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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곳간 속의 벌레 [존재적 의미]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01 조회수418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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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마태오 , 루카>



예수님께서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나무에 달린 열매가 있습니다.열매에는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가 있습니다.좋은 열매는 좋은 나무에서 열리고, 나쁜 열매는 나쁜 나무에서 열린다 하십니다. 너무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자신에게 좋은 열매가 있는지요.그렇다면 그 자신은 좋은 나무와 같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 좋은 열매가 있는지요.그것은 그 공동체가 좋은 나무와 같아서 입니다.그런데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이 있다면 역시 좋은 나무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여느 열매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속은 썩었습니다.벌레들이 좋은 열매로 열리게 하지 않은 탓입니다.벌레가 열매를 갉아먹는 나무는 좋은 나무가 아닌 것입니다.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으로 썩는 나쁜 열매는 나쁜 나무에서 열리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남들에게는 이를 감추고 속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쁜 나무가 결코 좋은 나무가 되지는 않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나무로 가꾸려고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좋은나무가 되어서 좋은 열매를 열리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마음이야 늘 하고 싶지만 몸이 따르지 못합니다. 

육적인 감흥에 맛들이면 영적으로 나태해져 몸이 둔해 집니다. 그리하여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마음과 몸이 일치했다면 몸과 마음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는 게 분명합니다. 버려진 이들의 고통에 결합하는 '그리스도의 고통' (사랑의 고통)과 일치되지 못하면 몸과 마음은 썩어지기 마련입니다.

썩어가는 나무에서는 벌레들이 악한 짓을 하여도 털어내지 못합니다. '한 통속'이 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나태해 지면, 벌레를 볼 수가 없고 악한 짓들도 분별 (식별)해 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몸과 마음이 멀어지고 요행만을 살피게 되어집니다. 너무나도 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를 깨우치지 못한다는 점에 늘 심각성이 따릅니다. 

자기 (공동체) 나무에서 제 열매를 썩게 하는 벌레와 타협하여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의 거친 삯꾼들과 '한 통속'이 되어지면 나무는 결코 깨울 칠 수 없습니다.현실에 적응되어 점점 죽어가는 자기 나무를 가꾸지 못하게 되는 법입니다. 깨우치는게 가장 우선적인 문제입니다.

깨우칠려면 그리스도의 고통에 일치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버려진 이들 때문에 자기 (공동체) 자신들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고통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버려진 이들의 고통에 결합하지 못하고 육적인 감흥에 맛들여 살면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벌레들과 한 통속이 되어져서 제 존재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가까울수록 예수님과 일치하게 되고 영적으로 깨어나게 됩니다.그러면 벌레를 볼 수 있고 좋은 열매를 위해 벌레를 털어낼 수 있습니다. 이때, '한 통속'이 될 수 없습니다.그러면 좋은 나무로 가꾸어 집니다. 굳이 속이고 감추고자 하는 요행들은 없어지며 몸과 마음은 가까와 집니다. '사랑의 힘'에 무기력해 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예수님의 힘)에서 무기력해 질때 다른 곳에서 가치 의미를 찾고자 하는 헛된 욕망이 생기는 법입니다. 사랑은 힘들며 고생하고 고난을 겪는 것인데, 이것을 회피하고자 딴 마음을 가지게 되고, '딴 마음'에서 움직이는 몸은 육적인 감흥에 맛들여져 가는 것입니다.이렇게 되면서 부터 예수님은 자기 안에 혹은 공동체 안에 사시지(머무르시지)않게 됩니다.  

버려진 이들의 고통과 함께 동행하려는 십자가를 피해서 달아나는 제자들에게는 깨우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자기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까닭에 성령의 부재와 예수님의 가르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몸에는 어린 양들의 체취가 배어 있어야 함에도, 돈의 힘과 불완전한 규정들 및 방침들의 힘, 또한 거친 삯꾼들의 악한 짓들의 힘이 옷에 물들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틀림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마태오, 루카)
악한 자를 털어내지 못함은 그 나무가 나쁜 나무인 까닭에 있습니다.나쁜 나무가 악한 것을 내놓는다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의 고통에 일치하면 결코 악한 것들을 제 나무에서 내놓지 못합니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하시는데 나쁜 것들과 '한 통속'이 되어지면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하늘 나라의 제자'와 반대입니다.악한 자들과 '한 통속'으로 타락해 버린 제자들은 버려진 이들 안에서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일치하여 자기 존재의 가치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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