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2/ 제10회 탈출기 강의록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03 조회수1,090 추천수0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2

 

제10회 하느님의 자기 계시: 탈출 3,13-15/ 하느님의 자기 계시: 탈출 3,16-22

 

제9회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전체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뭐냐? 본래는 히브리 말 이름이 아니었던 것이

히브리 말처럼. 그러기 위해서는 이 '야흐웨'라는 말을 어디다 연결 시킬까?

하야 동사의 3인칭 단수랑 비슷한 거 같다. 그러니까 거기서 1인칭 단수를

갖다가 1인칭 단수를 이어 받은 '에흐웨 아세르 에흐웨'라는 조금은 오늘날의

번역 불가능한 문장까지 간 것이 아니겠느냐? 라는 게 제 이론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설명하는 주석가들은 사실은 많지 않습니다. 제 각각 좀

존재론적인, 윤리적인, 초월적인, 신비주의적인 그런 설명을 붙이는데 저는

문학적으로 읽어보자. 그리고 나서 다른 설명들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다시

한번 읽어보자라는 게 제가 생각하는 탈출기 3장을 읽는 방법이라고 말씀

드리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엘로힘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단순한 질문에 대해서 엘로힘은

대답을 세 개나 내 놓았다. 그리고 그 세 개의 그 대답이 각각 독립적인 대답이라기

보다는 뭔가 연결이 돼 있다.

 

  

 

에흐웨, 에흐웨, 야흐웨 이렇게 연결이 돼 있다. 그리고 이 세 개의 대답을 통해서

결국 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이름은 '야훼'라는 그 이름이다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은 이 야훼라는 이름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라는 것에

대해서 학자들이 가만히 있었을리 없지요. 열심히 중동의 모래 바람을 헤치면서

땅을 파보기도 하고 이런 거 저런 거 다 해 본 다음에 마지막 결론,

 

몇몇 학자들은 꼭 이름을 기억하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펠리츠, 셀린과 같은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가나안 지역에서 토판을 발견해 냅니다.

옛날에는 진흙 같은 거를 말려서 거기다가 쐬기 문자로 글씨를 쓴 것들이 있는데

거기에 보니까 야훼라는 이름이 비슷하게 발음되는 그런 신의 이름이 등장을 합니다.

 

또는 마르크바 같은 학자는 이집트 텍스트들이 언급하는 주전 13세기 시나이

반도에 어떤 부족이 사는데 그 부족을 이집트 사람들이 뭐라고 불렀냐하면

'야후'라고  불렀어요. 그러니까 그 유목 부족과 좀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는 여기서 요거는 좀 중요합니다. 모세의 장인의 직업이 뭐였지요?

모세의 장인이 무슨 양치기였어요. 그건 좀 너무했다.^^*~~~ 물론 부업으로

양도 쳤겠죠.^^*~~~ 본업은 사제였습니다. 따라서 사제는 뭡니까?

신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예요? 그 미디안 지역에 종교적인 유래가 있지 않았을까?

 

모세가 나중에 백성들을 데리고 광야로 나가는데 그 장인이 쫓아와 가지고 함께

제사는 드립니다. 그 다음에 모세가 어떤 제도를 못 만들어서 모든 백성의 문제를

혼자 해결 하려고 할 때 장인이 와서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이렇게 다른 사람을

한 다음에,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하급 법원을 좀 만들고 거기서 해결이 안 되는 거는 상급

법원으로 해서 자네가 해결하게. 뭐 그런 제도적인 이야기를 해 줍니다. 따라서

모세의 장인이 이스라엘의 초기의 어떤 통치 체제를 형성하는데 또는 종교적인

제도를 정비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는 그와 같은 텍스트들을 우리가 만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미디안의 종교적인 영향이.

 

그 미디안이라는 곳이 사우디아라비아 남쪽 내지는 시나이 남반부 그와 같은 그런

장소로 생각하고 거기서 '야후'라는 바람과 관계된 신입니다. 그런 어떤 신의

이름이 사용된다라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따라서 야훼라는 이름은 그런 미디안이라든지 다른 민족들로부터 조금 이스라엘이

배워 온 것이 아닌가? 본래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이스라엘 문화권 내지는 이스라엘

언어적인 체계 안에서 만들어진 이름은 아닐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는 겁니다.

 

※ 탈출 3,15: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절에 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대한 엘로힘의 마지막 대답에서 6절에서 이미

나왔던 아브라함의 엘로힘, 이사악의 엘로힘, 야곱의 엘로힘이라는 호칭이

언급됩니다. 단지 6절에 모호했던 표현이 있습니다.

