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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승정 신부님 탈출기 제9회 강의록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30 조회수818 추천수0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의 성서백주간2

 

제9회 하느님의 부르심1 : 탈출 3,7-12/ 하느님의 자기 계시2: 탈출 3,13-15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에 탈출 3,12까지 읽으려고 했습니다만 시간이 없어서

7절 8절까지만 읽었지요? 9절로 넘어 가니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그러니까 7절에 있는 내용이 그냥 반복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7절이랑 8절이랑,

9절, 10절은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얘기하는데 조금 다른 어법으로 , 다른 단어로

얘기합니다.

 

예를들어 7절 8절에서는 어떻게 표현이 됐냐하면, '내 백성'이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9절 10절에서는 '내 백성'이라고 그럽니까? 아니죠. 뭐라고 부릅니까?

'이스라엘 자손들'. 지금까지로 봤을 때 익숙한 표현은 '이스라엘 자손들' 이라는

표현이 익숙한 표현이었다가 '내 백성'. 그래서 하느님이 그 백성을 내  백성으로

부르는 약간은 좀 뭔가 친근해지는 그런 분위기였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그리고 또 하나는 7절 8절에서는 어떻게 나옵니까?

8절을 보면은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런 이런 땅으로 '내가' 데리고 올라가려

'내가' 내려왔다라는 거거든요.

 

그런데 9절 10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니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니가' 이끌어 내어라라는 겁니다. 따라서 7절 8절에서는 누가

주체입니까? 야훼 하느님이 주체입니다. 그런데 9절 10절에서는 모세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7절 8절에서는 전체를 그냥 신학적으로 조금

뭉뚱그리면서 '내가 내 백성'을 이렇게 하겠다라고 모든 것을 단순화시킨 그런

그림이라면 9절 10절에서는 "내가 너를 보내서 할 테니까 니가 어떻게 해야 된다."

라는 그런 어떤 모세가 해야 하는 일로 뭔가 이렇게 모세에게 짐이 지워지는,

모세에게 뭔가 지워지는, 모든 부르심 이야기의 전형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

제가 어린이 미사에서 물어 봤어요. 엄마가 갑자기 부르면 왜 부를까요?

집에 있는데 "누구야, 누구야!"라고 부르면은 왜 부를까요?

어린이들이 "뭐 시키려구요!" ^^*~~~ 예, 애들은 아는 겁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이렇게 부르시는데 왜 부르실까요? 뭐 시키려고. 근데 뭘 시키려고 

하느냐? 나 대신 니가 좀 가서 내 백성을 이끌고 거기에서 이렇게 내가 성조들에게

주기로 약속한 땅으로 걔네들을 데리고 나와야겠다."라는 그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전체적인 9절 10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단어는,"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

에게 보낼 터이니" 라는 단어입니다. '보내다' 조금 폼나는 단어로 '파견한다'라는

뜻입니다. 파견의 의미가 우리가 함께 드리는 전례의 미사라는 의미입니다.

라틴 말로는 lte, missa est (이떼  미사 에스트)라고 합니다.

let, 그러면 '가라'는 소리입니다. 가라, '미사 에스트'인데. 요 '미사 에스트'는

그냥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면은,

 

1)Go, the dismissal is made

그러니까 너희들이 이제 물러가도 좋다는 그런 허락이 이제 내려졌다라는 그런 

뜻으로 우리가 문장을 해석할 수도 있지마는 하지만 조금 다르게 그런 신학적으로 

보면은, 

 

2) Go, you are sent on a mission 

가라, 너는 어떤 특별한 임무를 받고 이제 파견된다라는 뜻입니다. 

이게 라틴 말의 미사의 맨 마지막에 있는 그 부분입니다. 사제가 "이떼 미사 에스트!"

그러면은 공동체는 다함께 "하느님 감사합니다." "데오 그라시아스(Deo gratios)"라고

얘기하면서 성당에서 파견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퇴장 성가와 공동체가

그 기쁨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당에서 천천히 빠져 나오는 게 가장 전례의 올바른

그림 같애요.

 

그런데 우리는 퇴장 성가 부르고  또 뭐 무슨 기도도 있고,뭐도 있고, 뭐 뒤에 잔뜩

뭐가 이렇게 꼬리가 달려 있는데 본래 정신을 보자면은 퇴장 성가와 함께 성당에서

파견되는 겁니다. 각자 아떤 미션을 갖고 있는 거죠? 모릅니다. 각자에게.

