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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주어지다 [성령의 임재와 부재]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27 조회수335 추천수1 반대(0) 신고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제1독서 참조>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제2독서 참조>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 1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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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 때문에 원성이 높은 땅을 파멸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 땅의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의인이든 죄인이든 모두 다 쓸어버리고자 하시는 엄한 분이 아니시다는 점을 제 1독서에서 전합니다. 로마서의 말씀을 잠시 들여다 봅니다.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그 크신 자비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니 될 말입니까?그러고도 마음이 완고해서 회개할 생각도 하지 않으니, 이런 자는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 내릴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벌을 쌓아올리고 있는 것입니다.<신약성서 참조>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신약성경 참조>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공정을 실천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게 바로 공정으로 나아갑니다. 의인과 죄인을 차별하지 않는 정의와 불의의 무차별은 공정이 아닙니다. 차별하지 않는 것들이 공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차별하지 않는 무차별은 공정이 아닌 것입니다.공정이란 올바르게 구별하는 것입니다.상기에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인과 죄인을 분명하게 구분짓는다는 뜻입니다.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에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한 쪽으로 치우쳐서 올바르지 못함이 아닌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또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도 하고 준엄하시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여러분에게는 자비로우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비를 저버리지 않을 때에 한한 일이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여러분도 잘려 나갈 것입니다.(11,22 참조)이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준엄'하심의 양대 측면은 하느님께서 공정하게 심판하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느님의 심판에서 하느님의 호의(자비)는 회개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오래 참으시는 하느님의 호의(자비)를 업신여기고 그분의 자비를 저버려서 끝까지 회개를 하지 않는다면, 곧 준엄한 심판으로 이어져 진노를 내리신다 할 것입니다.

공정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용서 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앞서 있습니다>그래서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서 용서를 받게 됩니다. 인간의 용서가 앞서서 하느님의 자비가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하느님의 자비가 먼저 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용서를 청하면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용서를 빈다고 해서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인간의 청함을 들어 주어야 하는, 주인이 아닌 종의 의무가 없습니다.용서를 빌고나서 하루가 지난 다음날 또 다시 불의한 죄악을 행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하는 '용서의 남용'은 하느님의 자비를 저버리고 조롱하는 가증스러운 억지인 것입니다.

회개가 없는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반복되어지는 실수는 진정한 회개에 따라서 이런 실수는 감소되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려는 순종의 덕이 생겨나게 됩니다.이같은 '순종의 덕'에서 아직 미비하여 회개하는 참 마음과 하느님의 명령에 거역하여 후회하는 '용서의 남용'은 엄격하게 다른 양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을 능히 꿰뚫어 보실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공정하심에 따라, 인간의 <살아있는 참 행동과 죽어있는 행동>을 가려내시어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진노하시는 준엄하심'을 나타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롭게 심판하십니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라고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시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하여 무척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인간의 마음 속을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게 하여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사람의 자기 마음을 올바르게 살필 수 있도록 하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참으로 <믿음이 살아있는
>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오직 제 스스로는 하느님의 마음(뜻)을 알지 못하지만, 성령을 통하여서는 하느님의 뜻(마음)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소용이 없습니다.성령께서만 하느님의 영이시기에 하느님의 마음을 아시고 이 성령의 도움으로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살아있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인간의 마음 속을 살피시는 하느님'의 공정하신 심판에서 하느님의 자비에 따라 인간은 참된 회개를 할 수가 있게 되고 또한 참된 행동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살아있는 참된 믿음을 이루게 하는 살아있는 참된 행동은 인간 그 자신의 하느님 마음을 볼 수 있는 능력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가능해 지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율법이 아닌 새로운 하느님의 법(복음)에 순종하면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으로 버려진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며 인간은 성령을 통하여 성자 안에서 삼위 하느님과의 친밀한 친교의 (일치의) 관계를 누릴 수가 있게 되어 집니다. 그런 까닭으로 '성령의 힘'이 없는 곳에는 '사랑의 힘'도 없습니다.성자께서 계신 곳에 성령께서 계시고 성부께로 향합니다. 이는 한결같이 사랑으로 전진한다는 '사랑의 힘'인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사랑의 힘'이 무기력하면, 하느님의 성령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하느님의 성령께서 사시는 사람 자신과 공동체는 '사랑의 힘'에서 결코 무기력하지 않는 법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하느님의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힘으로 '이 사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성령께서 사시는 자기 및 공동체는 '사랑의 힘'에서 무기력하지 않는 법입니다.'가짜 성령'일 경우에
사랑의 지혜(하느님의 힘)를 깨닫지 못하고 사랑의 힘에서 무기력해 진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세속의 지배를 당하며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멀어졌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에게 속이고자 하는 거짓의 유혹은 좀처럼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 모두는 성령의 부재 탓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부재는 성자의 부재입니다.예수님께서 사시지 않는 곳에 성령께서도 사시지 않습니다. [성자의 파견에는 성령의 파견도 동시에 있기 때문입니다.(교리서 참조)]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그런즉 '사랑의 예수님'께서 없는 곳에는 성령께서도 부재하십니다. 더러운 영들이 설치고, 참된 기도 마저도 살아있지 못합니다. 인간의 용서 보다도 앞서신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사랑으로 돌아갈 회개의 때에 이것은 벌써 그리스도의 임재가 됩니다. 예수님 없이 사랑의 힘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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