 

※ 탈출 3,6: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너의 아버지의 엘로힘'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너의 아버지'

'너'도 단수고, '아버지'도 단수입니다. 하지만 15절에서는 다시 복수로 변합니다.

너희들의 아버지들의 엘로힘.

 

따라서 이거는 의역할 수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따라서 저희들이 의역할 수 있는 편안한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 신학적으로 좀

부합하는 그런 '너희들의 아버지들의 하느님,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이라는 그런

신학적으로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예, 따라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모세를 보낸 그 엘로힘이 조상들의 역사에

등장한 그 엘로힘과 같은 엘로힘이지만 이제 비로소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은 창세기와 탈출기를 연결하는 전체의 이야기의

큰 흐름을 만들어 내는 하나의 맥을 만들어 줍니다.

 

탈출기의 하느님, 창세기의 하느님이 탈출기 3장에서 내가 바로 그 조상들의

하느님이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은 무엇이다. 너희 조상들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때가 되어 나의 이름을 너에게 가르쳐 준다. 자기를

완전히 드러낸다. 왜냐? 이제는 내가 너희들과 나중에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계약을 맺을 때는 뭐가 필요합니까?

우리나라에서 계약을 맺을 때는 나를 증명해야 되잖아요. 내가 계약을 맺는다는.

따라서 뭐가 필요합니까?  인감 도장이 필요하잖아요. 그게 뭡니까? 인감 도장이

곧 내가 그것을 했다는 가장 중요한 표시잖아요. 여기서는 이름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내가. 계약을 맺는 그 사건으로 가기 위한 중대한  준비의 단계가 끝났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하느님의 이름은,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은 요겁니다.

 

  

 

 

  

 

 

י 야,   ה 흐,  ו 에, 마지막  ה발음을 안 합니다.

이 정도의 하느님의 이름인데 히브리 말은 특히 하느님의 이름을 쓸 때는 유다

사람들이 오늘날 유다인들이 히브리 말 텍스트를 읽으면서 야훼라는 발음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시대 이전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 시대에도 1년에 한번

욤키프로(속죄의 날)에 대사제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면서

딱 1번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라는 그런 기록들이 확인이 됩니다.

그 외에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합니다.

יהוה

그러면은 성경이 쭉 등장하다가 이런 네 글자가 나오면은 뭐라고 읽을까요?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따라서 야훼라고 쓰고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아도나이라는 건 어떤 뜻이냐? '주님'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말 성경에서는 '주님'이라고 번역했다. 꼭 필요할 때만

야훼라고 몇번 번역을 했지마는 하지만 유다인들의 그런 전통을 존중했다.

 

영어 성서에서도 야훼라고 나오면은 야훼라고 쓰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번역에서 뭐라고 쓰느냐하면, Lord 라고 씁니다.

불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독일어 다 마찬가지 입니다.

아주 특별한 직역된 성서에서만 야훼라는 이름을 씁니다.

 

전에 한번 설명 드렸지만 다시 한번 설명을 드리자면, 6세기 경에 어느 수사님이

굉장히 똑똑한 분이였지만 수업 시간에 조금 졸았던 분이 있어요. 그래서 야훼라고

쓰고 아도나이라고 읽는다는 거를 좀 깜빡 졸았던 거 같애요.

 

히브리 사람들은 야훼라고 쓰고 아도나이라고 읽는다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 놓았냐하면 야훼라고 쓰고 아도나이 모음을 밑에다가 붙여 놨어요. 

 

 

그걸 보고서 도저히 발음이 안 되니까 아, 이거는 아도나이라고 읽으라고

했지? 라고 기억할 수 있도록.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야훼 밑에는 다 모음이

아도나이라고 붙여 있어서 어떤 야훼라는 이름을 정확히 어떻게 발음해야

되는지 사실 모릅니다. 어떤 모음이 붙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데 이 수사님은 졸았잖아요. 그러니까 야훼라는 자음에다가 아도나이라는

모음을 붙여서 읽어버린 거예요. 야훼라는 자음에다가 아도나이라는 모음을

붙여서 읽어버리면 뭐가 되냐하면, '여호와'가 됩니다.

 

그래서 가끔 프로테스탄트 성경을 보면은 하느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써 놓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프로테스탄트 구약 성경 학자들도 이건 고쳐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왜냐? 이거는 히브리 전통도 아니라 단지 뭐가 잘못 됐다는.

