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8월20일(화) 聖 베르나르도, 聖 사무엘 님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19 조회수369 추천수0 반대(0) 신고

 

8월20일(화) 음7/14

聖 베르나르도, 聖 사무엘


 

베르나르도(8.20)

성인명

베르나르도(Bernard)
축일 8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교회학자, 신학자
활동지역 클레르보(Clairvaux)
활동연도 1090-1153년
같은이름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Bernardus)





테셸랭 소렐(Tescelin Sorrel)과 몽바르(Montbard) 영주의 딸인
복녀 알레타(Aletha, 4월 4일)의 아들인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
부르고뉴(Bourgogne) 디종(Dijon) 근교의 가족 성(城)인 퐁텐(Fontaine)에서
일곱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샤티용(Chatillon)에 가서 공부하면서 청운의 꿈을 펼치고 있었으나,
1107년 어머니의 죽음으로 많은 충격을 받고서 수도생활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원래 시토회의 설립자 3명 가운데 한 명은 아니었지만
흔히들 그를 시토회의 설립자로 부른다.
그가 새로운 수도회인 시토회에 입회한 해는 1112년 4월인데,
그 때 그는 자기 형제 4명을 비롯하여 모두 30명의 친척, 친구들과 함께
베네딕토회 규칙의 엄격한 해석을 따르기 위하여 1098년에 설립된
시토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원장이던 성 스테파누스 하딩(Stephanus Harding, 4월 17일)으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1115년에 성 베르나르두스는 성 스테파누스 하딩의 지시에 따라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부르고뉴와 샹파뉴(Champagne)의 경계지역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고립된 계곡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엄격한 규율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에 봉착하였으나,
그의 높은 성덕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때 그 수도원의 이름을 발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로 바꾸었고,
당시 68개의 시토회 수도원의 모원으로 만들었다.







그 후 성 베르나르두스는 자신의 학덕과 지덕을 활용하여
수도원의 외부 일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의 하나가 되어
통치자와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립교황인 아나클레투스 2세의 요구에 대항하여
1130년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Innocentius II) 선출의 합법성을 지지하였다.
또한 그는 로테르 2세를 황제로 인정하도록
롬바르디아(Lombardia)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140년부터 그는 공적으로 설교하는 일을 시작하여 놀라운 명성을 얻었다.
1145년에는 전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수도자였던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교황직의 의무에 대한 글을 교황 앞으로 보내어 로마(Roma) 교황청의 남용을
자제하고, 교황이 항상 목전에 두어야 할 종교적 신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교황 에우게니우스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랑그도크(Languedoc)에 파견하여
알비파(Albigenses) 이단을 대항하여 설교토록 하였고,
프랑스와 독일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의 열기를 북돋우는 특사로 임명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활동과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성한 저술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서한과 "아마(Armagh)의 성 말라키아의 생애" 그리고 "신애론"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행한 강론은 "아가"로 묶었다.
그는 자신의 저술과 설교에서 성서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는 이유를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아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저서와 신심은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그는 다양한 기질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lifluus)란 칭호를 얻었다.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선종한 그는
1170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8세(Pius VIII)는 1830년에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그는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이며, 때로는 '마지막 교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문장은 꿀벌통이고 양봉업(자)의 수호성인이다.


* 가톨릭 굿뉴스에서 발췌
 



 

어머니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으로 수도생활을 택하였고
저술과 설교에서 성서를 광범위하게 인용하여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박아 주기 위한..."
참 목자의 열성으로 사셨던 사제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lifluus)란 칭송을 받으신
클레르보의 사제 성 베르나르도 님이시여

님을 기억하는 오늘
강론을 준비하는 현세의 모든 사제들을 위하여
천상의 축복을 보내주옵소서!...아멘+


 

 



 


사무엘(8.20)

성인명

사무엘(Samuel)
축일 8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1세기BC
같은이름 사뮈엘, 새무얼, 싸무엘



성 사무엘(Samuel)과 엘리 사제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다(1사무 3,1-21)

 

1 소년 사무엘은 엘리 앞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때에는 주님의 말씀이 드물게 내렸고

환시도 자주 있지 않았다.


2 어느 날 엘리는 잠자리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는 이미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하여 잘 볼 수가 없었다.


3 하느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기 전에, 사무엘이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4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예.” 하고 대답하고는,


5 엘리에게 달려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그래서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6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7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8 주님께서 세 번째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는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시는 줄 알아차리고,


9 사무엘에게 일렀다.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은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다.