 

하지만 미사 때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미션이 있는 겁니다. 뭔가 내가 어떤 일을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탁하신다라는 겁니다. 아주 뭐 상식적인 일일 수 있습니다.

집에 가서 뭐 밥하는 일일 수도 있고, 빨래 하는 일일 수도 있고, 아니면은 뭐

어디가서 친구와 함께 커피 한잔 하면서 얘기를 하는 일일 수도 있고 아주 우리

일상 안의 일과 그렇게 다른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자리에 있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어떤 일을 인식하는 것. 그것을 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

습니까? 그 질문을 갖고 살아가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하루 나에게 무엇을

맡기셨을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로, 아, 오늘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저도 아침에 요즘은 눈을 뜨자마자 예전에는 기억력이 좋았는데 요즘은

기억력이 약해져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이어리를 봅니다.

 

아, 오늘 하룻동안 내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 그와 동시에 그런 기도 "하느님, 오늘

이 하루의 제 일정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라는 그런 내면의

기도. 자꾸 매일매일 그와 같이 하느님께 질문하는,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질문하는 그 태도.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태도일 꺼 같애요.

 

그리고 하루를 마치면서는 예, 그렇게 내가 하루 일을 하느님 뜻에 맞게,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며 살았는가?에 관해서 성찰하고 그리고 지나간 하루에 관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그와 같은 마음들.

 

그래서 제가 대림 첫 주를 시작하면서 저희 성당 어린이들이랑 약속을 했어요.

"우리 아침 기도, 저녁 기도 신자들의 의무인데 그거 다 하는 거 좀 어렵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신부님이랑 아주 짧은 기도먄 하기로 약속을 하자.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하고 기도하자. 2초 걸립니다. 저녁 때 자기 전에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자. 하루에 4초 걸립니다.

 

대림 2주에 어린이들에게 확인을 했어요. 신부님이랑 그렇게 기도하기로 약속했는데

그렇게 기도한 사람? 그러니까 몇 명이 손을 들었겠습니까? 한 명이 들었습니다.^^*

지난 주에. 제가 실망했겠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한번 약속하고 요번 주에는 어떻게

되는지, 다음 주에는 어떻게 되는지 계속해서 그와 같은 우리들이 해야 되는 작은

기도 생활의 어떤 기쁨에 관해서 신자들과 함께 또 어린이들과 함께 나누는 거는

필요한 거 같애요.

 

오늘 이렇게 오신 신자분들 중에서 저는 아침 기도 또는 저녁 기도 내지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너무 많으면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우리 자녀들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손 한번 들어 보세요.

 

예, 성경 말씀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서 ^^*~~~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달

외우고 뭐 박사 학위를 하고 그런 거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거는

뭡니까?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살아가는 그 기쁨이 중요한

겁니다. 내가 얼마나 기쁜가?

 

여러분들이 제가 사제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데 여러분들이 저를 보면서

제가 기쁩니까? 아니면 그냥 막 고통스럽습니까? 기쁘죠! 그쵸? 그거는 제가 굉장히

잘 살고 있거나 또는 잘못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하지만 사제가 사제로 살면서 기쁘지 않다면 그거는 좀 문제가 있는 겁니다.

 

마더 데레사나 아니면 옛날에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 스님, 아니면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 이렇게 보면서 우리가 그분들을 좋아했다는 거는

뭡니까? 그분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기쁨이 있고 평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같이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어요. 이쁜 얼굴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보면은 뭔가

기쁘고 평화로운 얼굴.

 

우리들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는 기쁨이 있는 거. 그러면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 사람 이상한 사람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기쁠까?"

그냥 굼금해요. 그게 선교입니다. 그런 궁금증을 세상과 나누는 것. 그렇다고 해서

기쁘지도 않은데 기쁜척 하라고 가장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컵에 물이 넘치듯이 그런 것들이 정말 마음 안에서 넘쳐서 세상에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 거기에 대해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아무튼 야훼의 그런 명령에 대해서 모세는 엘로힘에게 첫 번째 의문을 제기합니다.

