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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의록)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2 /제7회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엘로힘의 기억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21 조회수610 추천수1 반대(0) 신고


*상당히 많은 분량임을 먼저 알려 드립니다.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의 성서백주간 2

 

제7회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엘로힘의 기억(탈출 2,23-25)

 

안녕하십니까?

예, 옛날에 옛날에 어떤 아이가 하나 살았는데요. 굉장히 신앙심이 깊었던,

그러니까 성당에 열심히 다니고 하느님을 잘 믿었던 아이인 거 같애요.

그 아이가 어느날 주일 학교에서 요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 이거 정말 대단한 이야기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성당에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가 와 가지고 "요즘에 뭘 배웠냐?" 그러니까,

"요나 이야기를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그 아저씨한테 신나게 얘기를 해 준 거예요.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 이렇게 듣고 있다가 "야, 너 정말 믿을 수 있겠어? 

고래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이나 있다가 살아 나왔대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난 정말 믿기 어려울꺼 같은데." 

 

그러니까 이 꼬마가 그 아저씨한테 "아저씨 말씀이 좀 그런 거 같애요.

제가 나중에 천국에 가면 천국에 가서 요나 예언자를 만나면 정말로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건지 꼭 물어 볼께요."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 약간은 좀 장난기가 있었던 분이었나 봅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야, 그런데 요나 예언자가 천국에 없을 수도 있잖어!"

그러니까 아이가 아저씨를 이렇게 바라보면서 뭐라고 그랬냐하면,

"그럼 할 수 없지요. 아저씨가 물어 보세요." ^^*~~~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저랑 이렇게 성서를 읽는 과정은 성서를 하나의 문학 작품처럼 읽어 나가는 겁니다.

물론 저희가 갖고 있는 신앙심을 전제로 하지마는 일종의 하나의 문학작품처럼

성서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뜯어 가면서 읽어 가면서 거기에 대해서 어떤 신학적으로

성찰도 해보고 또 묵상거리도 발견해 봅니다만, 약간은 좀 뭐라고 그럴까요?

 

하나의 이렇게 뜯어 가면서 보니까 자칫 잘못하면은 이런 좀 전에 말씀드린

그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성서를 읽고 이해했던, 알아들었던 그 마음을

저희들이 조금 잃어버릴 수도 있어요.

 

그거는 제 생각에 제가 이렇게 강의를 해 드리고 저희가  성서 백주간을 하는 그런

목적은 될 수가 없는 거 같애요.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는 마음으로

문학작품을 대하는 마음으로, 비평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읽고 거기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들어보자라는 그런 마음도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마음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 주시는 말씀을 그냥 있는 그대로 옛날에 내가 어릴적에 우리 엄마들 무릎을

베고 옛날 이야기를 들었던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읽어보자라는 두 가지 마음이

저희들한테 같이 필요하다는 것을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따라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강의 드리는 이와 같은 방법이 성서를 읽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는 유일한 길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못 박아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어땠을까요?

신학공부를 하기 전이랑 신학공부를 한 후랑, 언제가 더 하느님을 믿기 쉬웠을까요?

공부를 하기 전입니다. 공부를 하면은 좀 더  나아질까 생각했는데 신학공부를 해서

보니까 조금 더 이렇게 하느님을 믿는 마음이 조금은 쉽지 않구나! 아, 내가 옛날에

단순하게 가졌던 고런 마음들이 참 좋은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좀 다른 길로 접어

들었구나! 그런 마음에 조금 이렇게 후회를 한 적도 있는 거 같습니다.

 

예, 아무튼 지금 저희들이 탈출기를 읽어가면서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되짚어 가는 거냐하면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렇게 이집트의 노예살이로부터

자유로운 해방된 민족으로의 그 삶을 찾아가게 되었는가? 라는 관점에서.

 

또 다른 관점으로는 그렇게 이제 하느님을 잊고 살았던 하느님을 선조들의 신에

관해서는 선조들이 누군가 어떤 신의 도움을 받았었다는 기억을 갖고 있지마는

그 하느님과의 관계는 끊어졌던, 더 이상 하느님과는 함께 하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다시 하느님을 알아가고 만나 가는가?

