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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2/ 제6회 모세의 살인과 도주 그리고 혼인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17 조회수370 추천수1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의 성서백주간 2

 

제6회 모세의 살인과 도주 그리고 혼인/ 탈출 2,11-22

 

*지난 시간 정리

 

※ 파라오의 딸은 상자에 놓인 죽을 운명의 아이를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측은지심입니다.

 

※탈출기 1장에서 산파들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파라오의 명령을

거슬렀다면 파라오의 딸은 파라오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

오늘날 현대 신학이 말하는 인간의 양심, 또는 자연법의 차원을 이 부분과

연결해 묵상해 볼 수 있다.

 

예, 오늘날 교회가 얘기하고 있는 하느님의 법은 그런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서

즉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법이 있고, 거기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자연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모든 것 안에 인간의 마음 안에 하느님께서

그가 하느님을 믿거나 그렇지 않거나 계시를 받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모두에게 넣어 주신 그와 같은 법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얘기할 때는 양심이라고 얘기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고 있어야만

하는 그와 같은 선한 마음입니다. 그와 같은 양심이 인간에게 있을까요?

있는 거 같애요. 예를들어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양심 또는 인간의 어떤 선함에 관해서.

 

예를들어 어떤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의 자라나는 환경이 아주 범죄적인

환경일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그런 환경 안에서 아이가 자라나더라도 그 중에

몇몇 아이들은 아주 선한 마음을 갖게 되는.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슬럼에서 비인간적은 그런 대우를 받고 우리가 보기에는

그런 형편 없는 부모에게서, 자식을 어떻게 키우는 줄도 모르고 관심도 없고

그냥 그러는 부모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마음 안에는 뭔가 착한

인간의 그런 마음이 있더라는 그런 것들에 대한, 그런 많은 사회운둥을 하는

체험들을 들어보면 아, 인간은 분명 선한 존재구나.

 

물론 반대의 체험도 있습니다. 도저히 그 부모님을 보나 누구를 보나 아이는

잘 자랐어야 하는데 그 아이들이 좋지 않은 길로 빠지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언제든지 선과 악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거 같애요. 그리고 매일

매일 우리는 그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그와 같은 존재

인 거 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스티븐 호킹이라는 사람이 과학자죠? 천재 물리학자죠?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어요. 뭐냐하면은 그는, "나는 예정설, 그러니까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을 잘 보니까 그 사람들도 길을 건널 때 좌우를 살피더라."

^^*~~~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예, 모든 게 하느님의 뜻이면 그냥 걸어 가야지. 뭐  하느님의 뜻이면.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

 

예,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탈출기 안에서도

인간의 선택에 관한  굉장히 중요한 메세지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탈출기의 중요한 메세지는 뭡니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노예로 사는 것을 원하셨대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는 겁니다.

 

창세기의 메세지도 탈출기를 바탕으로 우리가 역으로 읽어본다면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지만 자신의 노예로 사는 것도 원치 않으신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는 겁니다.

 

예, 여러분들 중에 만약,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선물이 두 개 있는데 하나를 고르십시오. 하나는  지 멋대로 하는 강아지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분들이 프로그램 한 대로 움직이는 로봇트 강아지입니다.

그러면 어떤 걸 고르시겠어요? 저는 지 멋대로 하는 강아지를 고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로봇트 강아지는 이틀이면 제가 실증이 날 꺼예요. 그러면서 나와의

관계 안에서, 강아지와 저와의 그 관계가 서로 변해가고 성장해 가는 그거를

제가 즐기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게 저에게 기쁨이 될 겁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대는 것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자유롭기를 바라셨다. 우리가 그 무엇의 노예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의 노예가 되고 싶어합니다.

자기가 선택의 주체가 되는 것을  인간은 굉장히 불안하게 생각하는 거 같애요.

 

그래서 자주 우리는 어떤 얘기를 합니까?

"아이, 네가 해! 나는 따라서 할께!", "그대가 결정해 나는 따라서 할께!"