제가 왜 여기서 엘로힘이라고 썼냐하면 11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여기서 히브리 말로 하느님이라고 그랬으니까

엘로힘이라고 돼 있었을 겁니다. 저는 되도록이면은 좀 직역하는 거를 좋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서 텍스트를 읽은 동안에는. 그래서 모세가 엘로힘에게 말했다

라고 직역을 좀 하겠습니다.

 

자, "제가 무엇이라고",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사랑하십니까?"라는 시편기도도 

있습니다만, 이 의문은 모세가 이집트를 떠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이집트를 떠나게 됐을 때 동족에게 어떤 질문을 받고 모세가 이집트를 떠납니까?

"당신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우리가 당신을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단 말이오?"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이집트를 떠납니다.

 

따라서 "제가 무엇이라고 당신이 저를 보내십니까?" 라는 의미는,

나는 이렇게 돼서 이집트 왕궁에 가서 살다가 우리 동족 일에 간섭하다가 동족들

한테 그냥 혼이 나서, 또 파라오에게 죽을 위험을 이렇게 겪고서 이집트를 떠난 

그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모세의 질문에 대해 엘로힘이 대답합니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이것이 뭐죠? 이거를 맞추시면 제가

김치 냉장고를 하나 ^^*~~~ 성탄 선물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표징이 된다? 표징이라는 건 세상에 드러나야

되잖아요. 여기서 모세가 두려워 하잖아요. "내가 무엇이라고..." 그랬더니 이것이

너에게 표징이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는 거는 보이지 않는 겁니다.

나는 알고 있지만 누구한테 보여 줄 수는 없는 겁니다.

 

"성령?" 그것도 보여 줄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텍스트 안에서 발견하시는 게

좋습니다. 예, 이집트에서 끌어내는 거? 예, 끌어내기 위해서 표징이 필요한데

끌어내는 게 표징이 된다고 그러면 그것도 좀 이상하잖아요.

 

산 위에서 예배하는 것? 어떤 주석가들은 그렇게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치 냉장고까진 안 됩니다. 아직 ^^*~~~

전문가들 사이에 풀리지 않는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서 그냥 히브리 문장만 읽는다면 좀전에 자매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이

백성을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에서 예배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표징이 됩니다.

문법적으로만 본다면, 그런데 그건 미래의 사건입니다. 미래의 사건이 현재의

표징이 될 수 있다?

 

이건 뭐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에 관해서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그렇게 어려운, 복잡한 신학적인 개념이 여기 숨어

있지 않다고 본다면, 단지 문학적으로만 본다면은 그게 뭔지 얘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몇몇 주석가들은 여기서 말한 이것이란, 지금 이야기가 다른 전승들과 섞여서

많이 있다보니까 이야기는 많이 떨어져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것이란,

'떨기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여기 있는 이 불붙었지만 불타 없어지지 않는

그 떨기나무가 바로 표징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좀 전에 말씀하신 대로 여기서 보면은 이것이라는 말이 나온 다음에 다음

문장에서 뭐라고 그럽니까? "이 산위에서"라면서 '이','이'이렇게 해서 두 번이

나오잖아요. 이게 히브리 말로 같습니다. "내가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

 

따라서 '이 산' 요거를 가리킨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아직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등장하게 될 '지팡이'를 얘기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야기의 앞뒤가 지금 문학적으로 좀 뭉게졌기 때문에 잘 드러

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는 있었을꺼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라고 얘기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결론은 뭡니까? 이 텍스트만 가지고는 확실히 얘기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

한 거는 앞뒤 이야기 안에서 뭔가가 있을을텐데 그것을 여기서 확실히 밝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의 전개에서 야훼가 움직이는 목적은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해내는 겁니다. 내가 내 백성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내가 그들을 그들의

성조들에게 약속한 약속을 기억하고 그들을 이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겠다

라는 게 야훼의 목적이었는데 여기 12절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진 이 백성은 이제 호렙에서 엘로힘에게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예배하다'라고 번역했는데 그 예배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 말

본래의 동사는 '아밧'이라는 동사입니다.

 

'아밧'이라는 동사는 '섬긴다'라는 뜻도 갖고 있고  명사화되면 '종'이라는 뜻,

'노예'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광야로 나와서 야훼를 섬기게 될

것이다라는 그런 어떤 뉘앙스를 갖고 여기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라는

12절을 우리가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집트에서 지금까지 누구를 섬겼습니까? 파라오를 섬겼습니다.

