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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화방송 성서백주간 탈출기 강의 제2회 가족에서 민족으로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17 조회수684 추천수1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 제2회 가족에서 민족으로

 

탈출 1,1-7

자,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강의를 들으시는 방법은,

눈은 성서를 보시고 귀로는 제 강의를 들으시면 됩니다.

어떤 문학작품이건 간에 그 시작은 중요합니다.

그 서두에서 작품은 독자의 시선을 작품의 세계 안으로 끌어 당기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좋아하시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겠지만

오페라가 있으면은 오페라에는 항상 그냥 무대가 탁 열리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페라 무대와 관객 사이에는 오케스트라가 있잖아요.

그 오케스트라가 서곡을 연주합니다.

 

그런데 오페라를 만드는 작곡가들이 제일 많이 신경을 쓰는 부분이

이 서곡이예요. 왜냐하면 그 서곡을 통해서 관중들이 무대 안으로 집중

하느냐, 집중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의 출발점이 되는 겁니다.

 

또는 여러분들이 영화 같은 거를 보면은 처음 5분이 중요합니다.

처음 5분 안에 사람들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라는

것이 정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도 탈출기 1장부터 2장의 그 문학적인 기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탈출기 1장, 2장은 그런 의미에서 탈출기 전체를 이끄는 굉장히 문학적인

면에서도 훌륭한 서두입니다.

 

탈출기 1장을 통해 성서 기자는 독자들을 탈출기가 서술될 시간과 공간으로

초대합니다. 그러면서 전체적인 장면을 설정하고 그리고 탈출기 2장은

탈출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모세를 조심스럽게 등장 시킵니다.

주인공이 등장해야 되는 거죠. 문학적인 면에서 볼 때.

 

따라서 탈출기 1장과 2장은 잘 짜맞추어진 내적 구성을 보여주고 모세 오경의

큰 구조의 관점에서도 앞선 창세기와 탈출기를 성공적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미 시작을 하면서 조금 문제가 생깁니다.

 

탈출기 1장1절, 어떻게 시작합니까?

1. "야곱과 함께 저마다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름은 이러하다."라는 것이 탈출기 1,1의 내용인데 제가 직역을 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 탈출 1,1: 그리고 이것들이 이집트로 온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름들이다.

야곱과 함께 각각의 사람과 그의 집(안)이 왔다.

 

이상하죠? 책을 시작하면서 접속사로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라는 거는 어떤 내용입니까?

그 앞에 뭔가가 있대는 겁니다. 따라서 탈출기는 이렇게 우리 앞에 낱권의

책처럼 쓰여져 있지마는 사실은 그 앞에 있는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앞에 있는 내용이 뭡니까? 창세기입니다.

따라서 "그리고 야곱과 함께 이것들이 이집트로 온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름들이다." 뭐가 생각나십니까? 창세기에서 보면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들이 누구누구의 족보이다."라는 것과 이름들이라는 말을 족보라고

바꾸면은 정확히 같은 문장 구성입니다. 따라서 창세기가 쓰고 있는 그런

표현들을 조금 흉내내는 겁니다.

 

예, 그 다음에 이렇게 제가 직역을 해 놨습니다만 문장으로 보면 대단히 이상한

문장입니다. 히브리어 문법에서 보면. 따라서 문장이 굉장히 이상하고 번역하기

까다로운 문장이 됐다는 것은 그 안에 그것이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써야만 했던 신학적인 의도가 있대는 겁니다.

 

억지로 약간 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당장 우리 눈에 띄는 게

"이집트로 온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름들이다." 그리고 자연스러우려면

"이스라엘과 함께 각각의 사람과 그의 집(안)이 왔다."

이게 제일 자연스럽겠지요? 그런데 한번은 같은 사람을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한번은 야곱이라고 합니다.

 

야곱과 이스라엘, 어떤 게 더 오래된 이름입니까? 야곱입니다.

그가 이름이 바뀝니다. 언제 바뀌죠? 이름이 바뀌는 장면이 창세기에 보면

두번 나옵니다. 따라서 보통 사건은 아닌거예요. 같은 이름 바뀌는 사건이

야뽁강에서 한번 나오고, 또 다른 사건에서도 한번 나옵니다.

