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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회 - 사랑을 삼켜 버리다 [삯꾼 우대 규정]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22 조회수372 추천수1 반대(0) 신고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마태오 22, 34 - 40 /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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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교사가 물었습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을 물었던 것입니다.
율법 시대에서도 율법 아래에서는 결코 사랑이 무시되지 않았습니다.
율법 아래에서의 사랑과 믿음 아래에서의 사랑이라는
두 가지 측면의 사랑 문제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도 사랑의 문제는 부정되지 않았다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사랑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지금의 시대에서 견주어 보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불완전한 규정들과 방침들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수석사제들, 원로들에게서 율법의 규정들은 대단히 중요시 되었습니다.작금의 신앙 지도자들, 원로들,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도 온갖 규정들과 방침들은 중요시 여겨집니다.
공동체와 집단에는 불완전한 규정들과 방침들이 촘촘하게 박혀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정한 규정들과 방침들은 기계의 부속품과 같은 것입니다.
공동체와 집단을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계의 부속품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기계의 부속품들이 과연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정하고 만들어 낸 여러가지 규정들과 방침들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정밀하게 기계의 부속품들을 잘 만들어 내었다고 해도 단지 기계일 뿐입니다.
인간의 구원 문제에서는 불완전 할 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히 인간의 불완전한 규정들과 방침들에 의존하는 일은
인간 자신을 자랑하고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이 아니십니다. 
불완전한 규정들과 방침들에 의존하는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이미 사랑 밖에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도 사랑은 중요하다며 말하고 있었지만
이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입니다.
인간이 정한 불완전한 규정들과 방침들이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공동체 및 집단의 유지를 위한 필요한 기계의 부속품들에 의지하는 것과
살아 움직이는 사랑을 따르는 것은 서로 다른 천지지간의 차이가 있는 법입니다. 
인간이 기계 부속품 속에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인간의 그와같은 도구화를 넘어 인간 자체를 사랑하는 일은 너무나 다른 차원이 됩니다.

율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게 아닌 것입니다. 
인간이 정한 규정들과 방침들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게 아니다는 뜻입니다.
온갖 율법 아래에서의 규정들과 방침들은 사람을 위해서 있습니다.
사람이 온갖 규정들과 방침들을 위해서 있는게 아닙니다.
이렇게 율법 아래에서도 사랑이 중요했지만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수석사제들, 원로들은 
율법 아래에서의 사랑 보다는 율법 아래에서의 규정들과 방침들에 치중했습니다.
인간의 영적인 나태함 (영적인 소경) 때문에 사랑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와 집단 이익을 위한 기계의 부속품들을 더 중요시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따르지 않고 규정들과 방침들을 더욱 따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을 없애 버리고 맙니다. (사랑을 십자가에 매답니다)

율법 아래에서의 사랑은 율법이 사랑을 죽여 버린다는 설명입니다. 
그리하여 율법 아래에서의 사랑은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이 될 뿐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인간이 정한 불완전한 규정들과 방침들을 더 중시함으로써 
결국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랑을 없애어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정하는 여러 규정들과 방침들은
완전할 수가 없고 불완전한 기계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집단의 이익과 편리를 위한 온갖 규정들과 방침들은

애초의 목적인 사람을 위함에서 벗어나서 사랑을 완전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겉으로는 사랑을 표방하지만
실은 공동체 안에 있는 '속 이득'을 취득하기 위한 규정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악한 속성들에 의해서 영적인 타락(나태)와 함께 온갖 규정들과 방침들이
공동체 집단을 움직이게 하는 기계의 부속품으로써 처음부터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정한 여러 규정들과 방침들은 결국 사랑을 죽여 없애 버리게 됩니다. 

반대로 믿음 아래에서의 사랑은 어떠할까요.
율법 아래에서의 사랑은 율법이 사랑을 집어 삼켜 버리지만

믿음 아래에서의 사랑은 인간이 정한 온갖 규정들과 방침들의 약점을 수용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  믿음 아래에서
사랑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하느님(사랑)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믿음 안에서 사랑은 (진리 안에서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의 형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인간이 정한 온갖 규정들은 그것이 '하느님이 아니다'는 것을 아는 까닭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하느님의 말씀(복음 진리)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불완전한 규정들은 결코 사랑을 집어 삼키지 못합니다.
소수의 참된 제자들은 언제나 진리 안에서 사랑을 더 중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 믿음 아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내재해 있는 인간을 구원하는 - 구원적인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이웃 사랑으로 퍼지며 사랑을 완전하게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하느님의 사랑'은 (1요한 4, 7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는 까닭에, 하느님의 힘으로 (사랑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이웃 사람에게로 퍼지는 이유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구원적인 사랑'의 형태입니다. 
인간에게서 오는 사랑(인간의 사랑)간의 차이는 '구제적인 사랑'의 형태 차이입니다.
인간을 구제하는 것에서 초월하는 측면이 인간을 구원하는 차원의 형태입니다. 
이와같은 인간 구원의 완전한 사랑의 형태는 인간 규정들 아래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 아래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힘, 곧 사랑의 힘에서 비롯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고
둘째는 사랑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구원적인 사랑'의 형태를 나타내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한 마리 양)을 따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오는 사랑의 형태가 아닙니다. 
인간에게서 오는 사랑의 형태는 '구제적인 사랑'입니다.
인간의 구제적인 사랑은 하느님의 구원적인 사랑에 미치지 못합니다. 