물론 그것은 우리의 넉넉한 마음이기도 합니다만 그것이 자칫 잘못 발전해서

내 삶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우리가 포기한다면, 그리고 무언가의 노예로

살아간다면, 그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세상의 어떤 권위든, 폭력이든, 허상이든 그 무엇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예, 파라오의 딸의 행동에 대해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녀가 어떻게 그 아기가 히브리 아기라는 것을 알았겠느냐는 것.

둘째는 과연 파라오의 명령이 그렇게 무시될 수 있었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첫째 질문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 질문에 대해서 파라오의 딸이 어떻게 파라오의 명령을 어겼겠느냐?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파라오의 명령이 지속적으로 그 권위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그 이야기의 진행을 읽어가야 하겠습니다.

 

정말 이 세상의 진정한 권위가 누구인가? 파라오인가? 아니면 하느님인가?

나중에 열 가지 재앙의 이야기가 나오죠? 열 가지 재앙의 이야기가 그렇게

열번씩 반복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그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깊이

인식하라는 얘기입니다.

 

이 세상의 정말 신이 누구인가? 누가 참다운  신인가? 그리고 누가 거짓 신인가?

라는 걸 인식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열번을 반복하는 겁니다. 누가 과연 진정한

신이고 누가 과연  진정한 권위인가? 라는 겁니다.

 

앞선 1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탈출기 2장에서는 파라오의 상대 편에서 아기를

보호하는 그런 이들이 그런 여인들입니다. 아기의 어머니, 누이, 파라오의 딸.

파라오가 스스로 만들어 낸 두려움의 허상을, 폭력을 통해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반면 힘없는 여인들은 파라오와 직접적으로 하는 대결은 아니지만 그의

폭력으로부터 아기를 지켜냅니다. 누가 더 지혜로운지에 관해 우리들은 그

저자의 그 질문과 대답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예, 다음 페리코페는 탈출 2,11-22 입니다.

파라오의 딸에 관해서 한 마디만 더 하고 좀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파라오의 딸은 요 이야기가 나온 뒤에는 탈출기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디서 등장하는냐 하면,

 

1역대 4,18: 그의 유다인 아내는 그도르의 시조 예렛, 소코의 시조 헤베르,

자노아의 시조 여쿠티엘을 낳았다. 이들은 메렛이 아내로 맞아들인 파라오의

딸 비트야의 아들들이다.

 

이 파라오의 딸은 모세를 구해준 그 자신의 공덕으로 인해 하느님의 뜻을 알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때 같이 떠납니다. 이거는

성경에 안 나옵니다. 유다 전승에서 보면은 같이 떠납니다.

 

여러분, 옛날에 영화로 1950년대에 만들어졌던 십계 있지요?

찰슨 헤스턴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거기서도 보면은 파라오의 딸이 그 영화에서

같이 떠납니다. 그러면서 전체적인 여정을 함께 하는 그런 인물로서 등장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나오는 파라오의 딸과 탈출기 1장에서 등장하는 그 파라오의 딸이

동일인물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문학적인 증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

특이하죠? 메렛이 아내로 맞아들인 파라오의 딸인 비트야. 유다 전통 안에서는

이 공주를 탈출기 2장의 공주와 동일시 합니다.

 

예, 이제 모세가 자라납니다. 모세가 자란 뒤 하지만 아직 야훼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의 그의 보도는 탈출기 2,11-22에 나오는 그의 세 행동을 통해 요약된다.

앞으로의 이야기에서는 주로 뭐가 밝혀지냐하면, 그럼 모세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느냐하는 게 중요한 겁니다.

 

첫째 그는 동포를 위해 이집트인들을 때려 죽입니다. 이게 좋은 일입니다.

사람을 죽였다니까 우선 아, 이건 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죠?

둘째, 히브리 동족들의 싸움을 말리려 합니다.

셋째, 미디안 사제들의 딸들을 돕습니다.

첫째와 둘째 이야기만 읽는다면 모세의 민족주의에 관해서 무슨 민족주의자

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셋째 이야기를 함께 읽는다면 탈출 2,11-22 내용은 모세의 민족 사랑

이라는 것을 좀 뛰어넘어 모세의 의로움에 대한 보도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습니다. 항상 어떤 약한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인물로서 모세는 묘사됩니다.