 

우리 신앙생활의 틀에서 보면은 조금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어느 순간 좀

냉담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랬다가 다시 하느님을 알아가는 그런 과정인 것처럼

성조들은 하느님과 이렇게 정말 대화하다 그렇게 살았다가 이집트에 와서 그런

하느님과의 관계가 좀 멀어졌다가 다시 하느님을 만나가는 그런 어떤 복층의

구조로. 따지고 나면 상당히 여러 층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복층의 구조로 저희들이

탈출기를 읽어나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예, 오늘은 우선 다음 단락 2,23-25에 대해서 먼저 본문을 읽고 해설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 대목을 저는 어떻게 제목을 붙였냐 하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엘로힘의 기억'이라고 붙였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보면은 저희들이 약간 호칭에 약간은 좀 방점을 두고 좀 생각을

하는데 여기 23-25절에서는 야훼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엘로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전에도 말씀드렸지마는 구약 성경에서 엘로힘이라는 말이

등장할 때는 우리가 조금은 주의해야 합니다.

 

어떨 때는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하느님을 가리키는 어떤 고유한 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어떨 때는 아주 일반적인 의미의 그냥 신으로, 이집트의 신, 바빌론의

신, 앗시리아의 신, 시리아의 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아주 일반 명사로서도

사용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 말 성경에서는 그걸 구별하지 않고 다 하느님이라고, 엘로힘이라고.

그러면 자동적으로 그냥 하느님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고 번역에 어떨 때는 약간의

좀 어감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저희들이 주의 하면서 여러분들도

우리 말 지금 주교회의에서 나온 성경을 읽으실 때 하느님이라고 번역해서 약간

좀 문맥이 안 통한다라고 싶으면 한번쯤은 일반 명사로서 그냥 '신'이라는 그런

뜻으로 한번 대입해서 문자의 의미가 통하는지를 생각해 보실 필요도 있습니다.

 

예,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집트 임금이 죽었다."라고 얘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나온 이집트 임금은 누굴까요? 어떤 파라오일까요?

앞서 얘기한 이스라엘을 박해하던 그 파라오일꺼다.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탈출기를 한번쯤은  어떤 현상이 생기냐 하면, 일정한 한두 쳅터, 세 쳅터

(chapter, 장) 이야기한 다음에 앞의 내용 전체를 마지막에 가서 요약하는 경우가

생겨요. 따라서 여기서 보면은 왜 탈출기 1장을 시작을 하면서 요셉을 모르는 새

임금이 등장했다. 뭐 그런 대목들이 나오잖아요. 그전에 요셉을 알던 이집트

임금이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탈출기 안에서는 자꾸 맨 마지막 부분에 가서 전체를 요약하는,

지금 2,22-25은 2장 전체를 요약하고 있는 그와 같은 대목이다 보니까 여기서

나오는 이집트 임금이 요셉을 알던 그 이집트 임금이라고 읽을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탈출기 이야기를 쭉 읽는다면 여러분들이 우리들이 함께 얘기한 대로

또 앞에서 추측한 대로, 아, 람세스 2세가 죽었나보다 이렇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자,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여기서 읽는 것은 두 동사가 같이 나오죠.

23절: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집트 임금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탄식했다'라는 말과 '부르짖었다'라는 한 가지 동사로는

처지를 다 설명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두 개가 겹쳐서 중복돼서 하는 겁니다.

우리 말 표현에 이런 게 있지요. 누가 이렇게 얘기하는데 얘기가 잘 안 통해요.

그럴 때 "아, 난 너랑 얘기하는 게 답답해!" 이럴 수도 있겠지만, 동사를 중복해서

쓰지요? "답답해서 죽겠어!" ^^*~~~

 

거기서는 진짜 어떤 자살의 의도가 있는 건 아닙니다. ^^*~~~

하지만 그런 거를 과장하는. 심지어는  "맛있어서 죽겠어!" 도 있으니까

'죽겠어'는 강조하는 표현이겠습니다. 여기서는 '탄식하다' 그리고 '부르짖다'라는

중복 사용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힘든 처지에 있는지가 강조가 됩니다.

