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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깨어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작성자전삼용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10 조회수772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연중 제19주일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복음: 루카 12,32-48






 그리스도의 성면


 키예프 화파 작


     < 내가 깨어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요즘 난리인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입니다. 혹시 보지 못하신 분들은 줄거리가 나오니 계속 읽을 것인지는 지금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엔 빙하기가 찾아왔습니다. 오직 달리는 기차 안에 탄 사람들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기차는 이 세상의 작은 축소판입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아는 자와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야 하는 자들.

그런데 이 자리를 박차고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잘 먹는 세상을 위해 일어선 자가 있는데 그 이름이 커티스라고 하는 주인공입니다. 커티스는 반란을 일으켜 계속 앞으로 앞으로 전진합니다. 전진할수록 자신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어떤 때는 대의를 위해 동료들의 희생을 감수해야만합니다. 그러나 맨 앞 칸에 다다라서 커티스가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과 허무함입니다.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자신의 동료들도 없습니다. 반란의 종착지란 것이 결국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전부입니다.

마치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동화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모두가 향하는 정상을 향해 올라갔을 때 그 꼭대기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만 바라보지 말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습니다.

커티스가 이렇게 앞으로 달리기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가 살았던 꼬리칸엔 창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경주마가 옆을 보지 못하고 앞만 보도록 눈 옆에 가리개를 한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옆을 보지 않고 앞만 보는 것이 실제로는 깨어있지 못한 이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깨어있는 인물로 남궁민수(송강호)를 내세웁니다. 그는 공업용 인화물질로 만든 크로놀이라는 환각제에 중독된 인물이고 오직 그것을 얻기 위해 문을 열어는 주지만 커티스의 반란엔 큰 의미를 두지는 않습니다. 기차에서 태어난 딸 요나에게 바깥세상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는 약물 중독자가 아니었습니다. 몇 년 동안 바깥을 바라보면서 눈이 조금씩 녹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일한 사람입니다. 사실은 커티스보다 수백 배는 더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세상 전부가 거짓임을 알아차린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볼 줄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 커티스는 깨어있는 인물인 줄 알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목적만을 향해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돌진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송강호가 열고 싶었던 것은 앞으로 향하는 문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이 다 벽으로 알아 열 생각조차 하지 않는 기차 밖으로 향하는 문이었습니다. 그가 찾던 것, 그것은 환각제가 아니었고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는 폭탄이었던 것입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송강호가 찾고 있었던 크로놀은 우리가 영하는 성체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깥사람들이 볼 때 어쩌면 우리가 영하는 성체도 하나의 환각제일 수 있습니다. 출세와 목표지향적인 세상에는 무관심하고 성체만 받기 위해 성당에 모입니다. 또 성체를 모시기 위해 이 세상의 굴레에 협력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유일한 관심사는 그 성체를 통해 이 세상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교육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

과연 우리는 우리민족의 번영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는가? 세상은 우리 각자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도,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하라고도, 혹은 큰 정치인이 되어 나라를 바꾸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목표를 향해 내달립니다. 마치 그것이 삶의 의미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느낍니다. 목표에 다다를수록 더 외로워지고 더 공허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겉보기는 커티스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표를 위해 자신들이 희생을 당하는 것을 알면서는 그를 따르기를 주저합니다. 반면 송강호는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는 환각제나 복용하고 세상을 정복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한심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에겐 더 큰 이상이 있었습니다. 딸 요나가 땅을 밟고 살아가게 해 주고 싶다는 꿈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여기더라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스럽게 자신을 믿어주는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삶은 점점 더 외로워지는 삶이고, 깨어있는 삶은 점점 더 외롭지 않은 삶입니다.

 

오른 예수님은 깨어있음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깨어있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들만 아는 사람들입니다. 즉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하인들을 못살게 굴고 먹고 마시는 인물들인 것입니다. 즉 남들을 제물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다. 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남을 제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커티스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엔 유다가 그렇습니다. 그는 목적을 위해 예수님까지도 희생시킵니다. 주위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다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다가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자 그가 죽던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결국 혼자 남겨져 자살하고 맙니다.

반면 예수님은 깨어있는 분이셨습니다. 모든 이들이 다 당신을 떠나도 당신은 외롭지 않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위해 당신 자신이 제물이 되십니다. 내가 제물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깨어있는 사람은 유다처럼 남을 제물로 삼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제물이 되어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송강호는 영화에서 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칩니다. 그렇기에 외롭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깨어있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뜻을 위해 남을 제물로 삼는 사람이고, 결국 그래서 외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은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자신을 위해 희생시키는 악순환을 계속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끝에 다다랐을 때는 영화에서 커티스가 느끼는 공허감과 비슷한 허탈감으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공사 중인 고층빌딩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 공사가 중지됐다는 뉴스를 최근에 보았습니다.

스페인 베니돔에 건설 중인 47층 높이 고층빌딩에 엘리베이터를 설계하지 않은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스페인 매체 에코노미아가 최근 보도했습니다.

이 건물은 유럽의 경제위기를 맞이해 희망과 번영을 상징하도록 디자인됐습니다. 처음에는 20층 높이의 건물을 설계하고 건설을 시작했지만 개발자가 욕심을 부려 47269개의 방으로 변경해 공사를 계속했습니다.

최초의 설계에서는 20층 건물에 적절한 크기의 엘리베이터가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높은 건물로 바꾸며 엘리베이터를 추가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공간을 확보하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갑자기 변경된 계획으로 인해 비용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이 건물의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는 사임했으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 중이라고 합니다.

[참조: 정선미, 공사중인 47층 빌딩에 엘리베이터가 없네건축가 사임, 나우뉴스, 2013.8.9]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무언가는 열심히 하고 있지만 또 무언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란 되 돌이킬 수 없는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너무 바쁘게만 살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창밖도 좀 내다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앞으로만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눈이 멀쩡했을 때는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지만 눈을 잃고 났을 때 비로소 잠에서 깨어 하느님의 뜻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오히려 우리 눈을 멀게 해서 다른 것은 바라볼 수 없도록 정신을 빼 놓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어디 두었는지 모르는 때가 가끔 있는데 그것은 그 물건을 둘 때 다른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정신없이 살게 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공허한 굴레에서 벗어납시다. 앞만 보지 말고 창문 밖으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만 얼마라도 꼭 시간을 내서 바라보며 살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ca-o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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