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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7-31 조회수960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7월 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treasure buried in a field,
which a person finds and hides again,
and out of joy goes and sells all that he has and buys that field.
(Mt.13,44)



제1독서 탈출 34,29-35
복음 마태 13,44-46

어제 서른여덟이라는 짧은 삶을 뒤로 하고 주님 곁으로 가버린 한 자매의 장례미사에 다녀왔습니다. 이 자매는 저와 함께 몇 해 전에 청년성서모임 봉사를 했었지요. 정말로 열심히 봉사를 했고, 그 후에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병으로 인해 허망하게 남편과 자식을 이 세상에 두고 혼자서만 주님의 곁으로 가고 만 것입니다.

아무리 죽는 데에는 순서가 없다고 하지만, 서럽게 울고 있는 남편과 그 가족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모르는지 이상하다는 듯이 주변만 둘러보는 어린 딸아이를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더군요. 이렇게 아쉬움과 슬픔을 느끼면서 장례미사를 봉헌하는데 문득 이 죽음이란 것이 분명히 내 차례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그 전까지는 죽음이 단지 하나의 이론처럼만 생각되었는데 피부로 와 닿는 실제의 일이며, 또한 남 일이 아닌 앞으로 반드시 닥칠 나의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다가올 이 죽음을 위해 늘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모든 것을 걸면서 힘들게 살아갑니다. 지금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과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별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 헛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겠지요. 오늘 복음의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밭을 사는 사람처럼, 또 좋은 진주를 발견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처분해서 사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보물이 아닌 쓰레기라면 그리고 좋은 진주가 아니라 가짜 진주라면 어떨까요? 쓰레기와 가짜 진주인데도 자신의 모든 것을 처분해서 구입하려 한다면 크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이지요.

명품이라는 물건들에는 비슷한 짝퉁 물건들이 꼭 있습니다. 정말로 비슷합니다. 아니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아주 똑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값어치는 어떻습니까? 아주 똑같아 보여도 그 가치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명품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망신을 당하기도 하지요.

가장 중요한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 전체를 내어 놓아서 완성시키셨던 사랑, 이 사랑을 위해 우리 역시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명품인 진짜 보물이며 가장 좋은 진주인데, 우리들은 겉으로만 화려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짝퉁만을 쫓습니다.

먼 훗날 하느님 나라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에게 정말로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을 쫓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위해 처음이 존재한다(로버트 브라우닝).


오늘 축일인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



감시자의 역할은 내려놓으세요.
 

몇 년 전, 제가 갑곶성지에서 생활할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성지를 막 시작할 때였기 때문에, 바깥일들이 정말로 많았지요. 그날도 성지 주변을 꾸미고 있었는데 아주 우연히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는 할미꽃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기도 했지만 정말로 예쁘더군요. 그리고 이때 야생화가 화려함은 없지만 은은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야생화의 은은한 아름다움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졌고, 야생화 보는 재미를 흠뻑 느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순례객들이 오셔서 야생화가 예쁘다면서 뽑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할미꽃이 신경통에 좋다면서 뽑아 가시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에 저의 감시자의 역할이 시작되었습니다. 함께 그 아름다움을 즐기면 좋을 것 같은데, 자기만을 위해서 뽑아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때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에는 야생화를 보면서 기뻐하면서 즐겼던 것 같은데, 이때부터는 누가 뽑아가지 않나 하면서 감시만 하는 것입니다. 꽃 그 자체를 보지 못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감시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꺾어가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의 일만을 묵묵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비로소 다시 아름다운 꽃이 보이더군요.

이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람 역시 소유하려 하고 감시하려 할 때 그 본연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에서는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 본연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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