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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화방송 성서백주간2 탈출기 5강 전체 강의록과 사랑결 공동체 정미카엘라 자매님 강의록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13 조회수618 추천수0 반대(0) 신고

5강 전체의 강의록이므로 상당히 분량이 많음을 먼저 알려 드립니다.

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의 성서백주간 2
 

제5회 모세의 탄생과 위기 그리고 구출/ 탈출 2,1-10

 

안녕하십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저희 백주간 가족이 한 분 있습니다.

사랑결 공동체의 정미카엘라 자매님이라는 분인데요. 사랑결 공동체는

서울대교구의 시각장애인들이 이루는 그런 공동체이고 정식 성당으로서

자리잡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이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몇년 전인데요. 오늘이 좋은 기회일 것

같아서 조금 말씀을 부탁을 드렸고 쾌히 승락을 해 주셨어요. 본래는 학교

교사를 하시면서 정상적으로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하시고 또 백주간 가족

이었는데 성경 공부를 하시고 그러는 어느날 병원으로부터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그런 판정을 받으셨어요.

 

그런데도 하느님 말씀 안에서 용기를 얻으시고 또 그 안에서 계속해서

기도하시며 어떤 자신에게 일어난 그런 불행을 오히려 반대로 불행을

넘어스셔서 세상의 어떤 신앙인으로서 어떤 희망을 나눌 수 있는 어떤

자매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그냥 제 머리에서 나오는 강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여러분들에게 나눠 주십사하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찬미예수님! 반갑습니다.

지금 신부님으로부터 너무나 과찬의 소개를 받은 저는 사랑결 공동체

정식 명칭은 성라파엘 사랑결 준본당 정혜경 미카엘라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많이 혼자 기도해 보면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시력을 잃어가는 도중에 백주간을

만났고 또 백주간을 하면서 하느님 말씀만이 저를 살릴 수 있다는 명약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백주간 가족으로서 정말 하느님 말씀에 온전히 의지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체험 하면서 이 자리까지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제가 무엇을 이루어서 이렇게 이 자리에 선 것은 아니고 다

같은 백주간 가족임을 제가 알기에, 오늘 너무 좋은 계절이잖아요. 지금 가을.

10월, 1년 중 가장 좋은 때인데 이 자리에 여러분들 함께 하는 이유는

분명히 하느님 말씀이 명약임을 여러분들 이해하시고 계시고 저하고 함께

여러분도 행복하시고 저도 행복한 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기에 이 자리에

이렇게 섰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보시기에 어떨지 모르겠는데

오늘 아침에 나오면서 무척 신경 썼거든요. ^^*~~~

왜냐하면 제 의지대로 되는 게 없어요. 그래서 저를 도와주시는 , 제가 눈을

못보면서 하나 굉장히 호사를 누리는 부분은요. 아, 제 코디가 있어요.^^*~~~

 

아마 눈을 보았으면...뭐 행운이랄까요? 그런 경우는 없었겠지요.

제 마음대로 살고 하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누가 저를 거둬주지 않으면 제가

이렇게 서서 한발자욱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고 또 제 의지대로  무엇을

할 수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저의 그런면

받으시고 아마 지금 제가 제 모습을 보지 못해도 아, 좋은 모습으로 꾸며

주셨으리라고 믿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 최승정 신부님도 제가 시력이 있을 때에 신부님을 만나 뵐 일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겠어요? 그런데 화면으로만 뵙고 이렇게 뵈면서 이렇게 못보고

처음 만나게 됐어요. 그런데 아마도 제일 아쉬운 것은 최 신부님의  여러분을  

향한 눈빛, 눈길을... 그윽한 눈길을 볼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웠어요.

 

그런데 또 가장 큰 장점은 제 기억 속에 한 10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 아마

제가 가는 날까지도 그 모습 그대로 기억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강의 시간이 굉장히 중요한 강의 시간인데 제가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또 아침 기도를 드리면서 생각한 것이 에페소서 2,8-9의 말씀을 기도로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것은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고 인간의 행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좀 했다고 얘기할 때 저를 드러내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그 기도를

드리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여러분, 저는 한 10년 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2002년도에 저는 세례를 받았고 아주 오래된 모태 신앙을 가진 신자라든지

그런 사람도 못됩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으면서 예비자 교리를 받는 중에 저는 실명을 할 것이라는

아주 어마어마한 선고를 받았어요. 보통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표현을

했느냐하면, "야, 너는 성당을 잘못 간거야, 하느님을 잘못 만난 거야."라고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 때 제가 느꼈던 것이 뭐였냐하면, 하느님께 그때부터도 감사를

드리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만약에 하느님을 몰라서 신자 교리를

받지 않는 기간이었으면 저는 아마 어떤 걸 선택했을까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아, 이렇게 내가 실명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불러 주셨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그때부터 우리가 말하는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됐어요.