역사적인 커다란 오류 때문에 이렇게 생긴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들이 개신교를 너무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 때문에 생긴 일입니까? ^^*~~~ 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마는 우리가

종교 개혁의 어떤 역사적인 상황을 보면은 누가 반성해야 합니까?

천주교가 반성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이...

 

그때 신학이 뭐였습니까?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오늘날과 사실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법이 뭐였다는 겁니까? 커다란 성당을 짓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보게 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따라서 그렇게 무리하게 성당을 짓다가 그렇게 된 겁니다. 하느님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고 커다란 건물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된다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본 겁니다.

 

이제 그러다가 당시의 어떤 북유럽의 남쪽 왕가들, 여러분들 영국, 독일 남부,

불란서, 스페인, 이태리 이 나라들이 다른 나라 같지요? 아닙니다. 다 자기네들

사춘끼리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 나라입니다.

 

그런 어떤 지배적인 그룹에 약간은 좀 반발하는 북유럽의 그런 신흥 그룹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그와 같은 루터가 갖고 있었던, 종교가, 우리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라는 이상이 정치적으로 이용이 되면서 이제 종교

개혁이라는. 이름은 종교 개혁이라고 붙이고 사실은 뭐가 일어난 겁니까?

 

따라서 우리가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해야겠습니까?

이단이라고 생각을 해야겠습니까? 교회법적으로는 이단이라고 서로 얘기

했지마는 내용은 어때야 되겠습니까?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함께 있어야 할, 지금은 헤어져 있는 형제.

그게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보는 가장 올바른 입장입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갈라졌는가? 누구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느냐?

우리에게 있다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를 보면 그렇게 갈라져간 형제들도, 그렇게 역사를 반성하는

우리도 반성을 했는지, 안 했는지 요즘도 계속 하는 일이라고는 땅 사고 집 짓는

일이더라. ^^*~~~ 인간이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게 많이 없는 거 같애요.

가슴을 치고 저희들이 반성을 해 봐야 되는 문제입니다.

 

예,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야훼라고 읽지마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거는 자음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요즘은 거의 공식적으로 야훼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마는 그렇게 읽지 말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야하바'라고 모음을 붙여서 읽어야 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야하베'라고 읽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

나라에 가서 물어볼께 또 하나 생긴 겁니다. ^^*~~~ 하늘 나라에 가서 "정확히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 겁니까?" 하고 ^^*~~~~

그게 자음만 붙어 있으니까 알기가 좀 어렵습니다.

 

예, 하느님의 이름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장소, 이름과 장소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름뿐만 아니라 장소에 관해서도 우리들이 좀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과 하느님의 장소는 엄격하게, 아주 밀접하게 붙어 있는 경향

입니다.

 

* 신명 12,5: 야훼 너희 엘로힘이 그의 이름을 두고 그의 거쳐를 삼으려고,

                   너희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선택하는 곳ㅡ

신앙 성소를 설명합니다.

 

* 신명 12,11: "야훼 너희 엘로힘이 당신의 이름을 머무르게 하시려고 선택한

                    곳"이라고 표현한다.

 

* 예례 7,10-14: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따라서 구약 성경 안에서는 히브리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한데요.

어떤 존재와 그 사람의 이름과 그 사람이 머무는 그 집을 동일시 합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다 뭐라고 그럽니까?

"이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누구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이름이라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를 얘기하는 겁니다.

 

따라서 야훼라는 이름이 머무는 집, 그 야훼의 집, 아니면 야훼라는 이름,

야훼라는 하느님의 존재, 이 모든 것들이 동일시 된다는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주석가들이 생각하기에는 성경이 쓰여진 건

나중이지요? 유배를 거치면서, 유배 후로 오면서 최종적으로 편집이 됐다고

생각을 하는데 성경 이전의 역사 안에서 유다 왕국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성경 텍스트를 연구하면서 이렇게 좀

연구하다보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도 나타나지만 큰 틀에서 보면은 아마 북이스라엘에서는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엘로힘'이라고 불렀었던 거 같다. 그리고 남유다에서는

자신들이 섬기는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불렀었던 것 같다. 그리고 유배를

거치면서 그 두 이름이 같은 하느님의 두 이름으로 등장하는 거 같다라는 것이

오늘날 주석가들의 일반적인 의견입니다.