 

자세히 봅시다.

※ 창세 32,27-29 참조하세요.

씨름을 하고 있는 거지요. 조금 이상하긴 해요. 하느님의 천사 비슷한데 동트는

거를 왜 무서워하는지 모르겠어요. ^^*~ 이 안에는 사실은 신화적인 세계관이

있는 겁니다. "동틀 때까지 있어서는 안 된다." 라는 그런 어떤 내적인 약속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어요. 다른 문헌들을 봐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누가 준 이름입니까? 하느님이 준 이름입니다.

다른 대목도 하나 나옵니다.

※ 창세 35,10 :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이름은 야곱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야곱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너의 이름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셨다.

 

같은 이야기인데 두 가지 전승이 있는 겁니다. 신약에서도 보면 누가 누구에게

비슷한 장면이 떠 오르죠? 예수님이 시몬 바르요나에게 케파라고 부르시는

장면으로 케파는 '돌'이라는 뜻이예요. 그런데 케파라는 말이 그리스 말로

사람들이 기억하기 어려우니까 나중에 이방인 지역으로 베드로가 이렇게

나가면서 그 말을 번역한 거 같애요. 케파가 페트로스가 됩니다.

우리 말로는 베드로로 되는 그와 같은 상황입니다.

 

아무튼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하느님이 그에게 이름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이름만 준 겁니까? 누군가에게 이름을 줬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그와 내가 관계를 맺었다는 것. 또는 더 나아가서 그가 이제 존재하기 시작한

겁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뭐냐? 내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라는

거는 적어도 나의 세계 안에서 그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의 문제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야곱은 하느님께 존재하는 의미가 있는, 그 자체로도.

 

따라서 이거를 신학적인 의미로는 하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한 문장에 쓰였을 때,

이것은 일종의 역사적인 팩트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이름만 들으면은

성조, 조상, 성조사 이런 것들과 연관되어 있는 겁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신학적 이름입니다. 신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그 신학적 의미 안에는 (축복)이라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함께 하느님의 선택, 축복의 신학

뭐 이런 것들이 함께 연관되어 있는 겁니다.

 

예, 더욱 중요한 것은 여기서 다음과 같은 표현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라는 표현은 탈출기 전체를 통해서 굉장히 자주

등장합니다. 그전까지는 창세기에서는 누가 주인공이었습니까?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렇게가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누가 주인공이 되는 겁니까?  '이스라엘 자손들'

 

그리고 나중에 구약성경이 쭉  흘러나가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취환됩니다. 어떤 말로 취환될까요? '이스라엘'입니다.

민족개념으로.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그 개념까지는 가지 않는 겁니다.

전에는 아브라함과 그의 집안, 이사악과 그의 집안, 야곱과 그의 집안 하다가

이제는 이스라엘의 자손들, 다음으로 나가면은 이스라엘.

어떤 이스라엘?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개념으로.

 

따라서 이 첫 번째 요 파트를 어떻게 제목을 붙였냐하면, '가족에서 민족으로'

어떻게 그들이 점점 커 나가는가, 성장해 나가는가라는 그런 관점에서 제목을

붙였습니다.

 

자, 그리고 재미있습니다.

※ 2. 르우벤, 시메온, 레위, 유다  3. 이사카르, 즈불룬, 베냐민

    4. 단, 납탈리, 가드, 아세르이다.

 

모두 몇명입니까? 11명입니다. 누가 빠졌을까요? 요셉이 빠졌습니다.

예, 뭐가 보이십니까? 탈출 1,2을 보면 어떤 순서로 나열되어 있습니까?

창세 35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나열이 나옵니다.

 

※ 이름의 순서:창세 35,23-26(성경 구절 참조)

 

따라서 레아가 먼저, 라헬이 두 번째, 다음에 라헬의 몸종이 세 번째, 레아의

몸종이 네 번째.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정실 부인의 아들들과 종의 아들들을

차별하는 그와 같은 모습, 뭔가 사람을 나누는 그와 같은 모습입니다.

