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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29 조회수1,063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whoever believes in me, even if he dies, will live,
and anyone who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Jn.11,25-26)



제1독서 1요한 4,7-16
복음 요한 11,19-27

교구청 사제관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습니다. 우리 교구장 주교님께서 어디에서 두 마리의 강아지를 얻어오셨는데, 함께 지내다보니 너무나 시끄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교관 앞마당에 한 마리, 그리고 교구청 사제관 뒷마당에 한 마리를 나눠서 키우게 되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 신부님들과 산책을 하다가, 이 강아지들이 생각난 것입니다. 서로 같은 배에서 난 강아지이니까 애틋한 마음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제관 뒷마당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데리고 주교관 앞마당에 있는 강아지와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랜만에 만나서 서로 반가워했을까요? 사실 저는 무척이나 반가워 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반갑다고 허를 내밀고 꼬리를 흔드는 장면을 예상했지요. 그러나 저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서 이 둘은 마치 원수를 만난 것처럼 으르렁대며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동물의 세계는 강자들만의 세상이기 때문에, 자기와 같은 혈육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이 무조건 힘으로 군림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약자들도 살 수 있는 세상,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사실을 더욱 더 명확하게 하시기 위해 당신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인간이면서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동물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사랑의 실천에서 멀어지면서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주님을 굳게 믿고 따른다면, 동물의 세계를 지향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창조의 뜻을 적극적으로 따르면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믿고 따르려고 하기에 주님의 뜻을 거부하는 삶인 동물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마르타 성녀의 고백을 항상 마음 안에 간직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 고백이 언제 이루어진 것입니까? 바로 자신의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목격한 뒤에 했던 고백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원망하고 미움을 표시해야 할 순간에 했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이 주어졌을 때 불평불만 속에 빠져 있었던 우리들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믿음인 것이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나를 지켜주시고 늘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영원히 함께 하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진정으로 동문의 세계가 아닌, 하느님의 세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회를 놓치는 이유는 기회라는 것이 대체로 뼈를 깎는 노력이라는 작업복을 입고 오기 떄문이다(에디슨).


빈센조캄피의 마르타. 언제나 분주했던 성녀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바라며...
 

어제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경기를 보다가 프로그램 말미에 ‘백투더퓨쳐’라는 제목이 나오면서 과거 1984년 프로야구에 대한 뉴스가 나오더군요. 1984년도에 중심 현역을 뛰고 있는 젊은 선수들이 지금은 야구 감독 등 지도자의 위치에 있으며, 또 그 중 몇 명은 이미 하늘나라로 간 선수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화면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촌스러운 것입니다. 지나가는 시민들을 인터뷰하는 장면도 나왔는데, 그 사람들 역시 얼마나 촌스러운지요. 얼굴의 반을 가리는 커다란 안경, 파마를 해도 뽀글뽀글한 것이 도저히 봐 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떠했을까요? 저 역시 마찬가지로 이렇게 촌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요. 커다란 잠자리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마르고 시커먼 얼굴은 시골 총각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저 스스로 촌스럽다고 말하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유행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었고, 나름 멋지다고 생각했었겠지요. 그러나 멋 훗날 바라보면 어색하고 촌스러움 그 자체인 것이지요.

지금의 모습이 최고일 리가 없습니다. 과거가 좋았다 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늘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를 내세우는 삶이 아닌,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내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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