 

예, 그리고 앞선 사내아이의 살해는 여기서 반영이 됩니까?

그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앞서서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억압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었잖아요. 노역을 시키는 거랑, 아이들을 죽이는 거랑.

아이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침묵합니다.

 

아이들을 죽이는 이야기는 모세가 살아나서 미디안 땅으로 가는 고 이야기까지만

연결이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점을 갖는 것은 노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탈출기의 이야기가 쭉 진행이 되면서 모세가 파라오에게 오지요?

 

파라오에게 와서 첫 번째로 " 내가 우리 민족을 데리고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

가겠습니다. 걸어가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라고 얘기

했을 때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방법도 뭡니까? 아이들을  죽이는 겁니까,

아니면 노역을 가중시킵니까? 노역을 가중시킵니다.

 

따라서 아이들에 관한 문제는 앞에서 굉장히 설화적인 이야기로 그리고 모세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로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 문제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 언제 다시 등장할까요?

그랬다가 나중에 마지막 열 번째 재앙에서 이집트의 맏아들이 죽잖아요.

그것을 하나의 동태복수법처럼 탈출기의 저자는 이해하는 겁니다.

 

이집트의 임금이 이스라엘의 아이들을 죽게 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 하느님은 이제 이집트의 아들들을 죽게 한다라는 동태복수적 의미로

그것을 이해하는 어떤 신학적인 뉘앙스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아무튼 아이들에 관한 그런 이야기들은 띄엄띄엄 등장하는데 그런 부역에 관한,

노동에 관한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흐르는 주 흐름이 됩니다.

 

예, 그들의 부르짖음이 이제 하늘의 엘로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고역에 짖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

여기서 우선 여러분들 혹시 이런 표현 들어 보셨습니까?

23절a(23a) 23절b(23b) 라는 표현입니다.

요즘에 우리 말 성서 해설서를 보면은 ㄱ,ㄴ 이렇게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냥 성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23a,b 이렇게 얘기 하는데

모든 히브리어 문장은 둘로 나뉘어집니다. 히브리 말 텍스트를 보면은 둘로

나누는 표시가 이렇게 있습니다. 그 표시에 있는 앞 부분을 a, 표시에 있는

뒷 부분은 b 인데 32b 부분을 저희가 직역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부르짖음이 노예살이로부터 엘로힘에게 올라갔다."

직역한 표현입니다. 조금 이상합니다. 직역하다보니까.

부르짖음이 그들의 노예살이로부터 엘로힘에게 올라갔다. 따라서 엘로힘은

높은 곳에 있는 겁니까, 낮은 곳에 있는 겁니까? 높은 곳에 있는 겁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이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부르짖음이 너무너무 커서 이제 엘로힘이 있는 곳까지 올라갔대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엘로힘이 있는 곳은, 하느님이 있는 곳은 하늘이죠?

 

우리가 하느님을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하늘과의 연관성이잖아요.

하늘까지 그렇게 올라갔다라는 그런 의미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노역이 하늘까지...

 

인간 세상과 하느님 세상은 같이 붙어 있나요, 나뉘어져 있나요?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부르짖음이 하늘까지 울렸다.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 얼마나 커다랗게 세상을 울렸는가? 라는

표현으로 우리가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여튼 지금 엘로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지 않은 겁니다.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에 있는 것이고 거기까지 부르짖음이 전달된 겁니다.

그리고 24절에서는 그 이스라엘 자손들의 외침이 마치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그냥 편안하게 쉬고 있는 어느 신을 깨우는 것처럼 묘사가 됩니다.

 

그리고 엘로힘을 주어로 하는 네 문장이 연속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엘로힘은 들었다. 그리고 엘로힘은 기억했다. 그리고 엘로힘은 보았다.