 

11절에서 두 번에 걸쳐 형제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자란 뒤 어느 날, 그는 자기 동포들이(형제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동포, 형제 같은 뜻입니다) 있는 대로 나갔다가 그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형제)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이렇게 나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자기 형제들에 대한 강제 노동이라는

억압적인 형태가 이제 때린다는 라는 구체적인 그런 폭력으로 상승하자

모세는 이집트인을 때려 죽이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말 성경이 약간의 문제를 남깁니다. 외국어 성경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만. 왜냐하면 히브리 말로만 보면은 같은 단어가 쓰입니다.

"그때 그는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라고 되어 있지요? 그리고 나중에 12절에서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 이집트인을 때려 죽이고서 모래 속에 묻어 감추었다."

라고 되어 있지요?

 

이집트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때렸다는 단어랑 모세가 이집트인을 때려죽였다는

단어랑 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때렸다고 번역하고 한번은 때려죽였다고

번역한 거예요. 따라서 앞의 사람을 때렸으면은 모세도 때린거고, 앞의 사람을

만약에 그 이집트인이 히브리인을 때려죽이는 것을 보고 모세도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였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는 겁니다. 분명한 거는 같은 단어입니다.

 

자,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거는 뭡니까? 여기서 중요한 거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법적인 상식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이 갖고 있는 법적인 상식입니다. 이집트 사람이

히브리인 하나를 때려 죽였다면 히브리인도 이집트 사람 하나 때려 죽이는 것.

그것이 동태복수법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를 그렇게 해를 가하면 이쪽 사람이 상대편에게 해를 가할 수도

있다. 따라서 모세가 한 것은 적어도 이집트의 법에 따라서가 아니라 구약의

율법을 우리가 따른다면은 합법적인 겁니까, 아니면 위법적인 겁니까?

합법적인 겁니다.

 

여기서는 계속해서 모세의 이 세가지 예가 그렇게 이집트 사람을 때려죽이는 거,

동포의 싸움을 말리려고 하는 거, 나중에 르우엘의 딸을 돕는 거. 이 세가지 예가

모두 모세의 의로움, 모세는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 이러한 동태복수법적 상황묘사, 오늘날의 법적 이해로는 모세는 살인자이지만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토라의 관점에서 모세의 행위는 정당한

행위가 됩니다. 탈출 21,23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모세가 죽일 때 어떤  장면이 나오죠?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 대목도 역시 앞의 이집트인이 때린 히브리인이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 있었으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없지요.

누군가가 있었겠지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라는 것은 그 앞에서

히브리인이 죽었을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갑니다.

13절: "그가 이튿날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시오.' 하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동족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레아'라고 우리 말 발음에는

없습니다. 그냥 '악','악' 이런 자음인데요. '레아'라는 그런 단어입니다.

근데 어떤 뜻으로 번역이 됐냐하면 동족이라는 뜻으로 번역이 될 수도 있고,

친구라는 뜻으로 번역이 될 수도 있고, 이웃이라는 뜻으로 번역이 되기도

합니다.

 

※ 레아: 동족, 친구, 이웃

 

세 가지 의미가 다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는 "당신은 어째서 당신의 이웃을

때립니까? 당신의 친구를 때립니까?" 라는 그런 의미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십계명의, 구약의 율법의 모든 대상은 이스라엘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의 내적인 법률입니다.

 

대한민국 국법은 누구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권리를 줍니까?

대한민국 국민에게 줍니다. 외국 사람은 거기에 의무로부터도 자유롭고

권리도 누리지 못합니다. 물론 외국인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또 있겠습니다만,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예를들어 죽이지 말라 했다면은 그건 누구에게 해당되겠습니까?

그건 이스라엘에게 해당이 되는 겁니다. " 죽이지 말아라." 라고 얘기한다면은

그 법은 누구에게 해당되느냐? 이스라엘 사람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겁니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는 이스라엘 사람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을 거슬러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남의 자신을 탐내지 마라." 또는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마라."

거기서 이웃은 동료 이스라엘입니다.

하나의 카테고리가, 조금은 민족적인 이기주의라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그와 같은 상황입니다.

 

여러분들 그 대목을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나중에 어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그렇게 물어보지요?