 

저는 요 대목은 요즘의 우리들의 관념으로 보면은 좀 잘못 썼다고 생각합니다.

태어난 순서대로 쭉 써야지 정부인과 뭐 첩 이런 것들은 좀 인간을 차별하는

그런 건가? 그런 마음으로 요 구절을 읽습니다. 하지만 아무튼 탈출기 1장을

적은 저자는 창세기 35장을 알고 있는 겁니다.

 

예, 그리고 뭐라고 얘기합니까?

※ 5. 야곱의 몸에서 난 이들은 모두 일흔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요셉은 이미

이집트에 가 있었다.

 

여러분들 계산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집트에 간 사람은 모두 몇명입니까?

야곱의 몸에서 난 사람이 모두 일흔 명이지요? 요셉은 이미 이집트에 가 있지요?

따라서 일흔 명에다 요셉을 더하면 일흔한 명이지요. 하지만 일흔두 명입니다.

왜? 야곱까지 치면. 요 계산으로보면 일흔두 명입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 46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창세 46,26-27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들어간 사람들은 야곱의 며느리를 뺀 직계 자손들이

모두 예순여섯 명이다. 이집트에서 태어난 요셉의 아들들은 둘이다.

그래서 이집트로 들어간 야곱의 집안 식구는 모두 일흔 명이다.

 

자, 계산이 됩니까? 육십육 명에다가 요셉의 아들 둘을 더하면은 66에다가

요셉의 아들 둘을 더하면 68이지요? 그럼 누구누구 둘을 더해야 될까요?

요셉 자신과 야곱을 더하면 여기서는 70명이 맞춰져요.

 

따라서 요 계산으로만 보면, 탈출기 계산으로보면 72명 같은데 창세기는

70명이라고 얘기하지마는 하지만 창세기의 저자에게나 탈출기의 저자에게나

중요한 숫자는 뭡니까? 70이라는 숫자인 겁니다.

 

그게 왜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지는 모르겠는데 오늘날 우리는 그런 의미의

70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구약의 세계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거 같애요.

 

나중에 이 히브리말 구약 성경이 그리스말로 번역되는데,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해서 이집트에서 번역이 되는데 그 번역된 전통도 70인역이라고

부릅니다. 일흔 명의 학자들이 번역을 했다라는 약간 좀 전설적인 전승과 함께.

 

나중에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세요. 곳곳에 가서 복음을

너희들이 전해라. 이미 살아 계실 때 제자들을 파견하는.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가라. 뭐 그러시면서. 그때 몇명을 파견하시죠? 70명을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몇몇 수사본에는 우리 성경책에는 혹시 각주에 나올지도 모릅니다.

72명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70, 72, 뭐 이런 것들이 중요한 거예요. 중요한 신학적인 숫자인 겁니다.

반면에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리스말 성경에는 이 대목에서 야곱의 몸에서 난

이들이 모두 일흔 명이었다는 부분을 교정합니다. 수정합니다. 그래서 일흔다섯

명이라고 전합니다. 그리스말 성경에는, 우리 말 성경에는 그 대목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신약성경으로 넘어와서 사도행전에 보면, 스테파노가 붙잡혀서

순교하기 직전에 하는 연설이 있습니다. 그 연설에서 스테파노가 구약의 역사를

쭉 훑는데 그런데 7장 14절에서 어떤 얘기를 하느냐 하면,

 

※스테파노의 연설 (사도 7,14) : 요셉은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 야곱과 일흔다섯

 명이나 되는 자기 친족을 모두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스테파노의 연설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히브리 말로 된 텍스트를 참고로 스테파노의 연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사도행전 저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 히브리말 텍스트를

보지는 않은 것 같다라는 생각을 우리가 좀 역으로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뭐 다음과 같은 숫자겠죠.

70, 72, 75 (창세 46,26-27; 사도 7,14 참조)

 

예, 그리고 6절로 넘어갑시다.

"그 뒤 요셉과 그 형제들과 그 세대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그 세대는 제너레이션(generation) 을 얘기합니다. 한 제너레이션은 몇 년입니까?