그리고 엘로힘은 알았다." 들었다, 기억했다, 보았다, 알았다라는 네 동사가

연속해서 연결이 됩니다.

 

24-25절: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

 

※ 동사: 듣다. 기억하다. 보다. 알다

 

하나의 연결 고리들이 이어지는 것처럼 다다다다 이렇게 굉장히 빠른 템포로

등장하게 됩니다. 엘로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음을 듣고 그것을 통해 엘로힘은

성조들과의 계약을 기억하게 되고 그 기억과 함께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게

되고 그 살펴봄과 함께 엘로힘은 이스라엘의 처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알게 된 자신의 앎을 통해서 엘로힘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탈출기 3장부터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무엇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탈출기 3장에서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된 엘로힘이 취하는 행동은 뭐죠?

모세를 부르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지죠. 뭔가를 보고, 듣고, 그리고 알게 되었다는 것.

우리가 TV를 보는데 어떤 사람의 어려운 처지가 나와요. 아프리카에 있는

어린이들, 누구의 어떤 어린이들. 그럼 우리가 그것을 보고 액션에 옮기게 되죠?

어떤 액션에 옮깁니까? ARS 버튼을 이렇게 누르게 됩니다.

 

예, 저희 어머님이 그걸 그렇게 누르세요.^^*~~~

제가 저희 어머님을 사제관에 이렇게 모시고 사는데 근데 사제관 전화로 누르면은

그게 어머니 통장에서 빠져 나가는 게 아니라 ^^*~~~ 제 통장에서 빠져 나갑니다.

그러니까 아시는 건 어머니가 아시고 행동은 제가 하는 거죠. ^^*~~~

웃으시라고 드린 말씀입니다.

 

하여튼 뭔가를 보고, 듣고, 알게 되면은 그 다음에는 하나의 그 다음에 액션이

나오게 되는 것. 그 사람들이 움직이게 된다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는 걸 들으셨죠?

렉시오 디비니아의 기본적인 원칙은 독서하는 것(lectio), 그 다음에 묵상하는 것

(meditatio), 그 다음에 기도하는 것(oratio), 그 다음에 관상하는 것(contemplatio)

이게 본래의 렉시오 디비나의 기본적인 네 단계입니다.

 

그런데 요즘 특히 예수회 계통의 신부님들이 렉시오 디비나를 설명하시면서

거기에 그거를 일곱 단계로 늘리시는데 그중에 한 단계가 뭐냐하면,

악시오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거를 영어로 표현하면 액션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삶의 현장에서 그것을

우리가 살아야 한다라는 겁니다. 무엇인지 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특별한 일을 하시라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느끼면서 살아 있다는 것, 살아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반성이 필요한 겁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요리를 하면서, 아니면  집안 청소를 하면서, 아니면 사회적으로

어떤 작은 활동, 성당에서 어떤 활동을 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그것이 액션으로 바뀌게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된대는 겁니다.

 

그건 뭡니까? 지금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을 때에 내가 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게 되거나 아니면 지금까지 아무런 반성없이

그냥 해 왔던 것을 하지 않게 되거나 좀 뭔가 그런 삶의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도 하느님께서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고, 그 다음에 어떤 행동으로 그것이

옮겨지는가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들 삶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들은 과연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내 삶을 변화시켜 가고 있는가? 와 

맞물려서 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 24절: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그의 계약.

우리 주교회의 성서에서는 '당신의 계약'이라고 되어 있는데 직역하자면 3인칭

소유격이 되어 있습니다. '맺으신 그의 계약'을 기억하셨다라는 직역의 의미겠지요.

 

이것은 창세기 15장, 17장, 28장, 35장에 등장하는 계약입니다.

15장과 17장은 여러분들 작년에 저한테 지루하게 1년 동안 들으셨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시는 계약입니다. 한번은 동물들을 잡아 놓고 불모양으로 동물들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면서, 또 한번은 할례를 계약의 징표로 삼으시면서 맺으신

그와 같은 계약입니다.