광야로 와서는 이제부터 파라오를 섬기지 않고 엘로힘을, 하느님을 섬길 것이다.

파라오의 땅에서는 파라오를 섬기지만 이제 하느님의 광야에서는, 하느님을 만난

그 광야에서는 하느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라는 어떤 그 뭐랄까요? 이스라엘의

정체성의 변화에 관해서 우리들은 준비되고 있는 요 마지막 구절 12절을 관심있게

보아야 하겠습니다.

 

자, 여기서 모든 고대 종교에 있어서 인간의 존재 이유는 신을 섬기는 겁니다.

여기서 파라오도 신격화 되는 겁니다. 이집트의 백성들, 이집트의 이스라엘은

파라오를 섬긴다. 파라오가 신격화 돼 있는 겁니다.

 

반대로 이제 야훼의 백성으로 야훼를 섬긴다. 이스라엘은 야훼를 섬긴다라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느님을 뭐라고 부르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지요? 즉 관계의 커다란 전환이 일어난 겁니다. 누구를 통해서?

예수 그리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관계는 따라서 뭐였대는 겁니까?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주종 관계였대는 겁니다. 따라서 그 흔적 때문에 요즘도 우리는 하느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하고 부릅니다만 또는 '주인님'하고 부릅니다만, 적어도 복음을

통해서 등장하는 새로운 관계의 전환은 뭡니까?

 

하느님은 우리들의 아버지이고 예수님은 우리들의 형님이고 ^^*~~~ 오빠다.

저는 여러분의? 아버지가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그 신부라는 말의 그

부(父)자가 들어가 있는 거는 신학적으로 조금 언젠가는 교회가 바꿔야 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들과 저와의 관계는 형제입니다. 길에서 만나면 저를

"오빠!"하고 부르셔야 해요.^^*~~~

 

예, 파라오를 두려워해서 이집트를 떠났다. 모세가 이제 파라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제 엘로힘이 "나는 너와 함께 있겠다."라는 그런 함께 있음으로

인해서 모세는 파라오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탈출기 1장에서부터 서술되었던 이스라엘에 대해 가졌던 파라오의 두려움은

이제 현실이 됩니다. 파라오의 두려움은 그때는 사실 존재하지는 않았었는데 이제

현실이 되고, 이스라엘이 가졌던 두려움은 없어집니다. 무엇을 통해서?

하느님의 함께 있음을 통해서. 이렇게 하느님의 함께 있음은 언제나 우리들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초월적 체험의 바탕이 됩니다.

 

우리 신앙이라는 게 무엇이냐?

"아 내가 혼자 있는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구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

그 체험이라는 겁니다.

 

이사 7,14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에게 가죠?

아하즈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생긴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 아시리아와 뭐 티로

에프라임 동맹과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풀까?라고 굉장히 걱정을

합니다. 그때 이사야 예언자가 거기가서 뭐라고 그럽니까?

"두려워 마라."라고 얘기합니다. 이거는 모두 우리가  하느님을 잘 섬기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그러니까 하느님께 어떤 네가 표징을 청해봐라. 하느님께서 본인이

얼마나 믿을 만한 분이신지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다.

 

그러니까 이사 7장에서 아하즈가 뭐라고 얘기합니까?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

니다." 굉장히 멋진 말인 거 같은데 그 멋진 말 뒤에는 뭐가 숨어 있는 겁니까?

"나는 하느님 뜻대로 하지 않고 내 뜻대로 하겠소. 인간의 지혜를 믿겠소!" 라는

그런 말이 숨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그에게 얘기하는 겁니다.

"니가 청하든 청하지 않든 하느님께서 너에게 표징을 보여 주실텐데 그 표징이

뭐냐? 이제 젊은 여인이 아이를 하나 잉태해서 낳을 터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

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젊은 여인은 아마 아하즈의 왕비일 겁니다. 그 왕비가 아들을 낳을

터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채 크기도 전에 너를 위협하던 그 무리들은 모두 멸망해 버릴

것이다라는 내용의 예언을 하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해서 이사야 예언자는 의식하고 얘기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약의 복음에서는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이사야 예언자는 그걸 스스로는

몰랐지만, 하지만 성령께서 이사야 예언자에게 그런 예언을 넣어 주신 것이 나중에

실현된 것이 어떤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다.'라고 해석하는 겁니다.

