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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문화사에 따른 전례: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찬 신학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6-25 조회수5,958 추천수0

[문화사에 따른 전례]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찬 신학

 

 

신약 성경에서 성찬 신학을 말하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신약의 저자들이 그들의 성찬례 관습에 대해 신학적으로 숙고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1코린 10,16-17 참조), 바오로 사도는 전례나 예식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성찬례를 숙고했던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성찰을 함께 제시하는 관점을 취했다(로마 12,1 참조). 삶과 전례 사이의 연결성은 신약 성경의 언어에 반영되어 있다.

 

 

‘희생 제사’는 예수님의 자기 내어 줌으로 완성되었다

 

신약 성경에는 ‘제사’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특히 히브리서와 요한 묵시록에 많이 나온다. 주님의 죽음 바로 전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뿐 아니라, 주님의 죽음 자체가 제사의 용어로 기억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요한 복음의 ‘생명의 빵’ 담화는 희생 제사(sacrificium)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요한 6,51 참조), 그렇다고 해서 신약 저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성전이나 과월절 제물과 동등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식탁 모임과 유다교의 제사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다는 느낌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대신에 제사에 대한 올바른 영적 이해를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구약은 성전 예배에서 중요했던 제사의 물질적인 측면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제공한다. 그러나 유다교 신학에서도 물질적인 측면, 곧 제사에서 제물을 바치는 일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었다(아모 4,4; 시편 51,17 참조). 아브라함이 행한 모리야산에서의 제물 이야기는 ‘제사의 영성’을 잘 보여 준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인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고 이사악은 기꺼이 제물이 되고자 했다. 물론 이사악이 실제로 바쳐지지는 않았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해한 제사는 주님의 만찬을 문자적 또는 물질적으로 이해하는 제사가 아니라 주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식사 모임에서 요약되는 그분의 삶과 죽음을 근본적인 자기 내어 줌(Self-giving)으로 이해한 제사였다. 제자들에게 아브라함의 제물이 보여 줬던 사심 없는 순종은 주님의 자기희생적인 삶과 죽음에서 완성되었다.

 

 

‘강복, 찬미, 축복’은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인간의 태도이다

 

경건한 유다인은 온종일 하느님을 쉬지 않고 찬미해야 했다. ‘복’(福)이라 번역되는 히브리어 ‘베라카’(berakah)는 구약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첫째, 베라카는 먼저 하느님께서 온 창조물과 모든 생물에게 주시는 복을 가리킨다. 사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만이 주도적으로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의 복이다. 하느님께서는 늘 먼저 행동하시는 강복의 주역으로, 이를 인정하는 사람의 반응을 의미하는 용어가 ‘베라카’다.

 

둘째, 베라카는 기도의 형태라기보다는 태도이다. 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하심을 찬미와 찬양으로 감사하는 태도이다. 베라카 기도 양식은 제일 먼저 구약에서, 그 뒤엔 미쉬나에서, 마지막으로 탈무드에 등장한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 성찬례에 영향을 끼친 베라카의 개념은 기도 양식이 아니라 ‘베라카 영성’이라고 불리는 삶의 태도였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로운 선물이었고, 인류에 대한 궁극적인 복(에페 1,3 참조)이신 예수님의 삶에서 ‘베라카 영성’이 잘 구현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로 이해하셨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모든 선한 것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계시의 원천이자 자기 생명의 근원으로 인정하시면서, 베라카의 영성을 사셨고, 기도하셨다(루카 10,21-22 참조).

 

베라카의 태도와 목적은 예수님의 식탁 모임에서 잘 드러난다. 신약은 식사를 배경으로 ‘축복(berakah)하시거나’, ‘감사를 드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자주 이야기한다. 두 표현은 모두 베라카의 언어와 영성에서 발견된다.

 

 

‘계약의 기념’(zikkaron, anamnesis)은 과거의 사건을 현재화한다

 

유다인이 이해하는 기념으로서의 ‘기억’(히브리어 지카론[zikkaron]은 역동적인 개념으로, 지난날의 역사를 잠시 떠올리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베리카와 마찬가지로 유다인이 이해하는 ‘기념’은 하느님의 주도권과 연결된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계약 안으로 들어오라고 계속해서 부르시는 분으로 기억된다. 이스라엘은 살아 있는 그 기억 안에 착실하게 머무르라는 초대를 받는다. 기념은 단순히 지난날의 사건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그처럼 인간사에 개입하셨던 하느님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고, 그래서 미래를 소망하게 한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려는 유다교의 중요한 예식이 과월절 식사이다. 이 식사의 기억과 식사에 수반되는 텍스트는 구원의 경험을 바로 ‘여기에서 지금’(hic et nunc)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고 공동체를 초청한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최후 만찬과 죽음을 과월절 식사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과월절을 기반으로 하느님의 주도하심과 구원, 살아 있는 계약에 대한 여러 이미지는,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기억 속에서 지속되는 공동체의 식사를 해석하는 데 특별하고 강력한 프리즘을 제공했다. 유다인 선조들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살아 있는 기억을 함께 만들어 가도록 공동체를 초대하는 예식적인 식사를 했다. 그들은 이러한 역동적인 기억을 만들었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된 이 새로운 계약이 그들의 삶에서 선포되도록 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식탁은 ‘화해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구약은 하느님과 함께 계약을 맺은 동료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라고 강조하며(레위 19,17-18 참조), 또한 이방인을 보살피고 존중하라고 가르친다(레위 19,33-34 참조).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의 사랑 개념을 발전시켜 그 사랑을 다른 계명과 동일하게 강조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을 동등하게 여기면서 복음의 핵심에 놓았다.

 

신약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이나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을 뿐 아니라 포용하는 분으로 소개하고 제자들도 그분을 그렇게 기억한다. 예수님의 식탁 친교는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 환대와 용서의 행위라는 사실을 나타냈다. 식탁 친교는 또한 예수님의 모든 제자가 보여야 하는 삶의 특징인 ‘화해의 개방성’을 상징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그들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셨다(요한 17,20-23 참조).

 

제자 공동체에게 예수님의 이름과 기억 속에서 함께 나누는 식사인 성찬례는 화해를 위한 공동체의 근간이었다.

 

희생 제사, 베라카, 계약의 기념, 화해의 사랑이라는 주제는 신약에서 성찬례를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데 귀중한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런 주제의 의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되었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 시복 미사 때 전례 실무자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0년 6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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