 

15장, 17장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고 28장과 35장은 모두 베텔이라는 

장소에서 야곱과 맺으시는 그와 같은 계약입니다. 한번은 야곱이 에사우로부터

도망쳐서 라반에게 도망쳐 가는 과정에서 베텔에서 머물게 되는데 거기서

하느님이 야곱에게 하시는 약속이 있고,

 

두 번째는 이제 라반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베텔에 또 한번 머무르는데

거기서 하느님이 야곱과 맺으시는 계약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계약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즉시 창세기

15장, 17장, 28장, 35장을 떠 올려야 합니다.

 

 

예,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창세기에서 등장하는 이와 같은 계약이

모두 계약이라고  보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다 대고 일방적으로 하시는 그와 같은 약속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를 좀 뭐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제가 존경하는 어느 변호사님한테 이게 현대법적인 의미로 이게 계약입니까?

그랬더니 이거는 현대법적으로 보면은 '유증' 아니면 '증여'의 개념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계약이라고 볼 수 있는 면도 있고, 계약은 쌍방간에 있는 것인데

그냥  하느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어떤 단독, 법적인 얘기로 보면은 ,

오늘날 개념으로는 계약이라고 볼 수 없는 어떤 '단독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라는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구약에 있는 계약이라는 말은 여기서 분명히 계약이라고는 쓰였지마는

하지만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맹세'라고 우리가 변역 같은 것도

가능합니다. 상대방이 그렇게 하든 그렇게 하지 않든 조건 없이 나는 당신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겠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받든지 아니든지 그것은 당신의 자유

입니다라는 그런 어떤 틀 위에서 우리들이 이해해 볼 수 있겠습니다.

 

자, 텍스트를 이렇게 보고 난 다음에 우리들이 생각해 볼 것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23-25을 보면서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등장합니다. 단지 21-22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는 히브리라는 말이 줄곧

등장하다가 이제 히브리라는 말은 사라지고 다시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주석가들은 이것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1-22을 쓴 사람과 23-25을 쓴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한 사람은 그 민족을

지칭하면서 히브리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이고, 다는 사람은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이다라고 얘기하는 주석가들이 있고,

 

반면에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이 저자는 꼭 다른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을 거 같고, 단지 그가 이렇게 얘기할 때, 이스라엘의 자손들

이라고 얘기할 때는 하나의 성조들과의 역사 안에서 그것을 얘기하는.

 

히브리인들이라고 불렀을 때는, 그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으로 하층 민족이라는

것을, 그렇게 부유하지 않은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뭐 어떤 층일까요?

농민, 노동자 층 뭐 이와 같은 일차 생산에 종사하는 그런 어떤 사회적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가장 대우 받아야 되는 그런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대우 받지

못하는 그런 어떤 하층 계급이라는 개념이 그 2,1-22에서는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때그때 거기 어감에 맞는 표현을 쓴 것뿐 여기서 다른 저자라고 보기는

조금 어렵지 않느냐, 부족하지 않느냐? 라고 주장하는 저와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 아무튼 이제부터는 히브리라는 말은 잘 등장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다가 이제 어느 단계가 지나면은 탈출기 후반부부터 넘어

가기 시작하면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라는 표현에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표현으로

표현 자체가 점점 변화해서 텍스트 안에서 등장하는 것을 저희가 관찰해 볼 수

있습니다.

 

자,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 두 번째로는 창세기의 계약, 버릿이라는 히브리 말

뿐만 아니라 사실상 탈출기의 중심 사건이자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시나이 버릿,

시나이 계약 역시 외형적으로는 쌍방적인 계약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보입니까?

"나는 너희에게 땅을 줄 것이고 너희는 나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라는 쌍방적인

내용으로 보이게 됩니다.

 

하지마는 그것이 갖고 있는 외적인, 법적 그리고 제의적인 약속이라는 측면에서

쌍방간의 계약처럼 보이는 그것을 좀 뛰어 넘어서,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이 얻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도 역시 쌍방간의 계약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들도 왜 여러분들의 자녀들과 그런 약속들 하시잖아요.