예, 아마 이 때문에 오늘날 서양에서 이 전통이 생겼는지는 모르겠는데

여기서는 30년 정도로  생각을 하는 거 같애요.

 

그래서 나중에 탈출기를 쭉 읽어 가면서 제가 다시 한번 설명의 말씀을

드리겠지마는 창세기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희 후손들이 이국땅에

가서 노예살이를 할꺼다. 몇 년동안? 400년 동안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탈출기 나중에는 그들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이 모두 430년이라고 나옵니다.

 

그럼 두 개가 하나는 430년, 하나는 400년. 차이가 나잖아요. 왜 그러냐?

요셉이 들어가서 죽을 때까지는 노예살이를 안 했으니까. 따라서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모두 430년인데 노예살이 한 기간은 400년이라는 식의 계산법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이집트에서의 어떤 생활을 기억하고 있다라는 어떤 큰

시간적인 틀을 여러분이 알고 계시면은 됩니다.

 

아무튼 그 요셉의 죽음에 관해서 창세기 50,26에서 이미 전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죽음(창세 50,26) : 요셉이 백열 살에 죽자 사람들이 그의 몸을

 방부처리 하고 관에 넣어 이집트에 모셨다.

 

따라서 비브리칼 에이지(Biblical age)를 달성하지는 못해요.

비브리칼 에이지,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잘 살았을 때는 몇세를 살아야

합니까? 120년입니다. 하느님이 정해 주신 그런 숫자가 있습니다.

120년을 살아야 되는데 110살에 죽어 사람들이 그의 몸을 방부처리하고 관에

넣어 이집트에 모십니다.

 

요셉은 아직까지 그의 주검(시체)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이집트에 있는 겁니다.  나중에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떠날 때, 그 야밤 중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챙겨갑니다.

 

그리고  나중에 여호수아기에, 모세오경에는 그 장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제 다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나서 요셉과 관련이 있는 도시

스켐에 요셉의 유해를 다시 모시고 가는 그와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 24,32)

 

자신들의 조상이었던 요셉에 대한 어떤 충실함을 굉장히 커다란 역사의 흐름

안에서 저희들이 만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요셉의 죽음에 관해서 이미 탈출기 마지막에서 언급했고 여기서 다시

한번 언급하는 겁니다. "모두 죽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식을 많이

낳고 늘어만 갔다."(탈출 1,6-7)

 

예, 이스라엘 이름은 축복의 신학이라고 그랬죠?

그 축복의 내용이 뭡니까?

첫째, 나는 너에게 땅을 주겠다.

둘째, 나는 너의 자손을 많게 해 주겠다. 얼마만큼?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알만큼, 또는 흙의 먼지만큼 그렇게 많게 해

주겠다라는 내용이 창세기에 등장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과거의 시대에는 그게 축복이었지만, 요즘은 축복입니까?

뭔가 좀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는 거예요. 아무튼 중요한 거는 뭡니까?

자식을 많이 낳고 늘어만 갔다. 즉 하느님의 축복이 이루어진 겁니다.

"그리하여 그 땅이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 찼다."라는 내용입니다.

 

자, 창세기의 축복, 우리가 되짚어서 읽어 봅시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 창세기의 축복(창세 1,28. 9,1)

 

창세1,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창세 9,1: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이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이건 좀 일반적인 겁니다. 아직 그 이스라엘과의 구체적인 어떤 만남이 있기

이전에도 하느님이 이미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또는 노아의 홍수를 지나오면서

이렇게 세상을 축복하시는 그와 같은 모습입니다.

 

예, 아브라함을 축복했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창세 12,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창세 28,3: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어, 네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게 하시며, 네가 민족들의 무리가 되게 해 주실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들입니다.

 

예, 이렇게 언급된 요셉의 죽음에 관해서 그리고 그런 후손들의 번성에

관해서 우리들은 7절 마지막에 그것을 접하게 됩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본다면,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식을 많이 낳고

늘어만 갔다. 그들은 번성하고 더욱더 강해졌다."(7절)

 

낳고, 늘고, 번성하고, 강해지고, 가득찼다.

