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7월25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마태오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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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레아 호수에서 어부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다.
그들의 어머니가 지극히 보통 어머니다운 부탁을 예수님께 청한다.
그러자 두 아들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뜻을 드러낸다.
똑 같은 기사를 다루고 있는 마르코 복음에는 이러한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열 제자들이
이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마르코10,41)
처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당신을 따르라 부르셨을 때,
제자들이 응답한 이유는 예수님의 것과는 분명 달랐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이유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면 얻게 될 무엇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그러니, 야고보와 요한 가족이 보인 마음이나,
그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던 다른 제자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제자들 역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힘의 논리에 길들여졌던 사람들이다.
자기들만의 상처를 갖고 있었고, 사람이 만든 높낮이에 둔감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높낮이를 따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는 섬김에 대해 말씀하신다.
당신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섬김이라는 말을 생각해본다.
힘이 없어서 섬기는 입장과 힘이 있음에도 섬길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힘이 없어서 섬기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픈 일이다.
하지만 옳기에, 그래야 하기에 스스로 섬기려는 입장이 되려는 마음은 아름답다.
복음적 섬김이란 굴종이나 비굴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따르는 마음과 행동이다.
굴종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알고, 같은 아픔을 다른 이에게는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다.
힘이 없어 짓밟히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를 헤아릴 수 있기에 스스로 낮아지려는 마음이다.
서로가 섬기려는 마음으로 살 수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 올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그분께서는 말씀하신다.
제자들도 부활과 성령 체험 이후에야 비로소 섬김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고자 했다.
복음적 섬김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우리에게 허락된 만남들 안에 조금씩 실천해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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