모든 율법 중에 가장 중요한 율법이 뭐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신명기 6장의 내용을 이용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모든 것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율법학자가 크게 기뻐합니다. "맞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질문 하나를 더 던지지요? "그렇다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 율법의 모든 것은 누구에게 해당되겠습니까? 라는

겁니다. 그 율법학자가 생각했던 정답은 뭘까요?

 

예수님이 그렇게 대답하길 바랬겠죠.

"너 그것도 모르냐? 너 율법학자라면서 그것도 모르면서 밥 먹고 사냐?

당연히 이스라엘 사람이지. 하느님 백성이지." 뭐 이렇게 얘기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대답을 안 합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이면 모두가 증오했을 거의 남북한의 관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 사마리아 사람 예를 들어서 마지막에 그 사마리아 사람이 부상당한

사람을 도와주는 예를 들어서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그러니까 율법학자가 여러분들 그 대목을 읽어보시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얘기 안 합니다. 그 말을 하기가 싫으니까 그 말을 피해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그 사람을 도와준 사람이 그 사람의 이웃입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럼 너도 가서 그렇게 해라." 그리고 돌려 보냅니다.

 

전체적인 컨텍스는 여기서부터 생각하고 있는 동족, 이웃, 친구의 카테고리가

어디까지인가? 라는 것을 보셔야 되는데 아직까지 우리가 읽고 있는 탈출기

저자가 사용하는 동족, 이웃의 카테고리는 히브리 사람,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앞으로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그 백성을 얘기하는

겁니다.

 

자, 그런데 그 사람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왜 당신의 친구를, 이웃을, 동족을

때리시오." 하고 얘기하니까 그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14절: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나로 죽일 작정이오?"

 

질문이 두 가지지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당신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 겁니까?

둘째는 모세가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자기도 죽이려고 하느냐? 모세는 왕궁에서

자랐을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니가 그렇게 나한테 이집트의 권력을 사용하려

하느냐?" 이런 질문을 던진 겁니다.

 

따라서 모세에게 던진 질문은 두 질문입니다. 물론 둘 다 모세의 신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당신은 파라오의 권력을 나에게 사용하려 하느냐? 아니면 당신이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나에게 그런 말을,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어디에 있느냐? 

 

나중에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시고 기적을 보이실 때도 그리고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도 바리사와 율법학자들이 와서 내지는 유다교의 지도자들이 

와서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 모세의  신원에 관한 그와 같은

질문입니다. 저는 무슨 권한으로 여러분 앞에 가르칩니까? 

신부니까. 그것도 있습니다. 사제라는 그와 같은 제가 누리는 신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과 저와의 관계 안에서 제가 강의를 하고 여러분들이 들어야 될 

이유는? 법적인 이유는 없습니다. 그게 가장 이상적인 겁니다.

 

어떤 것에 의해서  무언가가 그냥 힘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 관해서 그것을 인정하게 될 때라는 겁니다.

이게 교회가 얘기하고 있는 순명의 정신입니다. 

 

순명. 교회가 얘기하고 있는 순명은 그냥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닙니다.

교회가 얘기하고 있는 순명이라는 것은, 순명을 하는 사람이 내가 누구에겐가 

순명하겠다라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관한 기본적인 그 사람의 권위에

대한 신뢰를 내가 갖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잘 판단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그 사람을 믿고 있으니 그가 그리고 가지고

한다면 나도 같이 갈 것이야. 따라서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순명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이 나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겁니다.

 

한 사제가 한 신자에게 "사제에게 순명하십시오!" 라고 얘기하기 위해서는 그 

신자가 그 사제를 신뢰할 수 있는 기본적인 체험 없이 그것을 할 수 없는 겁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부모에게 순종해야 돼!" 라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자녀들로

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신뢰를 얻지 못한 채 순명만을

강요한다면은 그것은 순명이 아니라 복종입니다.

 

"니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너를 어떤 힘을 가지고 너를 굴복시킬꺼야."라는

그런 복종, 그것은 신뢰의 관계가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어떤 폭력의 그런 관계인

것입니다.