동사 다섯 개가 연달아 나오는 겁니다. 굉장히 숨가쁜 겁니다.

8분의 6박자로 굉장히 빠른 템포로 지금 나가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그림으로 보자면, 그냥 세포분열 같은 게 막 일어나는 겁니다.

예, 낳다, 늘었다, 번성했다, 강해졌다, 가득찼다.

그러면서 굉장히빠른 속도로 그것들이 늘어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가득찼다라는 건 뭐냐하면,

우리말의 어감으로 표현하자면 저도 성서 번역을 그렇게는 하지 않겠지만

"빠글빠글 해 졌다."는 거예요. 뭔가 통속에 빠글빠글 이렇게 한 거...^^*~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셨다라고 성서 저자는 여기서

고백하는 겁니다. 하느님은 따라서 창세기 전체가 그런 내용이었지만

이제 탈출기에 와서 하느님은 어떤 분이냐? 자신이 약속한 것을 이루시고야

마는 분, 자신의 말씀을 지키시는  분으로 고백되고 있는 겁니다.

 

예, 하지만 여기서만 끝난다면은 앞으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왜 종살이를

하게 됐는지 설명이 안 되겠지요? 따라서 탈출기 1장은 그 대목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인 준비를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요셉이 죽고, 새로운 파라오가 등장하는 장면,

이제 그것은 8절부터 이어지게 됩니다. 거기다가 한 대목을 집어 넣었는데

이게 중요한 겁니다. "요셉을 알지 못했다." 는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자, 앞에 있는 내용을 다시 한번 언급하지면,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표헌은 탈출기 전체에서 무려 125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이나 이사악, 야곱, 요셉과 같은 개인이 아니라

다수로 이루어진 한 무리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주인공이 바뀌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탈출 1,1-7은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을 한번 더 요약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창세기와 탈출기를 연결시키고 있고, 그리고 탈출기를 촉발시키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갈등을 문학적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1,1-7을 가지고 우리가 몇가지 묵상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단지 텍스트의 내용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제가 강의하면서 이제 일정한

텍스트를 설명 드리고 나서 거기에 대한 묵상을 뭐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라는 것을 좀 나누고자 합니다.

 

왜 이렇게 앞선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이 중요할까요?

그 앞선 역사를 되짚어 봄으로써 성서기자는 사실은 자신들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나의 뿌리에 관해서 왜 이야기를 하느냐?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해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아빠,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떤 분이었는지, 그 증조부와 뭐 그외의 조상들은...

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동네는 어떤 역사를 갖고 있었는지...

뭐 그런 것들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우리들은 과연 어떤가? 요즘에 가정 안에서 할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우리 조상들이 누구였는지? 나는 누구였는지? 우리 동네는 무엇이었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뿌리가 약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저에게는

우리 세대를 바라보는 그 다음 세대를 우리가 조금은 잘못 자라나게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리고 요즘에 우리 학교에서는 우리나라  역사를 잘 가르칩니까?

저희 학생 때도 마찬가지지만 영어, 수확 아니면 국어 뭐 이 정도. 그렇지요?

우리 역사에 관해서 우리의 정체성에 관해서 우리가 너무 소홀한 것이

아닌지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나는 누구이고,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대답할 수

있을 때, 과연 나는 무엇하며 살아야 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거기에 대한 어떤 대답도 발견할 수 있대는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여러분들 게임 중에서 우리가 하는 여러가지 놀이 중에서

바둑이라는 놀이가 있지요? 바둑이라는 놀이에서 고수가 있고 하수가

있잖아요. 고수와 하수의 경계가 뭔지 아십니까? 복기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자기가 둔 한판의 바둑을 그대로 다시 둘 수 있으면

그때부터는 고수 계열에 들어가요.

