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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봉쇄수녀원에 두 딸을 보내신 홀아비와 버려진 이들은 같은 처지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18 조회수434 추천수1 반대(0) 신고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 앞에서 모든 기적을 일으켰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파라오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기 땅에서 내보내지 않았다....그리고 그 피는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금요일 제1독서 참조>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오 12,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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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파라오 마음은 완고하였다. 그들에 의해서 버려진 이들 때문에 이집트의 부가 축적되지나 않을까 고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에가 없다면 다시말하면 버려진 이들이 없다면 어디서 부유함을 채울 수 있을까요.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의 집들은 커지고 버려진 이들의 집들은 작아집니다. 악행과 죄행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보다는 버려진 이들의 소유권이 사라질까 고심합니다. 버려진 이들 때문에 자신들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데 '버려진 이들의 영광'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들이 편리해 지지 않을 것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버려진 이들 때문에 주님께서 내려준 은총인 '사랑의 힘' 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돈의 힘'과 '삯꾼의 힘'에 의존하려고 하는 온갖 불완전한 규정들과 방침들을 지금 이 시대에서도 가짜 예수의 제자들은 머리쓰는데 여념이 없습니다.영적인 나태함이 죄악의 고통과 죽음을 설치게 함에도 불구하고 '버려진 이들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두 눈은 멀어져 만 갔다 할 것입니다. '사랑의 힘'에서 무기력해 진 가짜 제자들은 그리스도적 고통과 일치할 수가 없어 영적인 나태함을 불러 일으켰습니다.버려진 이들이 겪는 이집트의 악행에 의한 고통과 죄행에 의해서 초래되어지는 죽음에 대한 무관심이 버려진 이들 때문에 내려지는 주님의 은총을 욕되게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서나 지금의 이 시대에서도, 그때의 온갖 율법이나 지금의 규정들과 방침들은 불완전한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같은 가짜 제자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나 홀로 수덕>의 굴레에 빠져 율법의 완성을 가져다 주는 '사랑의 힘'을 거부하고 거스리는 짓들을 저지르고 맙니다.그것은 자기 안에 혹은 공동체 안에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과의 일치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추락 때문입니다. 성전 보다 더 크신 예수님께서는 '나 홀로 수덕'에 갇혀져 있는 그들의 <위에> 계시지 않으시고, 그 반대로 버려진 이들의 고통 속 <아래에> 머무르시는 것입니다.가짜 제자들은 버려진 이들의 고통과 고난 속에서 힘들어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불완전한 규정들과 방침들을 섬기며 <나 홀로 수덕>의 희생제물이 되고자 하는 가짜 제자들은 '사랑의 힘'에 무기력하여 바리사이들 처럼 자신들의 지배 체제만을 보호하고자 결국 예수님을 매달아 버립니다. 사랑을 없애어 버립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다르지 않습니다.이집트의 지배 체제를 위해 버려진 이들에 대한 평화와 행복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불완전한 규정들과 방침들을 극복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마음을 찾아 <위에로> 도달하려고 했지만, 정작 예수님 마음은 <아래에> 머무르고 계셨다고 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오 25, 45 참조)그러한즉 어떻게 <아래에> 머무르시는 예수님과 결합할 수 있을까요.

<교리서 556> 베드로가 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를 바랐을 때, 그는 이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여,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신 다음에 주시려고 이것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지상에서 고생하고, 지상에서 봉사하고, 지상에서 멸시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내려가라. ‘생명’이신 분이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내려오고, ‘빵’이신 분이 굶주리기 위하여 내려오고, ‘길’이신 분이 길 가느라 고단하기 위하여 내려오고, ‘샘’이신 분이 목마르기 위하여 내려오는데, 너는 고생하기를 싫다 하느냐

'돈의 힘'을 숭배하고 '사랑의 힘이 거짓된' 공동체는, 두 딸을 모두 수녀원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시고 무자식이 된 홀아비가 자신의 남은 평생을 자녀들처럼 봉사하다 질병을 앓자 지출이 되는 큰 돈이 아까와 규정들과 방침에 따라 퇴출시키려고 하자, 갈 곳이 없어 자해하는 소동을 벌입니다.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자 자해하신 것입니다. '돈의 힘'을 숭배하는 이런 곳은 개신교에서도 흔히 있슴을 주위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돈의 힘'을 숭배하는 이집트에서는 죄악된 일들이 그들 자신들 속에 자리잡고 있기 마련입니다.예수님은 그들안에 결코 사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 자비이신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사셨다면 불완전한 것들을 극복하고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참 고>
지금까지 '평화와 행복한 하느님 나라'를 위한 글이며 오늘의 말씀에 따라 계속 됩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게시글 ; 이집트와 아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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