 

반면에 유다의 랍비들은, 요즘에 가르치는 유다지도자들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야훼와 엘로힘은 하느님의 두 이름인데 하느님이 본래부터 그 두 이름을

가지고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런데 이거는 하느님의 두 특성을 표시하는 이름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뭐 다르게 썼고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느님의 두 특성인데 뭐냐? 야훼라고 얘기했을 때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모습이. 반대로 엘로힘이라고 얘기했을 때는

하느님의 정의로움을, 하느님의 공정함을 표시하는. 

 

반면에 엘로힘이라고 얘기했을 때는 좀 재판관 같은 그와 같은,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뭘까요? 엄부자모(嚴父慈母)라고 뭐 그런 모습이 두 이름 안에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유다의 랍비들이 설명합니다.

 

역사적으로 뭐 다르게 썼고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느님의 두 특성인데  뭐냐?

야훼라고 얘기했을 때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모습이.

반대로 엘로힘이라고 얘기했을 때는 하느님의 정의로움을, 하느님의 공정함을

묘사하는. 따라서 야훼라고 얘기했을 때는 아버지 같은, 어머니 같은.

 

반면에 엘로힘이라고 얘기했을 때는 좀 재판관 같은, 그와 같은. 우리 식으로 

얘기했을 때는 뭘까요? 엄부자모(嚴父慈母) 뭐 그런 모습이 두 이름 안에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유다의 랍비들이 설명을 합니다. 예, 따라서 여러분들 사랑과

정의, 요 두 개념이 사실은 구약 성경 전체를 또는 성서 전반을 흐르는 자전거의

두 바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랑은 뭐가 될까요? 그건 맹목적인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이 아이들을 망치는 겁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 정의는 뭐가 될까요?

그건 정말 차가운 정의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일은 대개 어떤 경우에

생기느냐하면, 내가 정의의 칼을 들고 있다는 그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역사 안에서.

 

따라서 정의로운 일을 할 때는 항상 사랑을,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나는 과연 정의로운가?'하는 고 질문을 함께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해서 가장 잘 표현하는 우리나라 말은, "우리가 남이가!" ^^*~~~

정의에 관해서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법대로 해라!" ^^*~~~

 

그런데 사랑에 관해서 얘기해야 되는 그 대목에 누군가가 "법대로 하자!"

그건 잘못 쓰인 겁니다. 정의로움에 관해 얘기해야 하는 그 대목에서,

누군가가 막 탈세를 하고 아니면은 막 나쁜 일을 하고 그랬는데 거기다가 대고

"우리가 남이가!" 라고 얘기 했다면 그거는 잘못된 겁니다.

 

사랑에 관해서 얘기해야 되고 정의에 대해서 얘기해야 되는 그 올바른 시간과

올바른 장소 그것을 적절하게 그리고 균형 있게 맞추는 것. 그것을 성경에서는

지혜라고 얘기합니다. 지혜문학에 가서 그 말씀을 드릴 시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예, 그 다음 우리가 읽을 단락은 탈출 3,16-22의 말씀입니다.

 

예, 15절까지 계속된 야훼의 자기 소개에 이어서 이제 모세의 부르심이 이어집니다.

지금과 같은 리듬입니다. 야훼가 한번 자기를 계시하고 모세를 부르고, 두 번째

자기를 한번 계시를 하고 또 모세를 부르고.

 

예, 구약의 부르심이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예언자에 이르기까지 파견의 명령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따라서 파견할 때에는 항상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가라!"

또는 "떠나라!" 가서 이제 뭐를 하래는 겁니다.  여기서도 그런 명령으로부터 등장을

합니다. 우리 말 주교회의 성경에서는 "가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앞선 10절에서는 굉장히 간단히 한줄로 언급된 야훼의 구원 계획이 이제부터는

조금은 장황하게 그려집니다. 먼저 재미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16절: "가서 이스라엘 원로들을 모아 놓고"

'이스라엘 원로들' 여기서 말하는 히브리 말을 직역하자면,  '이스라엘의 늙은이들'

이라는 그와 같은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냥 늙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늙어서

일정한 집단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탈출기의

중요한 장면마다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12장 21절 파스카를 준비하는 장면, 또는 17장 5절 마싸와 므리바에서

물을 얻는 장면, 24장 1절 시나이 계약의 장면. 이럴 때마다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단위 부족들. 나중에 등장하는 용어지요. 이스라엘

지파들을 대표하는 일종의 대표자들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일정한 결정권을 가진

휠채를 구성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민수기 11장에는 일흔 명의 원로들이 결정되는 과정과 그들이 야훼의 영을

받은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는데 모두 몇 명을 파견하시는지 아십니까? 일흔 명 또는 수사본에 따라서

일흔두 명을 얘기합니다. 요 숫자와 맞물립니다. 일흔.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일흔 명.