 

병원을 가도 저에게는 약이 없었어요. 희귀성 난치병. 망막이 먼저 죽어가는

그 병이었기 때문에 제일 괴로웠던 것은 진행성. 이 말이 전한테는 굉장히

아킬레스였어요. 왜냐하면 진행이라는 것은 어느날 아침에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점점 어두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한달 전에 장롱에 있었던

물건이 보이다가 한달 후 쯤인데 그게 안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아들의 눈까지 보이다가 그 다음엔 눈이 안 보이는 거예요.

점점 점점 점점... 그러면서 시작한 것이 백주간 성서공부였습니다.

백주간을 만나고 묵상을 하면서 저는 병원치료, 그리고 약이 없는 그 병에

대해서 하느님께 구하기 시작했고 그 말씀 안에서 진정한 보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찾으면서 느꼈던 것은 아, 이 안에서 제가 보물을 찾고 이 안에서 사는

것만이 바로 기쁨이라는 것. 그러면서 1베드 4,12의 말씀을 저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 말씀 믿으시죠? 저는 그 말씀을 제 말씀으로 붙잡았습니다.

놀랄일이 아니구나! 그때 생각한 게 백주간의 하느님 말씀 안에서 무엇을

들었느냐 하면, 제게 들려 주셨던 말씀은 "아. 죽음이 아니라 사는 것은

조금 힘들겠구나. 그런데 하느님은 언제나 저를 사랑하시는 분이니 저를

내치시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었어요.

 

그때부터 시작한 것이 재활입니다. 재활을 해서 지금은 성경  공부를 해도

점자를 보고 다 할 수가 있습니다. 있는데 그 당시 성서 백주간 3년 5개월

내지 6개월 제가 했던 거 같애요. 하면서  글씨를 처음에는 프러스 펜이라고

있지요? 그걸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한 3개월 지나서 유성 매직으로 필기를 시작했어요. 유성 매직이

또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그 다음에 매직 펜으로 노트를 정리해 가면서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그게 지금 남아 있는 20권 가량 되는 제 성서 백주간을

하는 동안에 제가 기도하고 묵상해 놓은 노트가 있어요.

 

그리고 또 성경책도 너무 글씨가 작아서 그것을 볼 때마다 아, 성경을 보면서

정말 너무 답답한 거예요.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돋보기, 또 저시력

확대기까지. 또 글씨가 날아가지 않게 제가 잡으려고 또 각도기까지  이용해서

세개를 놓고 글씨를 보면서 성경을 보았던 그 기억들이 지금도 제 마음 안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들 지금 다 보이시죠? 그죠? 나이가 들면 눈은 침침해지기 마련이예요.

그렇죠? 예, 50대나 40대 후반 정도 되면 누구나 눈은 어두워지는데 저에게는

그것이 조금 빨리 찾아왔다 생각하고 그래도 하느님은 저와 함께 계시면서

그 즐거움을 놓치지 않게 해 주셨어요.

 

제 안에 기쁨이 사라지지 않게 해 주셨고, 또 그때 읽었던 말씀이 이사 55,9에는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고 하셨어요. 어찌 우리가 하느님의 생각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때 성서 백주간을 마치고 간 곳이 사랑결 공동체입니다.

제가 지금 사는 곳은 고양시 일산 백석에 살고 있습니다. 사랑결 공동체까지는

우리 표현으로 하면 백리 길입니다. 백리 길. 45Km. 굉장히 먼 길이었어요.