 

따라서 우리가 지난 시간을 기억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대는 겁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민족으로서, 하나의 민족으로서, 세계 속에

살아가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 세상 안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라는 건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잘 기억하고 간직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잘 평가하느냐? 어떠한 가치,  어떠한

틀을 가지고 우리의 역사를 보고 그 안에서 어떤 가치를 판단하느냐?라는

문제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그 틀은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단지 자신의 역사를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누구의 시선으로 자신의 역사를 보는 겁니까?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는 겁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주전 1600년 경에 한 반도에서 어떤 일이 생겼는가를 생각하면서.

 

사실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오늘날에도 굉장히 문제가 있잖아요.

일제 강점기. 일본이 우리에게 암만 사과를 해도 우리가 그 사과가 정말 진정하지

않다고 본다라고 얘기하는 건 어떤 이유입니까? 자기네들 교과서 안에서 자신들의

그런 식민주의, 그런 대한민국이라든지, 중국이라든지 이런 나라들을 침략한

역사를 잘못 됐다고 반성하지 않으니 암만 미안하다고 해도 우리가 그걸 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교과서에는 버젓이 어떤 교과서가 일본에 등장하는 겁니까?

"그거는 아시아를 근대화 시키기 위해서, 일본이 아시아를 돕기 위해서한 일이다."

이런 소리를 써 놓은 겁니다. 그런 식민주의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겁니다.

 

따라서 제가 어린이 미사 때 어린 애들한테 물어 봤어요.

"우리가 이런 역사를 갖고 있으니까 나중에 우리가 힘센 나라가 되면 일본을

식민지화 해도 되는 겁니까?" 그러니까 애들이 "예!" 그래요.^^*~ 아니죠.

올바른 역사 교육이 아닌 겁니다. 올바른 역사 교육은 뭐를 가르쳐야 되는 겁니까?

 

그렇게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폭력적으로 지배하고 다른 민족의 문화를 말살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나중에 힘이 세지더라도 우리는 우리보다

힘이 약한 다른 민족에게 그와 같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겁니다.

 

역사의 굴곡 안에서 다른 것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대한 민국의 근대사는

두번의 군사 구테타를 겪었습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요.

군사 쿠테타를 일으킨 사람들은 정말 나라를 걱정해서 그랬을 수도 모르겠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게 됐는지도 모르겠고, 그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게 됐을지에 관해서는 그거는 역사가들의 판단에 맡겨야

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얘기할 것은 있겠습니다. 그와 같은 군사 구테타는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거를 다음 세대에게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

어느 순간에 누군가가 어떤 군인이 "지금 대한 민국이 이상하다." 그러고 또 군사

쿠테타를 일으킬 수 있는, 그리고 다시 어떤 군사 독재가 인간의 자유와 인간의

말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인간의 권리를 짓밟는 일이 다시 생길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분명한 역사관을 갖고 어떤

것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식민주의는 다시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군사  독재는 다시 이 세상에 일어나면 안 된다. 민주주의는 지켜져야

한다. 인간의 기본권, 인권은 보호돼야 한다.

 

 

이런 것들은 다음 세대에게 분명히 가르치지 않을 때 우리의 역사 교육 안에서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다시 어느 한 순간이 돼 버릴 수도 있는 겁니다.

 

예, 이스라엘과 역사 서술과 역사 인식 안에서 특별한 점은 그런 의미에서 단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의 시선으로 그 사건을 들여다

본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제 역사의 사건들의 대 해석을 통해 고정되었던 것처럼 되어 보였던

이스라엘과 야훼 하느님의 정체가 탈출기를 통해서 새로이 규정되어 나갑니다.

이제 성조들의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라 탈출과 해방의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는 가족 이야기에 불과했던 그런 이야기들이 이제 민족

이야기로 성장하면서 창세기에서는 끊임없이 가족사의 갈등이 있었지요?

아브라함과 롯의 갈등, 이스마엘과 이사악의 갈등, 야곱과 에사우의 갈등,

요셉과 다른 형제들의 갈등, 가족 내의 갈등의 문제가 이제는 민족사의 갈등으로

불거져 나옵니다.