 

나중에 예수님 시대에도 비슷한 유다의 내적인, 유다인들을 통치하는 내적인 통치

기구가 생깁니다. 여러분들 산헤드린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산헤드린.

그것들이 이스라엘 원로들의 모임입니다. 이 원로들이라는 말을 그리스 말에서는

'프레스비떼로스'라는 용어로 번역을 했고, 그 '프레스비떼로스'라는 그리스 말에서

오늘날 '사제'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프리스'라는 영어는 그 어원을 '프레스비떼로스'라는 그리스 말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톨릭 교회에서는 따라서 그 원로들이라는 말이 이렇게 오면서

오늘날 '신부' 가 오늘날 '사제'가 가톨릭 교회에서 그 원로들을 이어받는 말이

되었다면 개신교에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장로하는 말을 씁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장로들은 가톨릭 교회의 사제와 이런 서열로 보자면은

동급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까운 목사님이랑, 같이 성서 공부한 목사님이랑, 이런

얘기를 하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아, 개신교에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목사가 뭐냐하면 장로 중에 한 명입니다.

따라서 서로의 전통이 사실은 잘 보존 돼 있는 겁니다. 장로급입니다. 나이도 별로

안  많은데 ^^*~~~ 보좌 신부들도 장로급이거든요. ^^*~~~ 젊은 신부들.

아직 갓 서른 이렇게 됐을텐데 장로라고 부릅니다.

 

아무튼 민수기 11장에는 그렇게 일흔 명의 원로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 모세는 그들에게 우선 누가 자신을 보냈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앞선 내용, 야훼의 자기 계시 내용이 여기 덧붙여집니다.

 

"야훼, 너희 조상들의 엘로힘,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엘로힘께서"

바쁘니까 생략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엘로힘, 이사악의 엘로힘, 야곱의 엘로힘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제는 바뻐졌지요? 그러니까 함께 묶어 버립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엘로힘께서 나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너희를 찾아가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

보았다.' " 이것도 바쁘니까 생략되는 거지요? 본래는 뭡니까?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늘까지 들려서 하느님이 그거를 듣고 자신이 한 약속을 기억하고 내려와서 그들을

보니까 그들의 어떤 고난을 알게 되었다'라는 건데 여기서는 그냥 자발적으로 내려

간 것처럼 약간은 좀 전체적인 니야기의 흐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거는 뭡니까? 앞에 있는 내용을 독자들이 다 알고  있다는 거를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건너 뛸 수 있는 겁니다.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이런저런 앞서 언급한 그런

민족들이 사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했다."

여기서도 그름은 뭐냐? 야훼 하느님이 그 땅에서 내려와서 자신의 백성들을 데리고

다시 올라가는 그와 같은 그림입니다.

 

예, 18절: "너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함께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여라."

 

앞선 내용에서 언급되지 않는 새로운 국면에 대한 명령이 등장합니다. 야훼는 모세가

원로들과 함께 이집트 임금에게 갈 것을 명령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광야로 가서

히브리인들의 엘로힘에게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이집트 임금에게

청해야 합니다.

 

3장 12절과 연결되는 내용이기는 한데 하지만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킨다는 앞선 계획들과는 꽤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

요 얘기만 딱 들으면 어떻게 됩니까? 광야로 사흘 길을 가서 우리들의 하느님께 뭐

제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할까요? 돌아와 가지고 계속 종으로 살겠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조금 이상합니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특이하게도 야훼는 히브리인들의 엘로힘이라고 등장합니다.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야훼 히브리인들의 엘로힘이 저희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라는 이런 호칭으로

불립니다. 이런 호칭은 구약성경에서 모두 여섯 번 밖에 안 나타나는데 그것도

탈출기에서만 등장합니다. '히브리인들의 엘로힘' 아주 특이한 그와 같은 호칭

입니다.

 

18절 후반부에서는 반면에 "야훼 우리들의 엘로힘"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여라."

이거는 굉장히 구약에서 많이 등장합니다. 한 백번 정도 등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들이란 따라서 '히브리인들'을 이야기할 것인데 앞선 내용과

연관시켜 생각하자면.

 

따라서 우리들을 상대하는 너희들은 이제는 이집트인들이 됩니다.