 

예, 결국 파라오는 그 일로 인해 모세를 알게 되고  모세를 죽이려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도망쳐서 미디안 땅으로 가게 됩니다. 미디안 이라는 이름은

창세기에서 이미 등장했을까요? 등장했습니다. 

 

저도 탈출기를 강의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절대로 몰랐을 겁니다.

탈출기 25장을 찾아보면, 미디안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과 크투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이 미디안입니다. 

 

※ 창세 25,2: 그는 아브라함에게 지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를

낳아 주었다.

 

구약에서 많은 이름들이 인명과 지명으로 교차해서 등장합니다. 스켐도 그렇고,

미디안도 그렇고 다른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등장하는

미디안이라는 인물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하나로 등장하는데 나중에 이 인물이

어딘가로 가서 살았던 거 같습니다.  가나안 땅이랑, 팔레스타인 땅이랑, 이집트

사이의 어딘가로.

 

어떤 사람들은 시나이 반도 남단을 얘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라비아 반도

남단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잘 모르는데 남쪽인 건 분명합니다. 시나이

반도거나 아니면은 아라비아 반도거나.

 

창세기 24장에서 이사악의 아내감을 찾는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잖아요. 엘리에젤을. 레베카를 만난 곳은 우물입니다. 창세기 29장에서

야곱이 라헬을 만나는 곳도 우물가입니다. 모세가 미디안의 사제 일곱 딸을

만나는 곳도 우물가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나이가 많은데 아직 혼사가 안 됐다하면은

우물가로 ^^*~~~ 얼마전에 어떤 분이 저한테 재미있으라고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아이가 요새 성당에 열심히 다닌대요. 그래서 왜 그런가 물어

봤더니 갑자기 신앙심이 생긴 건 아니고 주위에서 보니까 성당에서 배우자를

찾으면은 행복하더라. 뭐 그런 지향으로 성당을 열심히 다닌대요.

 

신앙을 찾는 이유가 거기서 끝나서는 곤란합니다. ^^*~~~

하지만 그렇게 해서 신앙생활을 출발한다는 거는 가능할 수 있는 얘기 같애요.

제가 신학교에서도 그런 얘기를 자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신학교에 온 이유는

웃기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저희 선배 신부님 중에서는 조금 어려우셔서 빵 먹고 싶어서 신학교에

왔다고 솔직히 얘기하시는 신부님도 계세요. 하지만 나중에 신학교 과정을 거치고

신부가 될 때에는 그 때는 성숙한 이유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배우자들을 고르기 위해서 성당에 다시 나오겠다면은 저는

환영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을 갖는 이유가 거기서

머무른다면 그것은 곤란한 겁니다. 성당 생활을 통해서 그 신앙이 성숙해져야

됩니다.

 

자, 그 미디안의 딸들이 모두 일곱이지요?

1사무 2,5을 보면은, "아이 못낳던 여자는 일곱을 낳고 아들 많은 여자는 홀로

시들어간다." 뭐 이런 식의 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룻 4,15: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에게는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느니, 이제 아기가 그대의 생기를 북돋우고 그대의 노후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예레 15,9: "일곱 아이를 낳는 여자는 기력이 다하여 숨을 헐떡거렸다.

그 여자의 해는 아직 낮인데도 기울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구약의 개념에서는 한 여자가 살아가면서 최대한도로 아이를

많이 낳는다면 일곱 정도로 낳는다. 건강 상태가 조금 안 좋은 거죠.

우리나라 어머니들 중에서 열 명씩 낳은 분도 있잖아요. ^^*~~

제가 어렸을 때 제 친구들만 하더래도 무슨 뭐 11남매 중에 10째예요. 11째예요.

그런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구약에서는 조금 좀 건강 상태가 조금 약간 그런 거기 때문에

일곱 정도가. 그러니까 르우엘은 낳을 때까지 낳은 거예요. 그런데 하필이면

다 딸, 딸. 딸, 딸, 딸, 딸, 딸, 딸. 이렇게 해서 일곱을 낳은 겁니다.

 

그 일곱이라는 숫자와 함께 일곱 명의 딸들이 우물가에 대거 출현합니다.