 

그런데 그 길을 거침없이 제가 그곳을 찾아간 이유는 그곳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는 것이 제 나머지 삶의 그리고 또 그분들과 함께 하는 것이 마땅히

가톨릭 시각 장애인으로서 맞는 일이다 생각해서 저는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 찾아 가서 지금 현재 있는 한 200명 정도 가량 되는 주일 미사 신자들이

함께 합니다. 그리고 30% 정도의 비신자, 그리고 비장애 봉사자들이 함께

하면서 정말 아름다운 주일, 뜻깊은 주일을 함께 누리고 있어요.

 

처음에 갈 때는 본당으로 신설이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시각 장애인 선교회로

시작을 해서 제가 지금 그곳을 가기 시작한지 5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그 시작한 동안 그분들과 함께 하면서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기쁨과

즐거움을 꺼지지 않게 하시는 하느님, 그 사랑 안에서 이렇게 이 자리까지

와 있습니다.

 

아, 여러분 하느님 말씀 봉사자로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함께 하시나요?

제가 드릴 수 있는 지금의 이 모습 이대로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기쁨을 드릴 지 제가 그 생각을 해 봤습니다.

 

오늘 이 귀한 시간 이 자리에 저를 불러주신 이유는, 하느님께서 정말 특별히

저에게 주신 엄청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또 우리 신부님,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신 이 사랑에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제가 하나 건의를 드릴께요. 제가 집에서 연습을 하고 나왔는데

이거 부르는 동안 시간이 한 3분 걸릴거예요. 성가 22번 다 아시죠?

천지 생기기전... 우리 다 함께 성가 부르며 마치겠습니다.

 

※ 성라파엘 사랑결 준본당

한국 교회 최초 시각장애인 본당. 1979년 발족한 가톨릭 시각장애인 선교회가

성장해 2011년 2월 준본당으로 신설되면서 시각장애인 신앙공동체의 중심이

되고 있다. 본당 신자들은 각종 신심단체 활동과 성지순례, 성경공부 등으로

복음화에 힘쓰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도움 없이는 장거리 이동이 어려운데도

서울을 비롯해 의정부, 일산, 성남 등 수도권 지역에서도 서울 개포동에 위치한

이곳으로 모인다.

 

현재 본당은 인근 지역의 한 시설 지하 강당을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했지만, 공간을 빌려 쓰는 처지라

제대로 된 제대나 감실도 마련하지 못했다.

 

*도움 주실 곳: 070- 4663- 1547

 

- 성가찬미-

 

너무 좋습니다. 제가 이 시간 빌어서 늘 못보거나 또 다리를 못쓰거나하는

장애인들, 또 눈을 뜨고 있지만 영적으로 많은 장애를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종교는 나누고 우리가 함께 하느님 말씀을 함께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어떤 선택이 아니고 사명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제 이 아주 부족하기 그지 없는 이 자리이기는 하지만 제 모습을 보고

많은 분들이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되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 그리고 그 소망으로 기도 올립니다. 여러분 모두 사랑합니다.

그리고 성서백주간 너무나 사랑합니다. 또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예, 저희 본당에 오셔서 한번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 말씀이 저한테는 제일

기억에 남는 거 같애요.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말씀이셨는데 마지막 부분에

"정말로 삶이 힘들고 정말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은 분들도 계실텐데 저를

보시면서 희망을 놓지 마십시오."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에 남는 거

같습니다.

 

아무튼 그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공동체가 얼마전에 생겼습니다. 본당 신부님도

있고, 그리고 시각장애인들은 일반 건물들 같은 경우에는 조금 신앙생활 하기가

어렵겠지요? 그래서 시각장애인들이 잘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그런 건물을 마련

하는 거 같애요. 그래서 지금 많은 어떤 성전 건축을 위한 모금을 하고 있는데

백주간 가족들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하는 당부의 말씀을 드리겠구요.

 

※ 도움 주실 곳

국민은행 207301-04-056841 예금주: 천주교유지재단 시각장애인 성당

전화번호: 070-4663-1547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성전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또 그렇게 희망을 잃지 않는 장애인들의 삶을 저희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저희도 역시 하느님을 향한 그런 희망을 놓지 않는 그런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 했으면 합니다.

 

예, 탈출기 2,1-10이 이번 시간에 함께 다루게 될 페리코페입니다.