"너 공부 열심히 해서 뭐 하면은 엄마가 너한테 뭐 사줄께!"

아, 그런 거 안 하세요? 요즘은?^^*~~~

뭐하면은 어떻게 해 줄께. 그러고 나서 엄마, 아빠가 얻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냥 다 니가 잘 됐으면.

따라서 자녀를 대하는 부모님들은 하느님을 닮아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계약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만

하지만 이것을 정말로 계약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이 정말

얻는 게 정말 무엇이겠는가?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은 그 모든 것들은

다 인간 중심적으로 인간의 행복, 안녕, 평화. 이스라엘의 어떤 공동체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 그러면서 그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것.

이런 것들의 어떤 가치, 인간 중심적인 그런 성서의 틀을 저희들이 만나게 됩니다. 

 

세 번째로는 아까 드린 말씀입니다.

탈출 2,23-25에서 하느님의 보고, 들음 즉 그 인지와 인식이 하느님의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읽게 되는데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그와 같은 것들을

사실은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조금은 생소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도 나오고 신약 성경에서도 인용되는 성서 구절 중에 하나,

"너희는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할

것이다."라는 그와 같은 세대의 모습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TV에 나오면은 맨 처음엔 그걸 감동해서 보고

ARS도 누르고 그렇게 해서 뭐 1주일, 한 달 뭐 그러면서 그러다가 한 두세 달쯤

됐을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지요? TV를 돌리다가 그런 프로그램이 나오면은

돌립니다. ^^*~~~ "아, 또 나왔어!"  매일 매일 감동하는 건 좀 피곤한 거 같애요.

그러니 "에이, 또 나왔어!" 돌리게 됩니다.

 

유명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자기 집에 돌아오는데 집 앞에 노숙자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첫날 이렇게 보고나서 "저녁 같이 먹읍시다." 그러면서 집에 데려가서

저녁도 먹이고 뭐 이렇게 해서 잘 돌려 보냈대요.

 

둘째날 갔는데 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번에는 돈을 주면서 "길에 있지 말고

어디가서 따뜻하게 자도록 하십시오." 셋째날 갔는데 또 있는 거예요.

요번에는 모르는 척하고 지나갔대요. 네째날 갔는데 또 있는 거예요.

요번에는 집에 들어가서 경찰에 신고 했대요. ^^*~~~

이게 사실은 우리들 모두의 어떤 모습입니다.

 

멀리 있는 이웃을 한번 도와주는 거는 그거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마는 정말 공동체라는 건 뭡니까? 나랑 상관 없는 그 누구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공동체라는 거는 크게 얘기하면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나의 가족을 돌보는 것. 또 그런 가족의 개념을 조금 더 넓게 생각해서 나의

공동체. 우리가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사람들을 돌보는 것. 그런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또 얼마나 우리에게 커다란 십자가가 될 수

있는지. 또 그와 같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하느님의 도움과 저희들의 성찰이

필요한 것인지에 관해서 우리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탈출기 2장의 내용은 성경의 다른 구절 특히 신약 성경에서도 인용이

됩니다. 사도 7,20-20을 보면 , 여기서 보면 스테파노가 연설을 하는 그와 같은

부분인데 그 스테파노가 지도자들 앞에서 연설을 하면서 탈출기의 내용을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탈출기의 내용과 조금

다릅니다.

 

"그때에 모세가 태어났는데 그는 하느님 보시기에 귀여운 아기였습니다."

보시니 좋은 잘생긴 아기였습니다. "그는 석달 동안 아버지의 집에서 자라다가

버려졌는데, 파라오의 딸이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키웠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이집트인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입니까? 모르는 내용입니다. 탈출기에는 안 나옵니다.