야곱이 마치 양들에게 물을 먹이도록 라헬을 돕듯이 모세도 미디안의 사제의

딸들이 양떼에게 물을 먹이는 것을 통해 돕게 됩니다.  다른 양치기들이 와서

그녀들을 쫓아내지요?

 

자, 장면은 이런 겁니다. 그 일곱 명의 딸들이 와서 힘겹게 우물에서.

지금처럼 무슨 꼭지를 틀어서 물 따르는 게 아니라, 펌프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힘겹게, 힘겹게 깊은 곳에서 물을 길어 올렸는데 근데 누군가가 와서

그녀들을 쫓아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물을 찾지하는 겁니다. 동네 건달들 같이

그렇게 못된 짓을 하는 거예요. 그러자 모세가 그녀들을 돕습니다.

 

이 대목에서 송창식씨의 담배가게 아가씬가? ^^*~~~ 노래가 ^^*~~~

동네 건달들을 탁... 이렇게 해서 담배가게 아가씨를 돕는 그런 모습인 겁니다.

마치 앞선 이야기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이집트인들에게 맞섰듯이 또는 같은

이웃과 싸움을 벌이는, 동족과 싸움을 벌이는 나쁜 그런 히브리인들에게 맞섰듯이

모세가 그들을 맞섭니다.

 

8절에서 이제 그녀들의 아버지 르우엘은 그녀들이 일찍 돌아온 것에 대해서

놀랍니다. 왜 놀랄까요? 왜냐하면, 그와 같이 물을 길어 놓으면 딴 사람이 와서

빼앗아 가고 그런 일들을 자주 당했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일찍 돌아온 겁니다.

 

그리고 나서 르우엘은 그녀들에게 한 마디를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아까 동족,

친구, 이웃이라는 말로 '레아'라는 단어를 말씀드렸지요? 르우엘의 이름 역시

그런 겁니다. '레아-엘'. 따라서 '엘', '하느님의 친구', '하느님의 동족'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하느님의 이웃' 이라는 그런 표현입니다. 이름 자체가.

계속해서 비슷한 단어가 이렇게 돌고 도는 그와 같은 문학적인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이웃에 관한 개념입니다.

 

예, 19절에 나오는 딸들의 대답은 적어도 그녀들에게 모세가 이집트인으로

인식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모세의 외적 모습에 대한

그녀들의 판단이라고 볼 수도 있고, 이집트인 가운데 어떤 헤어스타일 아니면 옷.

뭐 그런 거겠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저자가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아직 모세가 갖고 있는 자의식,

자신에 대한 의식이 완전히 나를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반쯤은

이집트인으로 있는 모세의 좀 불완전한 자의식에 관해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세가 직접 행한 행위에 대한 탈출기 저자의 묘사보다 모세가

어떻게 자신들을 구했는지에 대한 딸들의 표현이 훨씬 더 화려합니다. 그리고

그녀들이 말합니다.

 

직역하겠습니다. "한 이집트 사람이 우리들을 양치기들의 손에서 구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위해 물을 애써 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들의 양떼에게

그것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앞선 내용보다 훨씬 더 화려하죠? 왜 그럴까요? 그녀들이 모세에게 갖고 있는

호감입니다.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야, 니들 가!" 하고 소리쳤을 뿐인데 ^^*~~~

막 이렇게 화려하게 얘기하는 겁니다. 더군다나 여기에서는 구출하다, 구원하다

라는 굉장히 신학적인 함의를 갖고 있는 동사가 역시 두 번의 반복이 되면서

굉장히 강조하는. 물을 열심히 길어서 우리들의 양떼에게 먹였습니다라는 그런

어떤 굉장히 강조된 화법을 우리가 여기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딸들의 대답에 르우엘은 마치 창세기 24장과 29장에서 라반이 비슷하게

행동합니다. 굉장히 호의를 가지고 그런 야곱을 초대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르우엘은 모세를 손님으로 맞이 합니다.

 

20절에 등장하는 딸들을 책망하는 그런 투로 르우엘은 긴 언사로 길게 말을

하면서 모세가 손님으로서 앞으로 누리게 될 극진한 대접을 예상하게 됩니다.

르우엘은 왜 모세를 그렇게 극진하게 대접했을까요?