탈출 2,1-10: 모세의 탄생과 위기 그리고 구출

 

예,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위대한 인물들 또는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

출생부터 조금 남다르게 시작합니다. 저희들이 옛날에 위인전 읽어보면

어떻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조금 뭔가 달랐다. 예수님 이야기도 태어날 때부터

달랐다. 뭐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구약에서는 모세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탄생, 그 다음에 아기 모세가 겪는 위기, 그리고 그에 대한

구출의 이야기는 완전히 독립적인 이야기일까, 아니면 다른 문학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을 조금 갔다가 끌어 온 이야기일까? 뭐 이런 생각을 저희들이

질문을 좀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몇몇 학자들은 고대의 이야기 중에서 아시리아의 제왕 중에 하나였던 사르곤

2세의 탄생 이야기가 이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마는 그 내용을

직접적으로 읽어보면 여러가지 공통적인 요소들은 있지마는 전체적인 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그리고 현저한 차이점을 보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그

두 이야기가 겹치는 그런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들을 꼭 문학적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다라고   보기는 좀 어렵고 많은 그런 영웅들이 이야기 가운데에서

겹치는 그런 일반적인 몇 가지의 요소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라는 그런 입장을

보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 고대의 어떤 이야기들과 비슷한

흐름 안에 영웅들의 탄생 이야기와 비슷한 흐름 안에 있지마는 하지만 어떤

거를 끌어 온 거는 아니라는 정도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1절에서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1절: 레위 집안의 어떤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따라서 태어나는 아기는 당연히 레위 집안입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자마는

지금까지 이름이 밝혀진 거는 두 산파 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아빠 이름도

엄마 이름도 모릅니다. 나중에 탈출 6,20에 가면은

 

               탈출 6,20

레위 ㅡ 크핫 ㅡ 아므람

 

"아므람은 자기의 고모 요케벳을 아내로 맞아 들였는데, 이 여인이 그에게

아론과 모세를 낳아 주었다. 아므람이 산 햇수는 백삼십칠 년이다."

 

이게 우리 관습에서는 조금 이해가 안 되는 거지요? 어떻게 고모랑?

이게 유다 관습에서는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게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세 때까지도 허용됐던.

유다교 안에서는 오히려 삼촌과 조카의 결혼을 이상적인 결혼으로 본.

아주 괜찮은 방식이다라고 .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은 옛날에 8살 차이나 6살 차이가 뭐 제일 좋다고 하는

그런 거와 비슷하게 이상적인 결혼의 형태로 봤습니다. 하지만 뭐 삼촌과 조카가

가능하다면 그것도 뭐 불가능한 경우는 아니죠. 우리도 옛날 경우에는 그런

경우도 있었잖아요. 삼촌이 조카보다 나이가 어린 경우가 있었잖아요.

 

따라서 고모가 조카보다 나이가 어린 경우로 생각하고 그렇다면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오늘날 현재의 우리나라 풍습으로 보면은

젊은 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상황인 거 같애요.

 

아무튼 레위의 손자 아므람이 자신의 고모 요케벳을 맞아 아론과 모세를

낳습니다. 2절에서 태어나는 아기는 모세입니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달 동안

그를 숨겨 길렀다."라고 얘기합니다. 모세는 마치 여기서 첫 아들처럼 묘사가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은, 탈출 2,4을 보면 누이가 한명 등장하고 4,14을

보면 형이 하나 등장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이름도 알고 있지요? 아론, 미르얌, 뭐 이런 이름도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탈출 7,7을 보면은 상당히 정확한 정보가 나옵니다.

탈출 7,7: 그들이 파라오에게 말할 때, 모세는 여든 살, 아론은 여든세 살이었다.

 

첫 번째 파라오에게 찾아갑니다. 모세는 여든 살, 아론은 여든세 살이었다.

따라서 나이가 세살 차이가 나는 겁니다. 모세가 40년을 이집트에서 살다가

40년을 미디안에서 살다가 이제 돌아와서 파라오에게  갔으니까 80세가

되는 거고, 아론은 83세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모세의 부모와 형제들에 대해서 저희가 탈출기의 다른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정보들은 일체 생략하고 모든 관심을 아기 모세에게 집중시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아기가 태어났는데 사실은 여기에서는 아기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조차도 나중에 나오는 거예요.

 

2절에서 보면은 "그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고"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잘생기고 볼 일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잘생겼다라는 것은 물론 잘생긴 거예요. 그런데 그때 쓰인 히브리 말 단어는

'토웁'이라는 단어입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굿(good)과 같은 의미입니다.

