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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좁은 문 - 2013.8.25 연중 제21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25 조회수494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3.8.25 연중 제21주일 이사66,18-21 히브12,5-7.11-13 루카13,22-30

좁은 문

좁은 문의 시대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 아니면 둘 아이를 낳는 시대이기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여지없이 좁은 문입니다.

 

얼마 전 성인처럼 살다가 세상을 떠난 정요한 수도형제도

일곱 형제 중 여섯 번째 이니 오늘날 같아선 세상에 나오기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제 경우도 네 째이니 세상 나오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너무 좁은 문 때문에 태어나지 못하는

아까운 사람들이 참 많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자식의 회사 합격 이야기를 기쁨에 넘쳐 전하는 자매들을 만난 일이 생각납니다.

“120여명이 지원해 마지막 면접에서 2명만 합격하는데 제 아들이 합격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3년 만에 이룬 경사입니다.

 

그 전에 제 조카가 한 명만 뽑는 시험에서 63명이 지원한속에서 최종 합격했던

일도 생각이 났고, 또 그 후 어느 자매님 아들이 200명이 넘는 중에서 한 명

뽑는 데 합격했다는 일도 생각이 났습니다.

겉으로야 기쁨을 함께 했지만

즉시 떠오른 합격하지 못한 무수한 젊은이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젊은이들의 일자리 잡기가 정말 하늘의 별따기 같이 좁은 문입니다.

바로 이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좁은 문의 현실을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답게 좁은 문의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은 좁은 문의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십시오.

현실을 원망해야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구원의 문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눈높이만 낮춰 열린 눈으로 바라보면 바로 지금 여기 가까이 있습니다.

 

물론 좁은 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하지만 들어가는 사람이 아주 적은 좁은 문입니다.

문이 닫혔을 때 두드리면 너무 늦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모른다.”

복음의 집주인이 가리키는바 주님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자들의 애소(哀訴)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반응이 냉랭하기 짝이 없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주님과의 피상적 관계는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희생 없는 말만의 사랑을 살았던 삶임이 분명합니다.

주님과 무관(無關)하게 넓은 문을 살았던 삶에 대한 응보입니다.

좁은 문의 끝에는 하느님이 계시지만

넓은 문의 끝, 허무와 환멸 한 가운데 악마가 있습니다.

제 삶의 자리에 충실한 정주의 삶 자체가 좁은 문입니다.

알고 보면 누구나 좁은 문의 현실을 살아갑니다.

 

바로 주님은 좁은 문의 현실 가까이 현존하시며 우리를 돕습니다.

그러나 좁은 문도 어찌 보면 상대적입니다.

 

진정 주님과 믿음과 사랑의 관계 깊어질수록

좁은 문은 내적으로 점점 커지는 넓은 문이 됩니다.

요즘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는 역경지수(逆境指數)를 중요시 한다 합니다.

바로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역량을 최우선시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믿음과 사랑으로 좁은 문을 통과할수록 역경지수도 높아질 것입니다.

둘째, 삶의 온갖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시련 없는 삶은 가치 없는 삶입니다.

어렵다, 어렵다 하면 자신도 모르게 약해집니다.

어느 분의 질타에 공감했습니다.

 

‘힐링이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강하게 키워야 한다.

지금은 전쟁상태도 아니고 일하면 굶지 않고 살 수 있는데

무슨 어려움 타령이냐’는 요지의 말입니다.

 

이래서 삶을 영적전쟁이라 합니다.

시련과의 싸움인 영적전쟁이요,

끝까지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가 되어

온갖 시련을 견뎌내며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십니다.

사랑의 채찍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지겠지만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슬픔의 깊이는 기쁨의 높이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에서 오는 모든 시련들을 하느님의 훈육으로 받아들일 때

상처가 아닌 내적성장과 성숙의 계기가 됩니다.

 

일주 전 정요한 수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시련을 겪고 있는 여기 수도형제들은

서로 주님 안에서 슬픔을 나누는 형제애(兄弟愛), 전우애(戰友愛) 자체가

최고의 위로임을 깨닫습니다.

 

정요한 수사가 주장, 주도하여 세운 수도원 정문의 주님의 십자가와

수도원 십자로 중앙의 주님의 부활상이

정요한 수사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예고한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나눌수록 커지는 기쁨이요 나눌수록 작아지는 슬픔임을 실감합니다.

사실 십자가의 시련들을 피할 수도 없거니와

피하면 더 큰 십자가의 시련이 기다립니다.

시련을 견뎌낼 수 있는

더 큰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은사를 주십사 기도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셋째,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맨 몸으로가 아닌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좌절과 절망으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는 겁니다.

넘어지면 즉시 다시 일어나 주님을 향해 바른 길을 달려가는 겁니다.

바로 이게 십자가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이 길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바른 길은 한자로 하면 정도(正道)입니다.

‘바름(正)’을 잃어 혼돈의 세상입니다. 불교의 팔정도 교의가 생각납니다.

 

불교의 실천원리는 사성제와 팔정도입니다.

이 중 팔정도는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수행의 올바른 여덟 가지 길로

정견(正見),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 등 여덟 가지를 꼽고 있으며

이를 팔성도(八聖道)라 칭하기도 합니다.

비단 불교뿐 아니라 참되게 살아가려는 모든 이가 배워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교육의 요체도 바로 ‘바르게’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른 견해, 바른 말, 바른 일, 바른 명령, 바른 생각, 바른 정주, 바른 사유,

바른 정진, 이게 사람됨의 모두란 생각도 듭니다.

 

주님을 따라 항구히 바른 길을 달려갈 때

저절로 성취되는 팔정도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경지를 분도 성인의 그의 규칙 서문 말미에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져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RB머리:49).

 

오늘 주님은 혼돈과 좁은 문의 시대를 살아가야할 우리에게

참으로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1.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십시오.

2.삶의 온갖 시련을 훈육으로 견디어 내십시오.

3.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이런 삶을 통해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요,

이런 이들을 통해 많은 이들을 ‘주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 교회로 나오게 됩니다.

 

다음 루카의 예언 역시 이런 이들을 통해 실현됩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의 나라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이미 예언이 실현되어 주님은 이렇게 살아 온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나라 잔칫상 미사를 통해 온갖 필요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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