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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문화사에 따른 전례: 초기 교회에서 사용한 전례 언어와 용기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5-23 조회수7,398 추천수0

[문화사에 따른 전례] 초기 교회에서 사용한 전례 언어와 용기들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언어는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전하는 매개체라 하겠다. 이번에는 전례 언어와 전례에 필요한 각종 용기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5. 전례 언어의 변화

 

3세기 중반까지 로마 인구의 상당수가 그리스어를 사용했거나 적어도 알알들을 수 있었다. 초기 교회 시대에, 로마 거주민은 대부분 중동에서 이주한 자유민이거나 노예였고 소수만이 토박이 로마인이거나 이탈리아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상층 계급을 형성했고 자기들이 그리스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으며 그 우월성을 확신했기에 로마 교회의 전례 또한 그리스어로 거행되었다.

 

4세기 후반 로마 교회의 전례 언어로 자리 잡은 라틴어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례 형태를 우리에게 전해 준 히폴리토의 3세기 문헌 「사도 전승」(Traditio Apostolica)은 그리스어로 작성되었고, 그로부터 150년쯤 뒤인 4세기 후반 로마인 저술가 마리우스 빅토리누스가 로마 미사 전문(감사 기도)의 단편을 자신의 라틴어 저서에 인용하였다.

 

라틴어 본문 중간 미사 전문에 이르렀을 때, 그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리스어로 바꾸어 서술한다(「라틴 교부 문헌」, 8,1094D). 이는 적어도 그 시기에, 미사의 모든 기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미사 전문 만큼은 그리스어로 암송되었거나 낭송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불과 20년 뒤 암브로시아스테르라는 로마인 저술가가 미사 전문의 단편을 다시 인용하였는데, 이번에는 라틴어로 되어 있다(「라틴 교회 저술가 전집」, 50,268).

 

이로써 다마소 1세 교황 시대인 380년 무렵에 라틴어가 로마 미사의 핵심(감사 기도)으로 들어왔으며 그 이전에 이미 말씀 전례와 그 밖의 다른 성사의 전례 언어로 확립되었음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언어의 전환은 기도문에서 전통과 발전의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감사 기도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전환되어 새로운 형태를 갖추게 되었을 때, 전통적 사고 흐름이 보존되는 한편, 라틴어 정신으로 새로이 만들어진 표현들과 이전의 그리스어 관례에서 전해 내려온 표현들이 일부 선택되었다.

 

학자들은 로마 제국에서, 지역별로 시기는 다르지만 전례 언어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3세기 초에 북아프리카 교회는 이미 라틴어를 사용했으며, 4세기 중엽에는 밀라노 교회가 라틴어로 미사 전문을 사용한 흔적이 있고, 마침내 4세기 후반에 와서 로마 교회도 라틴어를 전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6. 그리스도교 사용한 그릇(용기)

 

점점 더 규정화된 그리스도교 전례를 위해 특정한 장소와 음악, 책들이 발전한 것처럼, 그리스도교 특유의 용기들도 발전하였다. 비록 빈약하고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사용한 독특한 빵과 포도주 용기에 대한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사용하는 제병, 성합과 다른 초기 그리스도교의 빵과 빵 그릇

 

당시 동방과 서방 그리스도인들은 성찬례를 거행할 때 그들이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과 같은 빵을 사용하였다. 비록 전통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과 누룩 없는 빵을 나누셨다고 상기시키지만, 세부 사항이 초기 그리스도교 성찬례에 분명한 영향력을 끼치지는 못하여 평소에 먹는 누룩 든 빵을 사용하였다. 빵과 포도주를 통해 자신을 나누셨던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이 전례를 만들었다.

 

그리스도교 성찬례가 발전하면서, 양질의 재료를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빵과 빵 그릇 같은 것의 품질은 지역적인 기호나 사용법에 따라 결정되었다.

 

당시에는 집에서 만든 바구니에 주님의 만찬을 위한 빵을 담은 듯하다. 도기 접시나 사발도 빵을 담는 그릇이었던 같다. 놀랍게도 유리 접시나 얇은 유리 사발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유리는 지중해 연안에서 매우 흔한 물품이었다.

 

고대 세계의 중요한 유리 생산지 두 곳(시리아 –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을 로마 제국이 지배하게 되었을 때(기원전 62년과 30년), 유리 제품은 유리를 생산해 본 적이 없는 로마 제국 전역과 서쪽으로 퍼져 나갔다.

 

3세기 로마 주교였던 제피리노는 성찬례의 빵을 담는 유리그릇에 대한 지침을 공표했다고 전한다. 또한 우르바노 1세는 여러 교회에 은 성반을 기중했다고 알려진다.

 

일찍이 순교자 유스티노는 성찬례의 빵이 부제들을 통해 성찬례에 참석하지 못한 교우들에게 보내졌다고 언급한다(「호교론」 1권, 67,3-5). 이러한 2세기 관습은 리옹의 이레네오가 로마 주교인 빅토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축성된 빵을 옮기는 작은 상자들은 때때로 ‘아르케’(arcae, 라틴어 ‘상자들’) 또는 ‘퓍시스’(pyxis, 희랍어 ‘상자’)로 불렸는데 목에 착용하거나 신자들의 집에 보관하였다. 본디 화장품이나 보석, 다른 귀중품을 담으려고 만들어진 작은 상자들이었다.

 

포도주와 포도주 용기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빵과 포도주로 성찬례를 했다. 빵과 물로 성찬례를 했던 일부 공동체에 대한 증거도 있다. 이러한 ‘유수파’(aquarians)가 물을 사용하는 관습을 따랐던 이유는 가난이나 금욕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떠한 음료도 사용하지 않고 빵만으로 성찬례를 거행했다는 증거도 있다.

 

테르툴리아노는 신약 성경 이후에 성찬례와 관련하여 잔을 언급한 최초의 저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착한 목자’의 이미지로 장식된 성작에 대해 언급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례용 그릇을 만드는 데 귀금속 사용이 늘어났다. 성찬례에서 하나의 잔을 사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잔의 크기는 전례에 모이는 신자들의 수와 비례했다. 신약 성경과 초대 교회 역사의 전문가 조셉 브라운은 당시 성찬례에서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잔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성찬례에서는 당시 가정에서 사용하던 빵과 빵 그릇, 그리고 포도주와 포도주 용기를 사용하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더 값진 재료의 사용이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 시복 미사 때 전례 실무자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0년 5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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