'좋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 그때  '토웁'이라는

말을 씁니다.

 

히브리 말 인사 중에 '모께르 토웁' 그러면 굿 데이 뭐 이런 거 , 굿 이브닝

좋은 저녁 할려면 '라일라 토웁' 뭐 이렇게 항상 좋다는 표현을 씁니다.

좋다. 아름답다. 따라서 그냥 저는 우리 말로 직역해도 좋았을 거 같애요.

'그 아이를 보니 좋았다.' 마치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나서 보시니

좋았던 것처럼 그 아이도 좋았다라는 그런 표현입니다.

 

따라서 그 아이의 어머니는 본래대로 하면은 이집트인들에 의해서 아이는

강물에 던져져 죽게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를 숨겨 기르게 됩니다.

그래서 3절, "그러다 더 숨겨 둘 수가 없게 되자."

석달 이상이 되면은? 이게 무슨 소리죠? 석달 이상이 되면은 아이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건가요? 제가 정말 경험이 없어서 여쭈어 보는 건데 대개 얼마가

되면은 걷습니까? ^^*~~~ 돌은 지나야 되지요? 저도 석달은 좀  짧다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석달 정도 되면 기어서 움직이는. 5개월 뒤에나 기어요?

모세는 석달째부터 기었을 거 같애요.^^*~~~

아무튼 더 이상 숨겨 둘 수가 없게 되자 어머니는 왕골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두게 됩니다.

 

여기서 왕골상자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히브리 말로는 '테바'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히브리 말 '테바'가 이미 창세기에서 한번 등장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지요? 그 방주를 히브리 말로 '테바'라고 합니다. 따라서 테바라는

것은 뭐냐하면 사각형으로 된 상자 같은 거예요.

 

그런데 잘 막아서 물에는 뜨고 속은 비어 있는 노아의 방주나 모세를 구한

왕골 상자나 똑같은 그런 상자 모양인 겁니다. 똑같은 단어입니다. 따라서

우리 식으로 그냥 조금은 좀 무식하게 번역을 하자며는 방주를 가져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뉘어 갈대 사이에 놓아 두었다.

이렇게 무식하게 번역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왕골 상자라고 얘기하는데 여러분들 방주는 뭘로 만드는지

기억하십니까? 나무인데 어떤 나무인지 기억하십니까? 성경에는 전나무라고

나옵니다. 번역에는. 그런데 히브리 말로는 고퍼라는 나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말로 고퍼라는 게 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고퍼나무라고

외국 성경에는 많이 했고, 외국 사람들도 그렇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렇고

당시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아마 전나무가 많이 있었으니까 이런 나무

이름으로 같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전나무라고 번역을 합니다만 하지만

유래를 알 수 없는 고퍼나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왕골 상자의 왕골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서상의 식물입니다.

뭐냐하면 파피루스입니다.  파피루스가 원래 식물이잖아요. 그걸 가지고 이렇게

테바를 만든  겁니다. 상자를 만든 거예요. 그리고 역청과 송진을 발라서 그거를

전체적으로 물에 뜰 수 있도록.

 

따라서 노아도 모세도 모두 위험은 그겁니다. 물에 가라 앉아서 죽는 거.

그런데 하느님의 뭐 그런 예고를 받아서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모세의 어머니는

그런 왕골 상자를 만들어서 그를 죽음에서 구했다. 그런 방주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기능에 있어서 공통점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 상자는 역시 강가 갈대 숲속에 '쑵'이리고 히브리 말로 씁니다.

나중에 갈대바다라고 할 때도 '얌쑵'그럽니다. '수프(쑵)'그러면 갈대입니다.

그런 갈대 사이에 놓이게 되는데 이는 탈출기 13,18부터 등장하는 갈대바다를

미리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나중에 갈대 바다라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죠.

 

정식으로 얘기하면은 사실은 갈대바다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갈대의 얌'이라는 말이 히브리 말로 바다라는 뜻도 있고 호수라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물이 많이 있으면 그게 얌이예요.

그러니까 갈대가 있는 물이 많은 곳입니다.

 

제가 왜 이 설명을 드리느냐하면 여러분들 바닷가에 갈대가 있는 거 보셨습니까?