 

그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언제? 천사가 요셉에게 와서 "니가 아들을 낳을

터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라는 그 대목이 사실은 이사야가 예언한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라는 겁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것은 어느 역사의 한 장면에서 소모되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하즈 사건을 통해서 그냥 소모되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어떤 시공을 초월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 함께 있음이라는 겁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렇게 함께 있음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음.

 

또 함께 있는 거는 뭘까요?

함께 있음에 관해서 묵상 하시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개념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왜 교회를 이루면서 왜 공동체를 이루면서 여기 보니까 애기 수녀님들이

와 있는데, 왜 수도원 공동체에서 함께 사느냐? 그 함께 있음이 무엇을 뜻하느냐?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배우자와 왜 함께 사느냐? 우리 교회가 왜 공동체를 이루

면서 사느냐? 그 함께 있음의 중심에는 누가 있어야 하느냐? 이런 것들이 묵상

꺼리가 되는 겁니다. 함께 있음.

 

함께 있으니까 참 좋다? 아니면 함께 있으니까 불편하다?

우리가 무엇을 체험하려고 하는지에 관해서 생각하는 겁니다.

함께 있음. 그 안에서 하느님이 함께 계실 때와 하느님이 함께 계시지 않을 때,

그 동동체의 모습. 거기에 대해서 우리 묵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가지 묵상해 볼 것은, 묵상할 수 있는 것은 모세의 언사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라는.

 

여기에서 이게 도대체 모세가 어떤 어감으로, 어떤 뜻으로 이 이야기를 한 것인가?

그에 관해서 사람들이 생각하면서 비슷한 구절을 사람들이 찾아 봤습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사무 18,18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제가 감히  누구이며 이스라엘에서 제 아버지의 씨족이

무엇이기에 감히 임금님의 사위가 되엤습니까?' 하며 사양하였다."(1사무 18,18)

다윗이 사울에게 하는 말입니다. 제가 무엇이기에.

 

2사무 7,18에서 "다윗이 임금이 주님(야훼) 앞에 나아가 앉아 아뢰었다. 

'주 하느님, 제가 누구이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까?' "

 

따라서 여기서 이렇게 쭉 보자면은 "제가 무엇이기에"라고 얘기하는 거는 어떤

어감을 밑에 깔고 있는 거죠? 예, 스스로 좀 낮추는 그런 어떤 겸손한 그와 같은

표현입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신약에서도 나옵니까?

 

루카 1,43에서 보면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만나서 "제가 무엇이기에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으셨습니까?" 라는 그와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루카 1,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들이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그와 같은 이야기들이

공통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구절들입니다.

 

예, 다음으로 읽을 단락은 탈출 3,13-15까지로 짧은 단락입니다만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제일 중요한 단락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들에게 보내셨다.'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요?'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 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탈출 3,13-15)

 

예,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질문한,  또 풀리지 않는 그런

부분이기도 합니다.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많은 논문이 나온 것은 어떤

주제일까요?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는 주님의 기도에 관한 논문이 지금까지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의 논문으로서는 가장 분량이 많다고 합니다. 제가 세어본

건 아닙니다. 근데 대충 맞을 거 같애요. 산상 수훈과 주님의 기도에 관한 그

논문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논문을 썼는데,

 

구약에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쓴 주제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주제입니다.

왜 중요하냐? 하느님이 자기 이름을 가르쳐 주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3,13에서 모세의 질문이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탈출 3,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에게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요?'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예, 첫 번째 질문은 어떤 질문이지요? "제가 누구이기에" 누구의 정체성에 관하여

묻는 겁니까? 모세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서 묻는 겁니다. 두 번째 질문은, 당신은

누구이기에,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하느님의 정체성에 관해 묻는

겁니다. 나는 누구이고,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농담으로 아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애요.

약간 뭐 개념이 없다. 뭐 그런 이야기겠지요. 인터넷 상에서 '멘붕'이라는

'멘탈붕괴'에 관해서 얘기를 하면서 그걸 표현하는 방법으로 '나는 누구고,

여기는 또 어디인가?" 뭐 그런 식의 표현을 하더라구요.