라반은 왜 그렇게 야곱을 극진하게 대접했겠습니까?

붙잡아 두고 싶어서입니다.

 

여기서도 꼭 뭐 딸의 혼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만 남자고 딸만 일곱 있으니깐

어떤 다른 남자가 오는 것이 기쁜 겁니다. 결국 모세를 붙잡고 싶은 르우엘의

마음에서였는지 아니면 뭐 다른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텍스트가 우리에게

얘기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모세는 치포라와 혼인하게 됩니다.

 

치포라는 '새'라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전체적인 문학적

흐름 안에서 어떻게 연결 시켜야 될지에 관해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그 아들의 이름은 '게르숌'인데 여기서 '게르'라는 말은 '이방인'이라는 말이고

'숌'이라는 말은 좀 동떨어져 있다, 따로 떨어져 있다. 아니면 삭막하다라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마지막에 그 이름을 해석하면서 탈출기 저자는 모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구나."

 

'숌', 낯설다, 따로 떨어져 있다.

'게르', '이방인'

 

반대로 '게르숌', '가라쉬'라는 히브리 말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느냐하면,

내쫓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게르숌, 그러면은 쫓겨난 사람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텍스트는 그 점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 얘기를 정리해 봅시다.

이미 서두에서 언급됐듯이 탈출 2,11-22의 주제는 모세의 의로움입니다.

단편적인 세 사건을 통해 모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 이 텍스트는

진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젖을 떼고 난 후 모세는 파라오의 딸의 양자로 자라지만,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히브리인들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왜,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모세가 편하고 안락한 이집트 왕궁의 삶을 선택하지

않고 민족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텍스트는 침묵합니다.

 

탈출기 2장의 모세의 태도에 대해 짧은 안목에서는 민족주의란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를 수 있겠지만 구약의 관점에서 '의로움'이라는 신학적 개념에 더 잘 부합

합니다. 구약의 '의로움'이란 오늘날 마이클 샌델 같은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구약의 '의로움'이란 토라의 가르침을 따르고 토라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구약의 '의로움'은 크게 세 가지 입니다.

1) 토라에 충실한 삶

2) 약자를 보호하는 결정

3) 공정한 재판

이 세 가지가 구약의 '의로움'의 특징입니다.

 

앞에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탈출 2,11-22의 모세의 세 행동은 하나같이

그가 토라에 충실한 의로운 인물이었다는 것을 일관성 있게 이야기합니다.

모세의 삶의 내용에 대한 진술을 시작하기 이전,  이미 그의 태도를 통해서

그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동족의 싸움에 개입했을 때, 그 동족은 모세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탈출 2,14)

 

신약의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에게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대체 당신이 누구이길래 어떤 권리로 그 같은 말과 행동을 하는가?"

결국 그것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고 적법성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결국, 따라서 탈출기에서는 모세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그 적법성을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저희가 뒤에

읽게 될 탈출기 3장에서는 모세가 그런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그와 같은 권위를, 백성을 이끌고 나올 수 있는 그와 같은

지위, 능력, 권위를 부여받는 이야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선 모세가 그와 같은 권리를 받고 그와 같은 권리와 함께 이집트에서부터

백성을 이끌고 나오는 겁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모세가 받은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지팡이입니다.

 

지팡이 얘기가 이제부터 계속 나옵니다. 나중에 구리뱀을 매다는 그 얘기까지

모든 이야기에 지팡이 이야기가 끝까지 나가고 나중에 그 지팡이는 어디에

자리를 잡습니까? '계약의 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까지 들어가게 되는, 그 계약의 궤'에 자리잡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그 모세에게 주신 권위, 인간에게 주신 권위를

그것이 상징합니다.

 

반면에 예수 사건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기까지

예수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권위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

 

모세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이미 탈출기 3장에서 설명이 되고 그 때부터 모세는

그 권위를 갖고 움직이지만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것은 끝에 가서 고백이 됩니다.

어떻게 고백을 하지요? 백부장이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아, 저 사람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가 갖고 있는 그 권위가 무엇인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미리 밝혀지고 밝혀진  예수를 백성들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사건을

통해서야 비로소 예수가 누구인지가 밝혀지는 겁니다.