아니예요. 짠물에는 그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얌 수프' 이것이

약간 갈대 호수라고 우리가 봐야 되는 게 아닌가? 바다에 무슨 갈대가 있나?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게 좀 번역이 맞는 건가? 뭐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더욱이 재미있는 것은 뭐냐하면 정작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너는 고 쳅터

(chapter, 장)에 가서는 갈대바다라는 말이 안 등장합니다. 그냥 바다라는,

아니면 호수라는, 얌이라는 말만 등장하지 갈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나중에 그 부분에 가면 다시 한번 자세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4절에서 아기의 안전을 위해서 아기의 누이는 아기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5절 파라오의 딸이 등장합니다. 그녀의 이름도 역시 거론되지 않습니다.

다수의 주석가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압박했던 것으로 미루어지는 파라오는

이집트의 19왕조의 람세스 2세를 추측하는데 이집트의 역사 기록은 그의

딸만 59명이었다고 기록합니다. ^^*~~~ 부인들이 많으니까.

한 사람이 59명을 낳은 것이 아니라.^^*~~~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제가 신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이 부분을 강의를 하는데

학생들에게 언제든지 질문하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많이 질문한 학생에게 좀

좋은 점수를 줍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하는 질문이 대게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질문인데 이 질문만큼은 제가 대답을 못했어요.

 

이 대목을 설명하는데 갑자기 어떤 친구가 손을 번쩍 들었어요. 그래서

"너 얘기해 봐라." 그랬더니 "파라오의 딸이 , 그러니까 공주가 왜 강가에서

목욕을 했을까요?^^*~~~ 그래서 제가 "글쎄 그건 참 이상하다. 나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59명 정도 되면은 ^^*~~~

좀 왕궁에서 좁지 않았겠는가? 그러니까 좀 강가로 가지 않았겠는가?

뭐 이런 생각을 뒤늦게 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뭐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6절, 그녀가 아기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불쌍하다.

불가에서는 어떤 말을 쓰지요? 측은지심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 아기가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알았을까요? 학자들의 의견은 두 가지로 갈립니다.  아마 아이가 할례를

받았거나, 아니면 할례가 아니래도 그 바구니에 아이가 놓여 있으니까 당시에

아이를 강가에 버리라는 그런 정황상 이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였을 것이다라고

아무튼 생각했던 것이 아니냐? 라고 짐작을 합니다.

 

도대체 여자들이 말을 듣지를 않는 거죠.^^*~~~ 모세의 엄마, 파라오의 딸,

산파들.  아무도 파라오의 말을 듣는 사람은 없는거예요.  그럼에도 그는

왕입니다.

 

6절에서 "이 아기가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라는 파라오 딸의

말과 함께 파라오의 딸과 누이의 대화가 시작이 됩니다. 결국 아기는 친모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젖을 먹여야 되니까. 그리하여 친모는 아기가 자랄 때까지

아기를 돌볼 수 있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본래 친모가 자신의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거는 당연한 거지요?

근데 이야기가 위기가 완전히 반전이 되는 거예요. 죽을 위기에 몰려서 상자에

넣어 놨더니 파라오의  딸이 보고 그것을 다시 아기의 어머니에게 맡겨서 아기

어머니가 아기를 그냥 키우게 되는데 삯까지 받고 키우는 겁니다. 무상보육이

이렇게 실행되는 겁니다. ^^*~~~

 

젖을 먹이는 일이 굉장히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삯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한 파라오의 억압을 오히려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제 삯까지 주면서 이스라엘의 한 아기가 그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나게 되는 그런 어떤 역설, 파라독스가 이어지게 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인들의 호감을 사게 되어 이집트를 떠날 때 빈손으로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탈출 3,21-22을 연상시킵니다. 탈출기 안에 보면 조금

여러가지 전승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뭡니까?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이집트인들이 그들에게 금붙이, 은붙이 이런 거를 막 주어서 그걸

가지고  떠나잖아요.

 

물론 나중에 그걸 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들기는 합니다만. 좀 그런 떠나면서도

그들은 몰래  도망간 것이 아니라 정말 환영 받으면서 떠났다라는 그런 어떤

우리가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어떤 신학적인 의도를 갖고 있는 그림을

그려주는 그런 태도를 연상시켜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10절에서는 이야기가 마무리 되면서 모세라는 이름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이

등장합니다. 원인론. 영어로는 '에티올로지(etioloy)라고 하는데요. 원인론이

뭐냐하면 이야기가 하나가 있는거예요. 근데 그 이야기를 통해서 뭔가를

설명하는 겁니다.