 

모세가 멘붕에 빠진 건 아닙니다. 멘붕에 빠진 건 아닙니다만 "나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을 한번 했고, 두 번째로는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겁니다.

스스로가 정체를 밝히는 겁니다. 

 

여러분들 옛날에 누군가를 만났을 때, 뭐 소개팅이든, 맞선이든 이렇게 보면서

자리에서 하는 일이 뭡니까? 나는 누구인지에 관해서 얘기하고 상대방은

누구인지에 관해서 묻는 거지요? 그리고 나서 서로를 알아가면서 "아, 그렇다면은

내가 이 사람과 함께 늙어갈 수 있겠다."라고 혼인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살면서 살면서 나는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 배우자도 누구인지

모르겠다라는 그런 어떤 체험들에 관한 고백성사를 요즘 자주 듣습니다. ^^*~~~

 

사제 생활을 하면 할 수록 '사제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게 분명해질까요? 아니면

점점 힘든 질문으로 바뀔까요? 힘든 질문으로 바뀌는 거 같애요.

 

여기서 모세와 야훼도 비슷한, "나는 누구이고, 당신은 누구이냐?" 라는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흥미로운 점은, 아니, 창세기 1장부터 50장이 있었는데 하느님의

이름도 몰라? 라는 겁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도 나타나셨지요? 아사악, 야곱, 요셉 그렇게 많은 역사를

이끌었는데 하느님의 이름도 몰라? 이게 우리한테 모세가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좀 무식했나?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있는 텍스트를 조금 읽어보니까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창세 32,30 : 야곱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하고 여쭈었지만, 그는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 보느냐?" 하고는, 그곳에서 야곱에게 복을 내려 주었다.

 

또는 정확하게 어감을 살리자면, "..하고는 그곳에서 이름은 가르쳐 주지 않고 야곱

에게 축복만 해 줬다."라는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야곱에게 축복만. 따라서 이름을

가르쳐 준 겁니까, 안 가르쳐 준 겁니까? 안 가르쳐 준 겁니다.

 

탈출 6,3을 보면, 앞으로 읽게 될 내용입니다.

탈출 6,3: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느님'으로 나타났으나,

'야훼'라는 내 이름으로 나를 그들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이름은 안 가르쳐 줬다. 슈퍼맨처럼 탁 나타나가지고 딱 돕고, "당신이 누구신데

나를 돕습니까?" 그러니까 한번 씩 웃고 사라졌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판관기를 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삼손 이야기입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마노아가 다시 주님의 천사에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래야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면, 저희가 당신을 공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는,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

보느냐? 그것은 신비한 것이다."하고 대답하였다

 

성경 안에 계속해서 어떤 이야기가 나옵니까?

하느님이 자기가 누구인지 가르쳐 주는 겁니까? 가르쳐 주지 않는 겁니다.

 

자,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중요한 화두로, 중요한 질문을 하나

내고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을 보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또 우상을 섬기지 마라. 뭐 이런 것들이 있지요? 어떤게 더 중요할까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것. 이거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심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우상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라고 그러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도 안 된다고 하는 그와 같은 계명이 모든 계명의 제일 앞부분

에 놓이게 되었을까?

 

그 계명의 순서로만 보자면은 살인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입니다. 왜 그런 일이 그와

같은 계명의 우선 순위가 그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을까?에 관해서 내년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제가 잘난척 할려구 무려 4개 국어로 ^^*~~

 

 

 

 

 אהיה אשר אהיה

에흐웨 아세르 에흐웨 입니다.

이 '에흐웨'라는 게 뭐냐하면, 영어의 be 동사의 미완료형입니다.

따라서 I will be 또는 I shill be 라는 뜻입니다.

'아세르'는 영어의 관계 대명사입니다. who.

 

그 다음에 다시 '에흐웨'가 나왔어요.

I will be 또는 I shill be 이런 뜻입니다.

따라서 I will be who I  shill be 

번역이 안 됩니다. 이건 번역이 안 되는 문장입니다.

