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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24 조회수618 추천수7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Do you believe
because I told you that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You will see greater things than this."

(Jn.1,50)

 

 
제1독서 묵시 21,9ㄴ-14
복음 요한 1,45-51

제 동창신부들은 제가 맛있다고 하는 집을 잘 믿지 않습니다. 제가 소개하는 곳은 그렇게 맛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편식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다 맛있습니다. 동창들은 인공 조미료로 맛을 낸 것도 구분하지 못하냐며 뭐라고 하지만, 워낙 입맛이 단순해서 그런지 다 맛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맛 집보다는 친절한 집을 주로 찾습니다. 맛의 구별이 불가능하니, 기왕이면 친절하면 대접 받는 것 같거든요. 제가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 같고, 그래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제가 잘 가는 집이 하나 있는데, 그 집 사장님은 무엇인가를 주시며 꼭 이렇게 말씀하세요.

“이것은 신부님이니까 제가 특별히 드리는 거예요.”

그러나 사실은 저만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손님에게도 드리더군요. 그런데 ‘특별히’라고 말하면서 더욱 더 신경 쓰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강조하는 것이지요. 이런 말을 듣고서 기분이 어떻게 안 좋겠습니까? 기분이 좋아서 다시 이 집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란 말과 웨이터 팁의 관계를 실험한 그 결과를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웨이터가 고객들에게 디저트용 사탕을 주면서 “특별히 고객님에게만 드리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과, 그냥 사탕을 주는 경우가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실험한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에 대한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글쎄 그냥 아무 말 없이 사탕을 줬을 때 팁을 받을 가능성이 3.3%에 불과했지만, ‘특별히’라는 말을 쓰면서 주었을 경우 팁을 23%까지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 이것은 우리를 무척 기분 좋게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모두는 빠짐없이 주님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또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특별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남들과 나만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온갖 고통과 시련은 다 자신의 것인 양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특별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바르톨로메오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나타나엘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는 필립보로부터 예수님 소식을 들었을 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면서 우습게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나자렛이라는 동네는 구약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으며, 초기랍비 문헌에서 조차 나오지 않는 조그마한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동네 출신의 예수님을 별 것 아닌 분으로 생각하는 나타나엘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그를 특별하게 대하십니다. 그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즉,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특별히 함께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특별함을 받은 바르톨로메오는 후에 피로써 주님을 증거 하십니다. 즉,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했기에, 그는 살아 있는 채 피부가 벗겨지고 참수를 당하면서도 주님을 끝까지 증거 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특별함을 받고 있는 우리는 과연 주님을 어떻게 세상에 증거하고 있을까요?

그 ‘별’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이것이 ‘행복’이다. 잠깐 동안 구름이 ‘별’을 가렸다. 이것이 ‘불행’이다. 그러나 그 ‘별’은 항상 내 맘속에 있었다. 이것이 ‘사랑’이다.(황진철)

 



피로써 주님을 증거했던 바르톨로메오 성인.

 
이곳은 사유지?

언젠가 자전거를 타고서 시골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워낙 초행길이고 또 느낌대로 가는 길이라서 ‘이 길이 맞나?’라는 의구심을 간직하면서 앞으로 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저 멀리 제가 아는 건물 하나가 보였습니다. 이 건물을 목표점으로 가면 원래 가고자 하는 길을 편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건물을 향해 갔지요. 드디어 어느 공터만 지나면 바로 이 건물로 쉽게 도달할 만큼의 거리가 되었습니다. 공터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어떤 목소리 굵은 아저씨의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립니다.

“이봐. 당신 뭐야? 나가! 여긴 사유지야.”

아마도 저 같은 사람이 많이 지나갔었나 봅니다. 그런데 바로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서 다른 곳을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양해를 구했습니다.

“제가 저 건물까지만 가면 되거든요. 여기 공터만 가로 질러 가면 될 것 같은데, 조금 봐 주미녀 안 될까요?”

그랬더니 “난 몰라. 여기 사유지야.”라면서 조금도 양보를 하지 않더군요.

농사를 짓는 곳도 아닌 그냥 공터인데 지나가는 것조차 안 된다고 하니 참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반말을 하면서 화를 내는 것 역시 저를 기분 좋지 않게 했지요.

자기 것은 조금도 침범 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이 형제님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간직하고 있는 생각은 아닐까요? 그러나 과연 내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과연 내 것이라고 끝까지 주장할 수 있을지를 따져 보세요.

소유에 점점 더 구속되는 우리들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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