 

이렇게 돼서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전체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서 그래서

오빠는 하늘에 올라가서 해가 됐고, 동생은 뭐 하늘에 올라가서 달이 되었다.

또는 뭐 그렇게 그 사람이 거기서 호랑이를 만나서 이렇게 돼 가지고 나중에

뭐  보물을 얻게 되어 나중에 그곳의 이름을 호랑이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뭐 그런 전설의 고향 뭐 이런 식의 이야기들을 전부 원인론이러고 우리가

부르고 또는 원인담이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원인론 또는 원인담.

 

예, 그와 같은 겁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 전체가 하고 있는 기능은 그래서

그의 이름이 모세라고 불리게 되었다라는 하나의 원인담, 원인론의 역활을

한다는 겁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무언가로부터 끌어낸다. 내지는 건진다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히브리말 동사 마샤라는 동사와 정확한 발음을 모셰입니다.

모셰라는 동사와 어원적으로 연결이 됩니다.

 

※ '모세'는 ~로부터 이끌어 낸다. 건진다는 뜻의 '마샤'와 어원적으로

연결 돼 있다.

 

그런데 이상하죠? 파라오의 딸이 왜 히브리 말을 할까요?

여러분들 중에 우리나라에 뭐 외국인 노동자들이 와서 있는데 뭐 말레지아어,

태국어, 필리핀어 뭐 이런 거 할 줄 아는 분들 없잖아요. 파라오의 딸이

히브리어 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좀 이상합니다.

학자들은 이런 거를 보고 그냥 순수히 그렇구나라고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뭔가  이상하다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많이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파라오의 딸이 히브리 말을 한다는 건

맞지 않은 거 같고. 그리고 나서 보니까 이집트 말에도 모셰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집트 말에서는 어떤 뜻이냐 하면 엄마가 아들을 낳을 때 '모셰'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예를들어 '라'라는 신이 낳은 왕이라면 그 왕의 이름은

'라모셰', '라모세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빨리 발음하면 '람세스'

'투트'라는 신이 낳은 왕은 '투트 모세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모세 내지는 모셰라는 이름은 아마 본래 이집트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공주의 아들이었으니까 어느 신의 이름이 앞에 붙어 있었는데

그건 떼어 버렸을 거다. 그리고 그 신의 이름은 떼어 버리고 모셰라는 이집트

이름이 이제는 히브리 이름으로 신학적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어떤 이야기를

통해서? 강에서 건져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따라서 역사적으로 모세라는 인물이 있었다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어떻게 판명이 되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가 뭐냐하면,

모세가 정말 실존 인물이었을까에 관해서 질문을 던지는 신학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게 뭐냐하면, 히브리 사람들이 굉장히 중요시하는 건

그가 어디에 묻혔느냐는 겁니다.

 

모세는 묻힌 장소가 나오지 않아요. 따라서 역사적으로 정말 실존했던

인물인가에 관해서 학자들이 조금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고 또 많은 학자들은

거기에 대해서 고대의 이야기에 관해서 그렇게 역사성에 관해서 토론한다는

것은 조금 무의미하다라고 그렇게 거기에 대해서 토론하지 않는 학자들이

글쎄 더 많이 있는 거 같습니다.

 

아무튼 모세라는 인물이 만약 실존 인물이었다면 그 본래의 이름은 아마도

이집트 이름이었을텐데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이제 히브리화 되는구나.

이거 중요합니다. 여러분들 기억해 두셔야 됩니다.

 

※ 히브리화. 신학화

 

히브리화 되었구나. 신학화 되었구나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예, 따라서 재미있는 것은 이 모세 구출 사건을 통해서 앞으로 있을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의 전형을 우리가 만나게 됩니다. 앞으로 탈출기 전체를 통해서

예를들어 탈출기 전체를 영화로 만든다면, 그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어디에

있습니까?