그대로 놔 둘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거를 어떻게든지 의미를 만들어야 되니까 히랍 말, 그리스 말 성경에서는

 

 ἐγώ 그러면 I 라는 뜻입니다. εἰμι 그러면 am

 ὁ 는 정관사입니다. ὤν 그러면 be 동사의 분사 같은 겁니다.

 I am the being  라틴말로 그러면 ego sum qui sum

그래가지고 여기에 있는 거랑 좀 비슷하게 qui(관계 대명사)를 넣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영어에서도 별 수 없이 I AM WHO I AM 하고 해 놨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우리 말 성경에서는 '나는 있는 나다'

 

여러분 어디 관공서 갔는데, "예, 이름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나는 있는 나다!" ^^*~

뭔지를 모르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이걸 가지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철학적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신비적으로 이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철학의 문제 중에 히랍 철학부터 철학의 문제 중에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가

존재의 문제잖아요. 뭐 '온토스(ontoson)'  존재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있다는

것은 무엇이고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이냐? 뭐 이런 것들에 대한 것이 철학적인 문제

거든요.

 

따라서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그런 철학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려 준 것이다라고

해석한 철학적 해석이 있었지만, 여기서 하느님이 모세랑 그 시나이 산 꼭대기에서

만나서 거기서 철학 논쟁을 했다고 보기엔 조금 어려울 거 같애요.

 

더군다나 그런 철학적인 문제에 관해서 여기서 얘기했다고 할 수 있는 앞뒤의 문맥도

좀 맞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신학적, 철학적, 신비주의적 토론들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그냥 문학 작품으로서 이거를 본다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거는 하느님의 이름을 고대 히브리 말, 아주 옛날 히브리 말, 그리고 아라메아 말로

적어 본 겁니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야훼

* 에흐웨 아세르 에흐웨

*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에흐웨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 야흐웨, 너희 조상들의 엘로힘, 아브라함의 엘로힘, 이사악의 엘로힘,

  야곱의 엘로힘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에흐웨 아세르 에흐웨'라고 하느님이 대답을 하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그리고 다시 얘기합니다.

 

"너는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야훼께서 나는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따라서 질문은 하나인데 대답은 세 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선생님이라면, 마지막 기말 고사에 문제를 하나 냈어요.

학생이 한 문제에 관해서 답을 세 개를 써 냈어요. 그러면 잘 쓴겁니까?

잘못 쓴 겁니까? 잘못 쓴 겁니다. 문제 하나에 답이 하나 있어야 하는데

모세의 질문 하나에 하느님의 답이 세 개 있는 겁니다.

 

왜 세 개가 있을까? 제가 이거를 무려 한 이틀 동안 째려 봤어요. ^^*~~~

제가 내린 결론은 뭐냐? 다음과 같은 겁니다.

 

먼저 '에흐웨 아세르 에흐웨' 이거는 약간은 좀 만들어진 문장입니다.

따라서 이거는 굉장히 인위적인 문장입니다. 어떤 목적을 가진.

 

두 번째,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

우리 말 번역에서는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여라." 라고 했지만

원문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하면은 "에흐웨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라고 얘기

해라.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의 이름은 야훼입니까, 에흐웨입니까?

야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에흐웨가 보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나서 세 번째에서야 비로소 야훼라는 이름이 등장을 합니다.

히브리 말 발음을 우리가 좀 충실학 하자면, 야훼라기 보다는 야흐웨입니다.

 

 

야흐웨, 너희 조상들의 엘로힘, 아브라함의 엘로힘, 이사악의 엘로힘, 야곱의

엘로힘께서 나는 너희에게 보냈셨다 하여라.

따라서 우리에게 제일 익숙한 문장은,  

* 야흐웨, 너희 조상들의 엘로힘, 아브라함의 엘로힘, 이사악의 엘로힘,

  야곱의 엘로힘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이 문장입니다.

 

*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에흐웨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요 문장은 뭐 그렇다 싶은데 조금 이해가 안 가고,

* 에흐웨 아세르 에흐웨 . 여기서는 더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런데 대단히 재미있는 사실은 뭐냐? 아까 '에흐웨'라는 거는 be 동사의 3인칭

단수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면 be 동사의 3인칭 단수는 뭐냐? 그게 '야흐웨'입니다.

따라서 '에흐웨'가 I will be의 뜻이라면 '야흐웨'는 He will be의 뜻입니다.

