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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상한 이름 [사제들의 책임]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17 조회수479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그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너희를 찾아가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그러나 강한 손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한, 이집트 임금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그러므로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탈출기 /  목요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오 11, 28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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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본질과 인격의 신원과 그 생명의 의미를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름을 가지고 계신다.그분께서는 이름 없는 어떤 힘이 아니시다.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은....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내 주는 것이다. <교리서 203>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
라는 당신의 본질과 인격과 그 생명의 의미로써 이름을 알리시며, 그들에게 하느님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본질과 인격과 생명이 없는 어떤 힘으로 자신을 내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라고 하시는 것은, <자기 비움과 자기 버림의 자기가 없는 것>에서 자신을 내어 주실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자신의 본질과 인격과 생명의 자신을 내어 주신다는 것은 '자기 본질과 인격과 생명'을 비우거나 버린 어떤 힘이 아닌 것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하심은 하느님의 본질과 인격과 그 생명으로 보내진 모세 그 역시도 모세 자신의 본질과 인격과 그 생명으로 그들에게 모세 자신을 내어 주신다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이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겪는 고난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모세도 안다는 뜻입니다.

자기 비움과 자기 버림으로써 자기가 (존재의 본질과 인격과 그 생명이) 없다면, 이집트에서 이집트인들에게서 버려진 하느님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없고, 거기에 연민의 사랑을 나타낼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당하는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을 '마음 아파'하십니다. 이유는 당신의 본질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 아파하시는 것은 당신의 인격이 그러하시고 따라서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생명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집트의 죄악과 고통과 죽음의 현실에 대하여 하느님과 같지 않습니다.그들은 비록 '있는 나'라고 하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지만 자신들은 하느님의 모습을 잊어 버리고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에 적응되어져 이집트의 어두운 세속에 묻혀서 살아갑니다. 

거친 삯꾼들과 같은 이집트인들의 악행과 이에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이스라엘 자손들과 같은 가짜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 버려진 인간들은 죄악의 고통과 죽음으로 <살아있는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을 고귀하고 자유롭게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기력한 그들에게는, 자기 비움과 자기 버림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자기 소멸'의 세속 방식이 팽배하였습니다.

자기에게 부여시킨 이상한 이 이름은, 세속의 죄악과 고통과 죽음에 적응해 가도록 했습니다.하느님의 이름이 지닌 의미와 같은 <인간 자신의 본질과 인격과 그 생명>을 포기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자기 포기라는 것입니다.그리하여 <사랑과 연민의 마음과 생명의 문화>를 저버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세에게는 그와 반대가 되는 하느님 마음과 같은 <사랑과 연민과 생명>을 자신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에게서 온전한 자기로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이 있는 곳으로 보내심을 받게 됩니다.보내심은 자신을 내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 마음으로 사랑과 연민과 생명을 지닌 사람 자신은 (자기는)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에서 무기력하지 않습니다.그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버려진이들에게도 <하느님처럼 우러름을 받을 수 있게> 무관심하지 못합니다.

그런 자신은 하느님의 이름 의미로 하느님에게서 하느님 마음으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느님 당신의 이름 의미이신, 사랑과 자비(연민)의 본질과 인격 그 생명으로 보내어 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달리 '하느님 바로 자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로부터 직접 보내심을 받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이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이신 예수님의 사랑은, <다름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나타내십니다. 하느님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 뜻을, 당신의 십자가에서 완성하셨습니다.  

이 '하느님의 뜻'은 바로 사랑이 본질이신 하느님께서 지니신 이름 의미에서 보여 주시는 '나다'하신 사랑이십니다.예수님께서 나다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요한 18, 6 참조)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바로 '나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지금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것과 같으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사랑의 성체성사인, 구원의 신비입니다.예수님의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자기 '이름이 없는 어떤 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당신의 이름으로 보내심을 받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의 참된 제자들은, 바로 하느님 그분의 이름이신 예수님으로 부터 보내심을 받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당신의 제자들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름으로 행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자기의 본질과 인격과 생명의 이름 의미에서 하느님과 모세의 결합과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도 예수님과의 결합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일입니다.모세가 죄악과 고통과 죽음의 이집트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내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해야 합니다

이는 지금의 이 시대에서도 악행에 의한 고통과 죄행에 의한 죽음의 어둠 속에서 고난을 겪는 버려진 이들을 거기에서 건져내시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입니다.모세의 일과 예수님의 일은 단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사랑과 자비와 생명의 하느님 당신의 이름을 지니시고 행하신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이같은 하느님의 일에 예수님께 당신의 십자가가 있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 하셨습니다.예수님과의 결합은 인간에 의해서 버려진 인간 그리고 그 중에서도 또 다시 버려지는 '한 인간' 그들에게서 무기력하고 무관심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어진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에게는 세속의 죄악과 고통과 죽음의 현실에 적응하도록 변질시키는 '자기 비움과 자기 버림'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자기 포기 의미는 결코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여해 주신 "제 십자가"에는 자기이름의 고유한 본질과 인격과 그 생명을 지니는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 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연민)와 생명이 온전하게 모세에게 부여되었듯이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연민)와 생명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온전하게 부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참된 이 제자들을 통하여, '버려진 이들'을 이집트의 악행과 죄행의 고통과 죽음에서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 내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은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의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지혜'는, 제자들이 제 십자가에서 성체성사적인 사랑의 삶을 살도록 하신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참 고>
이전의 게시글 (아래 댓글에서 기록한 두 게시글)을 읽지 않으면 이해하는데 실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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