 

"마흔 살이 다 되었을 때" 이거는 탈출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

"그의 마음에 자기 동족 이스라엘 자손들을 찾아볼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느날

그는 자기 동족 가운데 한 사람이 부당한 일을 겪는 것을 보고 이집트 사람들을

쳐죽여 학대받은 그 사람을 도와주고 그를 위하여 앙갚음을 해 주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동족들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을 동족들이

깨달을 줄로 생각하였지만" 중요한 건 뭡니까?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튿날 모세는 서로 싸우고 있는, 쭉 나가다가 인제

자기 동족에게도 모세가 어떤 얘기를 듣는 겁니까? "어제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나도 죽일 작정이오?' 그 말에 모세는 달아나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살이하여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예, 우리가 알고 있는 탈출기 2장의 내용을 조금 변형해서 얘기했습니다만 해석은

좀 다릅니다. 이거를 일반적으로 유대 문학에서는 '미드라쉬'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미드라쉬란, 기본적인 텍스트를 조금은 해석하고 새로이 이해해서

제시하는 그와 같은 방법입니다. 뭔가 좀 덧붙여 있습니다.

 

스테파노는 여기서 하나의 탈출기 2장에 대한 미드라쉬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 의도는 뭘까요? 스테파노는 신약에서 등장하는 인물이지요? 사도행전에서.

첫 번째 순교자이고 부제입니다. 그러니까 스테파노는 유다의 지도자들 앞에서

연설하면서 누구에 관해서 지금 얘기 할려고 하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근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지요? 마치 누가 박해를

받듯이? 모세가 박해를 받았듯이.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따라서 탈출기 2장에서 사실 2장이 갖고 있는 본래의 텍스트는 파라오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렇게 억압했고 모세는 파라오의 왕궁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저항하다가 그 어떤 노예 생활에 익숙해진 자신의

민족에게도 이해를 못 받고 결국은 도망가게 되었다.

 

그런 같은 민족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다라는 것보다는 파라오의 억압에 더 

방점이 찍혀 있는 탈출기 2장인데 스테파노는 여기서 그것을 약간 뒤바꿔서

파라오의 문제가 아니라 동족으로부터 거부당하는, 동족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그와 같은 모세의 운명과 예수 그리수도의 그러한 십자가를 비슷하게 조화시키

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히브리서 11장은 여러분들 한번 따로 시간을 내셔서 읽어 보셔도 좋을

굉장히 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그런 작품입니다. 항상 어떤 말로 시작을 하냐

하면, "믿음으로써"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믿음으로써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저자는 창조 이야기, 성조들의 이야기, 그리고 모세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설명합니다.

 

히브 11,23-27

"믿음으로써,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 그의 부모는 그를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아기가 잘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임금의 명령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써,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고

불리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죄의 일시적인 향락을 누리기보다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보물보다 더 큰 재산으로 여겼습니다. 앞으로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기도 전에, 탈출기의 내용과 딱 맞아 떨어집니까?

아니죠? 모세는 아직 하느님을 모릅니다. 3장에 가서야 만나는데 하지만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모든 것을 모세는 이미 뭐 텍스트에는 안 나타나지마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짐작하는 겁니다.

 

"믿음으로써, 그는 임금의 분노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분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굳건히 견디어 냈습니다."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동족으로부터 오해 받고 있는 모세의 모습은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모세가 이집트의 영화와 이스라엘의 고난의 길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였는지,

그 선택의 이유는 뭔지, 믿음으로써 그리고 선택의 결과는 무엇이었는지 이런

것들에 관해서 조금 다른 관점에서 탈출기 2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뜻으로 얘기하면 뭡니까? 사도 행전의 스테파노는 탈출기를 그렇게 이해했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탈출기를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우리들의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탈출기 2장을 통해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에

관해서 우리들도 우리들 나름대로 또 새로운 이해를 해 볼 수 있겠습니다라고

우리가 거기에 덧붙여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 그러면 이제는 탈출기 3장, 4장으로 넘어가서 우선 3,1-6까지 텍스트를 읽고

설명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 탈출기 3장과 4장은 구약 성경 전체를 꿰뚫는 굉장히 비중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야훼는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고 있고 그리고 탈출기 전체의

프로그램, 그리고 나아가 탈출기를 넘어서 여호수가기까지 이르는 약속의 땅을

정복할 때까지의 광대한 계획이 3장8절, 10절, 12절, 등등에서 제시가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와 같은 야훼를 대하는 모세의 모습은 굉장히 이례적입니다.