 

옛날에 찰스 헤스틴이 나왔던 십계에서 그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갈대바다가

갈라지는 거잖아요. 물에서 구출되는. 근데 그 전형을 그 작은 모델을 이미

모세가 아기 때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물로부터 세상을 구출하시는 그 가장 원형은 창세기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물을 가르고 세상을 창조하시는 그리고 그렇게 갈라진 물들 중에 그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물이 서로 모이면서 땅이 드러나는 그와같은 장면과 모세가 구출이

되는 장면 내지는 노아의 홍수의 장면, 갈대 바다에서 구출하는 장면, 나중에

묵시록에서 바다로부터 용이라든지 괴물들이 등장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천사들과 대결을 벌이는 장면, 이 모든 것들을 사실은 하나의 동일한 신학적

구도 안에서 우리가 이해해 볼 수가 있습니다.

 

자, 2,1-10까지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어떤 묵상을 해 볼 수가 있을까?

마태오복음 2,13-18을 보면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도 모세와

같이 어렸을 때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지요? 헤로데가 어떻게 합니까?

"두살 이하의 아이는 모두 죽여 버려라."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가 도망을 갑니다. 하필이면 어디로 갑니까?

이집트로 갑니다. 그 대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누구를 떠 올릴까요?

모세를 떠 올리는 겁니다. 아기의 어떤 폭군의 아기 학살...

 

여러분들 생각해 보십시오. 폭군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강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입니다. 아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약자의 입장에 있는 겁니다. 가장 힘이 센 사람이 가장 힘이 약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장면입니다.  그것을 하느님의 도움으로 벗어나는 그와 같은

대목들. 사람들은 모세를 떠 올렸을 겁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을 읽는 사람들은 따라서 당연히 유다의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 유다계 독자들에게 예수와 모세를 평행한 이미지로 투영하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을 시작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마태오 복음을

읽으면서 그냥 평범한  유다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 모세 비슷한 인물이 이제 등장하나보다. 뭐 이런 생각을 하겠지요.

잠시 후에 동방박사가 등장하면서 아, 그럼 이 사람이 메시아인가 보다

이런 생각을 하겠지요.

 

그런데 이야기가 다 끝날 때 보니까 아, 이 사람은 그냥 모세와 같은 예언자도

아니고  아니면 하느님께서 우리가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예언 했던 그런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 메시아도 아니고 알고 보니까 이 세상의 왕이었구나.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그런 경이로움으로 발전해 나가는 마태오 복음의

구조를 우리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파라오의 딸은 상자에 놓인 죽을 운명의 아이를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측은지심입니다.

 

※탈출기 1장에서 산파들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파라오의 명령을

거슬렀다면 파라오의 딸은 파라오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

오늘날 현대 신학이 말하는 인간의 양심, 또는 자연법의 차원을 이 부분과

연결해 묵상해 볼 수 있다.

 

예, 오늘날 교회가 얘기하고 있는 하느님의 법은 그런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서

즉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법이 있고, 거기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자연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모든 것 안에 인간의 마음 안에 하느님께서

그가 하느님을 믿거나 그렇지 않거나 계시를 받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모두에게 넣어 주신 그와 같은 법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얘기할 때는 양심이라고 얘기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고 있어야만

하는 그와 같은 선한 마음입니다. 그와 같은 양심이 인간에게 있을까요?

있는 거 같애요. 예를들어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양심 또는 인간의 어떤 선함에 관해서.

 

예를들어 어떤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의 자라나는 환경이 아주 범죄적인

환경일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그런 환경 안에서 아이가 자라나더라도 그 중에

몇몇 아이들은 아주 선한 마음을 갖게 되는.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슬럼에서 비인간적은 그런 대우를 받고 우리가 보기에는

그런 형편 없는 부모에게서, 자식을 어떻게 키우는 줄도 모르고 관심도 없고

그냥 그러는 부모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마음 안에는 뭔가 착한

인간의 그런 마음이 있더라는 그런 것들에 대한, 그런 많은 사회운둥을 하는

체험들을 들어보면 아, 인간은 분명 선한 존재구나.

 

물론 반대의 체험도 있습니다. 도저히 그 부모님을 보나 누구를 보나 아이는

잘 자랐어야 하는데 그 아이들이 좋지 않은 길로 빠지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언제든지 선과 악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거 같애요. 그리고 매일

매일 우리는 그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그와 같은 존재

인 거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6회 모세의 살인과 도주 그리고 혼인/ 탈출 2,11-22이 계속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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