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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응답 없는 기도 앞에서
작성자양승국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27 조회수561 추천수12 반대(0) 신고

응답 없는 기도 앞에서

 

많은 신자들이 기도와 관련해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하느님 정말 너무 하십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간절히 기도해왔는데 하느님께서는 끝끝내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요?”

 

신앙의 선조들도 우리와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예언자로서 한평생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었던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청해도 내 기도소리에 귀를 막아 버리시고 내 길에 마름돌로 담을 쌓으시며 내 앞길을 막아 버리셨네.”(애가 38-9)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기로는 시편의 저자도 처지가 비슷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철저하게도 자신을 버리셨다며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저의 하느님, 온종일 외치건만 당신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니 저는 밤에도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시편 2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 한 가지는 우리의 위대한 대 예언자들은 기도의 응답 유무와 상관없이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정성을 다 쏟아가며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도가 지닌 문제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열심히 기도를 바치는 과정에서 자신이 바치고 있는 기도에 대한 정화와 쇄신 작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참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기도에 대한 응답 여부 보다는 하느님과 나 둘 사이에 오고가는 인격적인 만남, 그분과의 진솔한 대화, 일상적인 소통, 그 결과 선물로 다가온 사랑의 삶이 곧 기도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기도하는데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자판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위험스런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때로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때로 한평생에 걸쳐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 앞에 하느님께서는 자주 인간의 사고방식, 논리,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 마다 우리는 청하는 바의 내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하나하나 다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들어주시지만 어떤 것은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에 대한 식별 작업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의 내용, 기도의 질, 기도의 순수성이 진정 그분 마음에 드시는 것들인지 아닌지 성찰하고 식별해가며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와 비례하는 성령의 활동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응답 없는 기도 앞에서 지쳐나가 떨어지곤 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들이 하느님께 간절히 청한 것은 시시한 것, 가벼운 것, 들어주셔도 좋고 안 들어주셔도 좋은 그런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중요한 것들, 때로 살고 죽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잠까지 설쳐가며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간절히 매달렸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사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으며 끝까지 붙들어보려던 관계는 파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깊은 신뢰심을 갖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매달렸으며, “청하여라,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목숨을 다해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무자비하다 못해 참담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며, 하느님이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이시라며 어찌 이리 끔찍한 현실에 맞닥트리게 하시는지, 정말이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것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간절히 청할 것은 하느님의 성령이십니다. 선물 중의 가장 큰 선물,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인 성령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사실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안에 벌어지는 모든 희로애락, 흥망성쇠를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성공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실패도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건강과 젊음에 행복해하지만 언젠가 주실 병고와 죽음도 기꺼이 수용합니다.

 

사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 각자의 영혼 안에 충만히 현존해계십니다. 특별히 삶의 중요한 여러 단계 안에서 더욱 활발히 활동하십니다. 세례성사 때, 견진성사 때, 혼인성사나 신품성사 때... 왜 그럴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런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보통 우리는 평소보다 더 순수해집니다. 평소보다 더 마음을 비웁니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기도합니다. 결국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기도와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영혼 안에 성령께서는 더욱 왕성히 활동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활동은 겸손과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더욱 자신을 낮추고. 더욱 자신을 비우는 영혼 안에 더욱 활발히 활동하십니다. 반대로 자만심, 우월감, 자기중심주의로 가득 찬 영혼 안에 성령의 활동은 미미할 뿐입니다.

 

내 안에 천상 예루살렘을

 

아무리 노력해도 기도가 잘 안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내 안에 그 누군가가 들어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면 내 삶을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떡하니 내 중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내적인 평화나 고요도 기대하기 힘듭니다. 당연히 기도생활이나 영적생활도 지지부진합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노력이 내안에서 를 빨리 쫒아내는 것입니다. 그를 몰아내고 나면 또 다른 가 들어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비운 그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4세기 수도생활의 대가였던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그 자리를 하느님의 처소’ ‘천상 예루살렘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자리는 바로 성령께서 머무시는 공간입니다. 내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 나라, 내 안에 천상 예루살렘을 마련할 때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던 기도들도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조용하신 분이십니다. 미풍처럼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흰 비둘기처럼 가까이 다가오시다가 우리가 움직이면 도망가십니다. 반대로 가만있으면 다가오십니다. 순풍이 불면 노를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 의지하는 사람, 그분께서 활동하시도록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편안히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기도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생활성서 20128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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