그 첫번째로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거는 탈출 3,4-17에 이르기까지 야훼와

모세가 함께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대화가 굉장히 깁니다.

 

거기에 글쎄요. 마태오 복음에서 5장, 6장, 7장에 이르는 굉장히 긴 예수님의

어떤 연설이 있고, 뭐 신명기에서도 모세의 그와 같은 연설이 등장합니다만

탈출기 3장, 4장에 등장하는 아훼 하느님과 모세의 긴 대화만큼 그렇게 많은

분량의 대화는 굉장히 예외적입니다. 그 대화 내에서 모세는 무려 다섯 번이나

하느님의 부르심에 맞섭니다.

 

탈출 3,11: 제가 무엇이라고 그들을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탈출 3,13: 제가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탈출 4,1: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이렇게 하면 저는 어찌합니까?

탈출 4,10: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

탈출 4,13: 주님 죄송합니다.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

 

이정도 되면 군대 용어로는 명령 불복종입니다. ^^*~~~

다섯 번이나 거부를 해요. 모세의 질문에 응답하고 그를 설득하는 긴 과정에서

야훼의 어떤 수고를 통해 텍스트는 하느님의 강한 구원의지를 보여 줍니다.

 

이 과정에서 자주 반복되는 동사들이 있습니다.

동사: 보다, 듣다, 보내다, 가다, 믿다. 말하다

이 동사들을 통해 부르심으로부터 시작하여 파견에 이르는 과정이 채워져 있습니다.

 

이 좀 재미있지요? 제가  본당 사목을 하다보면, 본당에서 이렇게 어떤 단체장이나

이런 사목위원들을 임명해야 할 경우가 있잖아요. 제가 지금 세번째 본당인데

제 경험으로 본인이 하겠다는 분들을 시키면은 거의 예외 없이 실패합니다.^^*~~

잘 안 돼요.

 

본인이 안 하겠다는 분을 어떻게든지 설득을 해서 아, 저분이 하면 참 좋겠다.

근데 그런 분들이 대개 겸손해요. 겸손해서 어떻게든지 안 하시려고 그러십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을 어떻게든지 설득을 해서 하시게끔 만들면은 일단 일을 맏으신

다음에 굉장히 이렇게 성실하게 하시는 거 같애요.

 

우리나라의 문제도 그런 거 같애요. 우리나라 정치가 문제가 좀 많잖아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정치인들은 다 욕 먹습니다.

저 혼자 이렇게 누워서 생각하다가 아, 저게 하겠다하는 사람들을 시키니까

저렇게 되는구나. ^^*~~~ 안 하겠다는 분들을 시켜 가지고 하시도록 하면은

그러면은 결과가 더 좋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거 혹시 선거법에 걸리는 건 아니겠죠? ^^*~~~

 

예, 탈출 4,18로부터 시작되어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전체적인 장면을

서서히 미디안으로부터 이집트로 옮겨 오게 됩니다. 모세는 더 이상 거부 없이

야훼의 명령을 따라 장인의 집을 떠나고 야훼는 앞으로 모세가 만나게 될 파라오에

대한 그런 예고를 하게 됩니다.

 

이제 동족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모세의 아들은 할례를 받고 야훼는 아론을

광야로 불러 모세의 도착을 준비하게 됩니다. 3장과 4장의 내용입니다.

 

조금 더 하나하나 자세하게 들여 다 보지요.

자, 탈출 3,1-6. 저는 다음과 같이 제목을 붙였습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 1. 1이 있다는 거는 2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기 계시 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기 계시

후에,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다는 겁니다.

 

곧 자기 계시 1, 부르심 1.

자기 계시 2, 부르심 2.

자기 계시 3, 부르심 3.

이런 어떤 리듬으로 탈출기 3장이 진행 된다는 것을 숫자로 어렴풋이 힌트를

드렸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8회 하느님의 자기 계시 1/ 탈출 3,1-6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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