 

그 밝혀진 예수가 이제 하느님 나라로 가는.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듯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그 여정을 이제 새로이 시작하는데 그때

모세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다면, 예수에게는 누가 있는 겁니까?

그 여정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그 하느님 백성들이 누구입니까?

 

예, 열두 제자들, 사도들, 그리고 사도들로부터 시작된 교회,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들. 같은 동일한 그림 안에서 우리들은 구약과 신약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이야기는 탈출기를 통해서 내지는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기를 통해서 진행되고 마무리 되지만 신약의 이야기는 지금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있는 겁니까? 아직 약속의 땅은 아니고 이집트는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광야 어디쯤 있는 겁니다. 이게 우리들의 인생이 힘든 이유입니다. ^^*~

약속의 땅에 가기 전에, 하느님 나라에 가지 전에 우리들은 광야에 있는 겁니다.

 

탈출 2,11-22에서 흥미로운 점은 모세가 우물가에서 르우엘의 딸들과 만나는

점입니다. 창세기의 성조사에서 성조들은 자주 우물의 문제로 갈등의 상황을

맞습니다. 우물은 항상 갑순이와 갑돌이가 만나는 장소로만 나오는 건 아닙니다.

 

야곱이, 이사악이 우물을 파기만 하면 누군가가 와서 '그건 내 우물이다.' 라고

주장을 하는 거예요. 따라서 우물의 확보는 성조사에서,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곧 우물이라는 곳은 그들의 삶에 있어서 갈등과

위기의 그런 촉발점인 것입니다.

 

그렇게 생존을 가늠하는 사회적 갈등의 현장, '우물가'라는 문학적 모티브와

이사악과 레베카, 야곱과 라헬, 모세와 치포라의 혼인은 모두 공통적으로

연결돼 있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납니다. ^^*~~~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것. 요한 4,6에 보면은 야곱의 우물에서

예수님이 그 사마리아 여인을 만납니다.

 

정작 야곱의 우물이라는 말은 창세기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의 전승에서만 등장합니다.

 

요한 4,6: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창세 33,18-20: "야곱은 파딴 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에 있는 스켐 성읍에 무사히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자기가 천막을 친 땅을 스켐의 아버지

하모르의 아들들에게서 돈 백 닢을 주고 샀다. 그는 그곳에 제단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다."

 

야곱이 파땀 아람에 이르러 자기가 천막을 친 땅을 스켐의 아버지 하모르의

아들들에게서 돈 백 닢을 주고 샀다. 뭐 이런 것이 나오는데, 아마 그곳에

우물이 있었을 겁니다. 그 우물은 아마도 요한 4,6에 나오는 우물과 연결이

되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뭐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야곱의 우물이 특별한 게 가나안 지역의 우물은

크게 두 가지 타입이 있습니다.

 

첫 번째 타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지하에 가서 고인 겁니다.

거기다가 구멍을 파서 그 물을 끌어 올리는 겁니다.

 

또 한가지는 우리나라의 우물들과 마찬가지 경우인데요.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그것들이 지하를 흐르게 되는데, 그 중에 지하를 흐르는

그 카날 중에 어느 한 곳에 구멍을 파서 거기서 물을 끌어 올리는 겁니다.

 

어떤 게 수질이 더 좋을까요? 후자입니다.

근데 후자의 형태의 우물은 그렇게 비가 많이 내리지 않던 가나안 지역에는

대단히 드문 형태의 우물인데 야곱의 우물은 하필이면 그렇게 수질이 좋은

우물입니다. 사람들이 굉장히 고마워하고 기뻐하는 그런 우물입니다.

 

근데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그러십니까?

"이 물의 수질이 좋고 물  맛이 좋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이거 마셔도 목마르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주는 물은 한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된다."

 

하느님의 커다란, 구약과 신약의 커다란 대비.

구약에서는 어떤 땅과 생명에 관한 약속을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그냥 보통의 땅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이고 그냥 보통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된다라는 그런 하나의 예수님의 말씀으로 구약과 신약을

좀 대비하는, 대칭시키는 표현으로 우리는 요한 복음 4장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갈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7회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엘로힘의 기억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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