그런 하느님이시다라는

고백과 함께 그와 같은 신관이.

 

그러면 거거서 멈춥니까? 아닙니다. 신약으로 넘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함께, 바오로의 신학과 함께, 루카의 신학과 함께,

요한의 신학과 함께 그리고 거기서 멈춥니까? 아닙니다.  

 

순전한 신학적인 체계로만 보자면은 성경을 쓴 그와 같은 성경 저자들과

오늘날의 신학자들과누가 더 발달한 신학을 갖고 있을까요?

오늘날의 신학자들이 훨씬 더 다양한 문제를 또 다양한 방면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이천년 이라는 교회의 체험 안에서 그것을 갖고 있는 다양한 체험과 다양한 것들을

갖고 있는 더 발달한 신학을 갖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출발했던가?

하는 하느님 체험의 그 원형은 보존 되어야 되는 겁니다.

 

예를들어 성경 안에서 어떤 분들이 뭐 제가 후반부가 되면 다른 곳에 가서

비슷한 강의를 또 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어떤 분들이 저에게 그런거를 물어봐요.

요즘에 생태 문제가 심각한데 생태 문제와 성경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 주십시오.

그런데 성서의 저자들은 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이 있을까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내용 안에서 아,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 안에서 인간이 이렇게

살아가야 될 것이다라는 기본적인 그림을 가지고 우리가 오늘날의 생태문제를

풀 수 있는 신학을 구성하는데 성서적인 어떤 밑바침을 만들 수 있지마는 성서가

생태문제까지도 관심을 갖고 얘기했다라고 얘기한다면 그것은 과장하는 겁니다.

 

또는 오늘날 여성 신학자들의 그런 문제들, 여성 신학의 관점에서 성서가

쓰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 신학은 하지 말아야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여성들의 어떤 동등한 인권을 추구하는 그러한 신학적인

하나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면은 성경에서는 여성 신학적인 관점에서

쓰여지지 않았지만, 성경이 이해하고 있는 인간 일관의 관점에서 성경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여성 신학적인 출발점을 마련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와서 이렇게 말했으니까 하느님은 여성 신학자였다라고

누군가가 이야기한다면, 저는 그거는 아, 좀 과장이 된 겁니다라고 말씀 드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튼 이 성경 안에는 탈출기 안에도 탈출기는 그냥 단시간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시나이 사건이라는 굉장히 주전 한 1600년 정도로, 또는 1500년 정도로

추정되는 굉장히 고대의 사건, 그런 체험으로부터 출발해서 그것이 최종적으로

편집된 것은 주전 한 300년 아니면 주전 한 400년.

 

따라서 거의 천년의 시간을 통해서 이 작품이 쓰여진 그리고 그 안에서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느님을 새로이 체험했던 그와 같은 사람들이 탈출기를 새로이 쓰고,

새로 쓰고, 새로 쓰고 하면서 어떤 것들이 다 축적이 되어 있는 겁니까?

아주 원시적인 하느님에 대한 고백에서부터 아주 발달한 하느님에 대한 고백까지.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읽으면은 그것이 일목요연할까요?  아니면

혼란스러울까요? 혼란스럽습니다. 어, 이럴 때 보면 하느님이 이런 분 같고,

저럴 때 보면 하느님이 저런 분인 것 같다. 따라서 그와 같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모든 문학작품을 대할 때, 습관적으로 그냥 한 사람이 책상에 앉아서 일정한

시간, 한달이면 한달 두달이면 두 달 동안 써내려 간 것이다하는 일반적인 문학

작품을 대하듯이 이 탈출기를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전승들이 모이고 편집되어 최종적으로 탈출기라는 하나의 완결된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정확하게 재 구성하는 일이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따라서 (오경 연구의 틀 안에서) 탈출기 연구가들의 새로운 이론과 가설들이 오늘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강의를 통해서는 여러분들에게 어떤 새로운 이론들이라든지, 급진적인 뭐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제가 지나치게 기술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탈출기 연구가들이 아, 우리가 읽는 탈출기의 텍스트들을 이렇게

읽고 접합니다라는 일반적인 연구의 결과에 관해서 말씀드릴 것이고 또 어떤 것들에

관해서는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것이 어떤 증명돼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논리는 아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텍스트를 이렇게 읽고 묵상합니다라는 정도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게 될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어떤 책을 읽으면은 항상 그 책의 저자는 항상 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까요? 아닐겁니다. 따라서 아, 성서백주간 지도 신부는 탈출기를

저런 틀을 가지고 저런 방법 안에서 읽어가는구나라는 정도로 받아 줘야지.

요즘에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내가 TV에서 봤는데... 우리 신부님이 얘기 했는데...

그런 어떤 틀 안에서 이게 꼭 맞는 진리입니다라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이거는 한 사람의 신학자로서 이런 것들은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탈출기 텍스트를

읽는 올바른 길인 것 같습니다라는 일종의 제 고백을 들으신다는 그런 밑그림 안에서

강의를 들어 주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강의는 첫 번째 택스트로 탈출 1,1-7 가족에서 민족으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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