 

이집트와 야훼 하느님의 갈등, 그게 탈출기의 전반부라면 후반부에서는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갈등, 그와 같은 갈등의 구조가 이제는 조금 더 큰 틀

안에서 발전 하면서 이제 새로이 꾸며진 역사의 무대에서 탈출과 해방의

야훼 하느님이라는 새로운 모습을 이스라엘의 자손들, 이스라엘 민족은 이제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새로운 하느님을 고백하게 되는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두 번째 이야기를 밑그림만 그려 드리고 다음 강의 시간에 계속해서 이어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탈출 1,8-22의 내용은 그 제목이  파라오의 억압입니다.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어떻게 억압하게 되었는지.

 

그 파라오는 이집트의 새로운 임금입니다.  새로운 임금, 새 임금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여기에만 등장합니다. '새'라는 말도 등장하고,

'임금'이라는 말도 등장하지만, '새 임금'이라는 말은 여기서만 등장합니다.

 

뭔가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 변화의 핵심에는 그가 요셉을 알지 못했다라는

것에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니까. 알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지요?

 

여러분들이 밤길을 걸어가는데 앞에서 누군가가 다가와요.

내가 모르는 사람이예요. 그랬을 때 두려운 겁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두려운 겁니다.

 

그 두려움에 파라오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두려움 앞에서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억압하기 시작하는데 그 억압의 형태가 두 가지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수가 많아지는 게 문제인데 하느님의 축복 때문에

수가 많아지는 게 문제니까 남자 아이를 죽입니다.

 

아무튼 남자는 싸울 수 있잖아요. 그런 전쟁 가능한 그와 같은 숫자를 줄이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 아이를 죽이는 그와 같은 두 가지 모습을 억압의 형태로

만나게 되는데 흥미로운 것은 억압이 그냥 단순한 억압이 아니라

이 탈출 1,8-22 안에서 계속해서 상승합니다.

 

맨 처음에 억압을 하다가 이스라엘이 계속 번성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 억압을 더 가중시킵니다. 억압을 더 심하게. 한번 억압해서 안 되니까

억압이  상승합니다.

 

남자 아이를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남자 아이를  죽일 때 어떻게

합니까?  산파 두 명을 불러다가 남자 아이거든 몰래 죽여라라고 몰래 하다가

나중에는  그렇게 해서 산파들을 통해서 자신의 계획이 달성되지 않자,

이제는 내 놓고 모든 이집트에다 공포를 합니다.

"남자 아이들은 태어나면 다 죽여버려라."

 

따라서 한번 그들이 갖고 있는 그 공포를 없애기 위해서 일정한 계획을 세우지만,

노역과 남자 아이 살해라는. 하지만 그것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그 억압이 더 상승하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예, 그러자 1장 마지막 부분, 이스라엘 자신들이 인간적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억압과 불의를 당하게 되자 이스라엘이 부르짖게 되고 그 부르짖음이

하늘까지 도달하는 겁니다. 이제 부르짖음이 굉장히 큰 겁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자 그 소리가 하늘까지 도달하게 되고 그것이 마치 옛날에

신화적인 세계 안에서 보면은 잠자던 신을 깨우듯이 하느님께서 그 소리를 듣고,

"아, 옛날에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에게, 야곱에게 이런 약속을 했었지."

 

그 약속을 기억하고 그리고 그들의 역사 안에 개입하시게 되는 약간은 좀

신화적인 그런 어떤 맥락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사정을 이제 들으시고,

그것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려다 보시고 그들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그와 같은 틀로서 이제 탈출기 안에서 야훼 하느님이 어떻게 해서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개입하시게 되었는가? 라는 첫 번째 어떤 질문에

대답하는 탈출기 편집자의 문학적인 그런 구성을 우리가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거 슬로우가 아니라 엑스트라 슬로우가 돼서 ^^*~~

뭐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계속 나갈 겁니다. 천천히 여러분들 성서 한 구절

한 구절 저랑 같이 읽어 나가시면서 저는 이렇게 묵상했으니 여러분들도 그와

같은 하느님의 말씀에, 묵상에 초대합니다라는 어떤 백주간 지도 신부의 마음을

이해해 주십사하는 그런 어떤 당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3회 파라오의 억압(1) :  탈출 1,1-22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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