 

여기까지 이해하셨습니까? 좋습니다. 이해 못하셔도 상관 없어요.

나중에 하늘 나라에 가면은 다 쉽게 풀릴 문제입니다. ^^*~~~

단지 문학적으로 설명의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따라서 저는 어떻게 설명을 하느냐?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알고 있는 하느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야흐웨입니다.

그 야흐웨가 어떻게 하느님의 이름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게 탈출기 3장의 목적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번 이리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에흐웨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로 건너가고 다시 이리(에흐웨 아세르 에흐웨 )

로 건너 갑니다.

 

따라서 왜 세 개의 답이 있게 되었느냐? 야훼라는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하느님의

이름이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알려졌는지를 설명하는 기능과 함께 둘째 이런 설명과

함께 야훼라는 이름이 히브리적 동사와 연결이 됩니다. 그러면은 탈출기 3장은 왜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야훼의 이름을 히브리식 동사, 히브리어의 be 동사와 연결

시키려 했을까요?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연결 시키려 한 겁니다.

 

자, 앞선 이야기를 한번 살펴 볼까요?

모셰라는 이름이 있었지요? 모셰라는 이름은 아마도 본래는 어느 나라 말이었을

꺼라고 제가 강의한 것에 대해서 아마도 이집트 이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집트 이름에 왕들의 이름에 그 말이 다 등장해요. 라 모셰스, 라 모셰, 투트 모셰.

이런 왕들의 이름이 등장해요. 어떤 뜻이라구요? 이집트 말에서는 누구누구를

낳았다. 따라서 신이 누군가를 낳았다.

 

모세에서는 그 신의 이름이 빠져 있고, '낳았다'라는 동사만 있다.  

그런데 탈출기 1,2장을 거치면서 모세의 이름이 히브리화 되지요?

어떤 동사랑 연결이 됩니까? '물에서 건져 내었다.' 따라서 그 이야기를 읽는

사람은 이제부터 모세는 물에서 건져 낸 사람이다. 심지어 그 이름을 누가 부르냐

하면, 이집트 공주가 "모세를 물에서 건져 냈으니까 모셰라고 하자." 라고 얘기하는

약간은 좀 앞뒤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된 거죠? 모세라는 이름이 이제 이집트 이름이

아니라 히브리 이름이 되었지요. 여기를 통해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야훼라는 이름이 히브리적 어원을 갖고 있는 이름이 아닐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외적,

히브리 문화 내지는 히브리 언어권을 조금 벗어나. 거기서 그들이 이스라엘인들이

어떤 신앙적인 체험 아니면 역사적인 체험을 통해서 체험한. 따라서 그들이 부르기

시작한 그 하느님의 이름, 야훼라는 이름을 이제 히브리화 시키는 겁니다.

 

우리가 히딩크 감독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히딩크가 한국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급기야 하동구라는 ^^*~~~ 이름을 지어 주었듯이. 우리나라에

오신 외국 신부님들이, 선교사들이 너무나 "나는 한국 사람으로 살고 한국 사람으로

죽겠습니다." 라는 그와 같은 소망 때문에 자기 부모님들이 자기에게 주신 이름을

버리고 우리 나라 이름을 부르시는, 그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라는.

 

정일우 신부님. 이름만 보면은 무슨 영화 배우 중에 한 명인가? 만나보면 미국

신부님이세요. 정말 한국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신 그런  신부님이세요.

도요한 신부님, 소알로시오 신부님, 아니면 옛날에 윤루카 신부님. 이런 분들

아마 기억하실 꺼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한국 이름을 스스로

만들어서 갖는 그런 모습입니다.

 

여기서도 전체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뭐냐? 본래는 히브리 말 이름이 아니었던 것이

히브리 말처럼. 그러기 위해서는 이 야흐웨라는 말을 어디다 연결 시킬까?

하야 동사의 3인칭 단수랑 비슷한 거 같다. 그러니까 거기서 1인칭 단수를 갖다가

1인칭 단수를 이어 받은 '에흐웨 아세를 에흐웨'라는 조금은 오늘날의 번역 불가능한

문장까지 간 것이 아니겠느냐? 라는 게 제 이론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10회 하느님의 자기 계시 2: 탈출 3,13-15/ 하느님의 부르심 2: 탈출 3,16-22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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