모세가 구름과 비(물)를 가지고 만들어 내는 '모세의 빵'은 없었습니다.
인간 모세는 하늘에서 내려주신 빵으로 (만나로) 배고픔을 구제해 주었을 뿐입니다.
<모세의 빵>이 아닌 <하느님의 빵>이 있습니다.
구제를 포함해서 이것까지 초월하는 구원입니다.
지금 시대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인간의 구제적인 사랑과
다른 차원의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구원적인 사랑'입니다.
'모세의 빵'과 다른 '하느님의 빵'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악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인간을 죄의 죽음에서 보호하시고자 당신의 아드님을 인간이 정한 온 가지의 규정들과 방침들에서 극복할 수 있도록 새로운 힘, 주님의 힘이신 그리스도를, 사랑의 힘으로 "주신" 하느님의 빵 은총입니다.

버려진 이들 때문에
주님께서는 돈을 주시고, 밥을 주시며, 이불과 기저귀 등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은총으로 버려진 이웃들(아기,어른,노약자)에게 악행과 죄행을 저지른다면, 다시말해서 주님의 은총을 도구로 삼아 악의 고통과 죄의 죽음을 저지른다면 이같은 공동체는 '구제적인 사랑'은 있지만 '구원적인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짓들은 오히려 주님의 은총을 욕되게 하는 짓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추함입니다.
버려진 이들 때문에 직장을 얻고,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아서, 자신들의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거친(악한) 삯꾼들과 그 한 통속으로 전락해 버리는 제자들에게서 구원적인 사랑의 형태는 없습니다. 
모세의 빵은 알아도 하느님의 빵은 알지 못하는 영적인 나태(타락)가 
악을 악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또한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만듭니다. (등한시 되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빵인 '사랑의 힘'에는 무기력해 지고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은
주님의 은총을 욕되게 하는 공동체 안에서 멈추지를 못합니다.  



밥(죽)과 이불과 기저귀 등으로 악행과 죄행을 저지르다.  (아기,어른,노약자 동일)

작년 여름이었습니다. (곧 2012년 여름, 2013년 2월20일로부터 7개월 전)

[간혹 있게 되는 ''거친 삯꾼''이 어떤 분과 싸워서 냉랭해 졌습니다. 거친 삯꾼은 그 어떤 분(1)이 사랑하는 아이에게 못된 말과 과격하게 밥을 먹입니다.아이는 고통을 호소합니다. 한 두번이 아니고 화해가 되기 까지 계속 그 악한 짓을 반복할 때마다 아이의 고통을 호소하는 부르짖음이 내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1)에게 아이의 고통이 중지되도록 서로 해결책을 모색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이제는 내가 사랑하는 아이(하늘이)에게 보복 학대를 자행했습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이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이불로 싸매었습니다. 내가 아이에게 가는 동안 얼마나 되었는지 아이는 얼굴이 빨개져 있고 볼과 얼굴은 온통 물로 젖어 있었습니다. 나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런 경우가 여태까지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친 삯꾼이 ''얼마든지 일러주라'' 하고 도리어 큰소리 칩니다....(줄임 / 이런 문제를 등한시함으로써 어떤 죽음 발생)...그 후에도 어떤 '빽'이 있는지 어른들의 냉각기 마다 거친(악한)삯꾼은 자기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경고성으로 번번히 아이(하늘이)에게 반복적으로 기저귀 학대 합니다. 그 거친 삯꾼은 죄없는 아기들을 죽인 악인 헤로데의 행태를 (공동체의 어떤 '빽'인지) 결코 고치지 않습니다.오히려 더 철저히 보호되어져 갑니다. ..... (이후 생략) ]



복자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의 가르침의 일부입니다 (출처; 구원에 이르는 고통)

[구원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또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고통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을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 아들을 주셨습니다. "주신다"는 말씀 자체가 이 해방은 외아들 그분에 의하여 그분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당신 아들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며 인간을 위한 사랑, 구원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적 고통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고통의 의미가 있습니다. 외아들 그분이 인류에게 주어진 것은 일차적으로 결정적인 악에 대항하고 결정적인 고통에 대항하여 인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구원의 사명을 띠고 보내심을 받은 하느님의 아드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악을 바로 그 뿌리에서부터 쳐부수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이 악의 뿌리들은 죄와 죽음이라는 땅 속에 뻗쳐있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구체적인 죄들의 결과로 판단하는데에는 크게 조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통을 인간 역사에서 개인적 행동과 사회적 과정의 죄스런 배경에서 분리시켜 놓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 고통의 근저에는 죄와의 복합적인 연루관계가 있다는 비판 기준을 배격할 수 없다는 것도 진실인 것입니다.  "영생"은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결정적인 행복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선 첫째로는 원죄와 더불어 비롯하여 악의 영향력 아래 인간의 역사 안에 뿌리를 내린 죄의 지배를 불식하시며 그 다음으로는 인간에게 성화은총 속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고통의 세계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의 활동은 일차적으로 고통 속에서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그분은 육신의 고통이든,영혼의 고통이든 인간의 모든 고통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고통을 바로 당신 자신에게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고통의 세계에 다가오심을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 오해를 받는 일을 겪으셨을 뿐아니라 점점 더 소외를 당하고 적의에 둘러싸이게 되셨으며 자기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음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며 죽음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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