 

10 주님께서 찾아와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그러자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에서 한 가지 일을 할 터인데,

그것을 듣는 이마다 두 귀가 멍멍해질 것이다.


12 그날, 내가 엘리 집안을 두고 말한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거슬러 이루고야 말겠다.


13 나는 엘리에게, 그의 죄악 때문에 그 집안을 영원히 심판하겠다고 일러 주었다. 그 죄악이란,

엘리가 자기 아들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책망하지 않은 것이다.


14 그러므로 나는 엘리 집안에게,
그 집안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는 영원히 속죄받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였다.”

 

15 사무엘은 아침까지 누워 있다가 주님의 집 대문을 열었으나,
엘리에게 환시에 관하여 알리기가
두려웠다.


16 그때 엘리가 “내 아들 사무엘아!” 하고 부르자, 사무엘이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엘리가 물었다. “그분께서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그것을 나에게 숨겨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하신 모든 말씀 가운데 한마디라도 나에게 숨기면,

그분께서 너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실 것이다.”


18 사무엘은 엘리에게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자 엘리는 “그분은 주님이시니,

당신 보시기에 좋으실 대로 하시겠지.” 하고 말하였다.


19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20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1 주님께서는 실로에서 거듭 나타나셨다.
주님께서 실로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것이다

 




히비르인들이 판관 시대의 느슨한 동맹 체제에서
중앙집권적 왕정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가 기원전 11세기에
활약한 성 사무엘('하느님의 이름' 또는 '그의 이름은 하느님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당시 유대인 남자가 맡을 수 있는 지도자 역할,
즉 제사장 · 판관 · 예언자 · 군대 지휘관 등을 모두 맡은 인물이었다.
사무엘 상권 1-16장에 나타난 사무엘의 활동은
주로 사울 왕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에브라임 산악지대에 사는 라마다임 출신의 수브 사람 엘카나와
그의 아내 한나는 야훼께 빌어서 아기를 얻었는데(1,1; 1,20),
이렇게 태어난 아기를 한나는 나지르인의 서원으로 실로 성소에서 봉헌하였다
(1,11. 28; 2,11; 3,1).
엘리 사제 밑에서 야훼를 섬기던 소년 사무엘은
어느 날 밤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것은 불경한 아들들을 둔 엘리의 집안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었다(3장).
이 계시는 사무엘이 ‘야훼의 예언자’로서 활동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4-6장은 히브리인들이 블레셋군에게 패하여 계약의 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가문이 멸망하고, 실로 성소가 파괴된 내용이다.
블레셋에게서 계약의 궤를 돌려받은 후에 사무엘은 판관이 되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경고하였고,
블레셋의 침략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였다(7장).
그는 이스라엘의 판관으로서 죽는 날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해마다 베델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한 후 자신의 집이 있는
라마(Ramah)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두루 다스리며 야훼께 제사드릴 제단도 쌓았다(7,16-17).
사무엘은 나이가 많아지자 자신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를 판관으로 임명하고
브엘세바(Beer-Sheba)를 다스리게 하였다(8,1-2).
이어 서로 다른 왕정 설립 설화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사무엘은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 그중 하나(9,1-10. 16)이다.

한편 또 다른 성서 구절(7,3-8,22; 10,17-19; 12,1-25)에서는
백성들이 직접 투표로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였다고 나온다.
하지만 사무엘은 왕정 설립 요청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요 왕인
야훼를 변절하는 행동이라고 비난하면서 마지못해 왕정 설립에 동의하였다.
사무엘은 특히 고별사에서
백성들에게 야훼의 명령을 거역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12장).
15장에 보면 사무엘과 사울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갈라진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고,
야훼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던 것을 후회한 일을 생각하며 통곡하였다(15,34-35).
이러한 내용은 앞선 성서 구절(13,13-14)에 이미 나와 있다.
다윗과 함께 나욧으로 내려가 있던 사무엘을 찾아간 사울이
그 앞에서 예언 황홀경에 빠져 버린 이야기(19,18-20)를 비롯하여,
사무엘은 죽은 후(25,1; 28장)에도 혼백으로서 계속해서
사울의 왕정사에 등장하고 있다.

 
* 가톨릭 굿뉴스에서 발췌
 
Gounod, Charles Francois (1818~1893)

 

 



 


시대의 부응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왕정을 인정하고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옹립했던 선지자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통치자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눈물을 떨군 성조 사무엘 님이시여


정치, 사회 지도자들이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님의 사랑받는 일꾼이 되도록
천상의 기도로 이끌어주옵소서!....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