"너희들" 이 호칭을 통해서 이제 이집트인들과 히브리인들이 각각 구별이 되기

시작하는데 뭐에 따라 구별됩니까? 이집트인들은 이집트인들이 섬기는 신이 있고

내지는 그들이 섬기는 신적 존재 파라오가 있고, 히브리인들은 히브리인들이 섬기는

신 야훼가 있다라는, 이제 야훼와 파라오의 대결 구도가 각각 백성들의 대결 구도로

자리잡게 되는, 전개되는 그런 밑그림이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겁니다.

 

19절: "그러나 강한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야훼는 이집트 임금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굉장히 불리한 대결입니다. 야훼는 파라오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비슷한 증상이 욥기에서 욥이 하느님과 재판을 하는데 무지하게 불리합니다.

왜냐? 욥이 하느님께 "나랑 당신 재판합시다!" 그러고 재판을 하는데. 따라서

욥이 원고고 하느님이 피고잖아요. 그런데 재판장이 하느님이예요. 그러니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파라오와 하느님의 대결 안에서도 하느님은 이미 파라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등장하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미래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등장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싸움은 안 된다는 겁니다. 파라오는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하느님과 싸우지요?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하느님과 싸우지요? ^^*~~

하느님과 싸울 때 우리의 모습은 따라서 모세를 닮아 있는 겁니까, 파라오를 닮아

있는 겁니까? 파라오를 닮아 있는 겁니다.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습니다. 잘 아시니까.

^^*~~~

 

예, 하지만 여기서 이것을 예정론이나 운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지전능함에 관해서 분명히 얘기하겠

지만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이라는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어디가서 연설을 하다가 "나는 예정론 자들을 믿으려고 했었는데 믿기가 참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도 길을 건널 때 좌우를  살피더라." 모든 게 다 예정 돼 있다면 좌우를

살필 필요가 없죠. 그냥 건너가면 되겠지요. 살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은 살 것이고

죽기로 예정된 사람은 죽을 것이니까. 하지만 그들도 좌우를 살피더라.

뭐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신앙은 예정론입니까? 아닙니다.

분명 하느님의 권능에 관해서 우리들이 신뢰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 관해서 우리는 믿고 있지마는 그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나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는 뜻은 아닐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인생에 일어났던 좋은 일들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고백할

수는 있는 겁니까?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주신 것이다." 라는 바로

그겁니다.

 

예, 앞서서도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예정론이란 이런 겁니다.

인천가는 기차를 타면 인천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수원가는 기차를 타며 수원에

도착합니다. 어떤 기차를 탈 것인지는 우리가 정하는 겁니다. 수원 사시는 분께는

제가 죄송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아무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택 앞에

우리는 놓아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셔야 됩니다.

 

자, 그 다음에 19절에 등장하는 '강한 손'이라는 표현입니다.

계속해서 탈출기에는 하느님의 권능을 표시하는 세 가지 단어가 등장합니다.

제일 작은 힘을 표시할 때는, '손가락',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조금 더 큰 힘은, ' 하느님의 손' 정말 큰 힘은 '하느님의 팔'

알몸으로 부딪치시지는 않는 거 같애요. 손가락, 손, 아니면 팔 또는 나중에 말씀

드리겠지만 '손바닥'이라는 표현도 등장하곤 합니다.

 

20절: "그러므로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 보낼 것이다."

 

'이적'이라는 단어가 등장을 합니다. '온갖 이적을 일으켜'

앞서서는 '표징'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었는데 이제는 '이적'이라는 단어가 등장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적'이라는 것은 비자연적인 현상을 의미합니다.

자연적으로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자연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적은 앞으로 등장하게 될 10가지 재앙과 관련이 돼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나중에 등장하는

10가지 재앙의 이야기들의 그런 뉘앙스를, 요런 비슷한 단어들이 등장을 계속해서

20절, 21절, 22절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22절에서 "여인들은 저마다 자기 이웃 여자와 자기 집에 함께 사는 

여자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가지를 요구할 것이고," 언어 습관이 다릅니다.

우리말 같으면 당연히 금,은, 금은방 이건데 히브리 말에서는 은붙이와 금붙이,

은이 먼저 등장합니다.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가지를 요구할 것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부분은 성서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그런 테마입니다.

신명 13,13을 보면 "너희가 그를 자유로이 놓아 줄 때 그를 빈손으로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그는 종입니다. 종은 해방시킬 때 그냥 "나가라!" 그러면 안 된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그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퇴직금 또는 연금, 생계보장

이런 거 해줘야 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탈출 23,15: 무교절에 관한 내용을 이야기하면서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아빕 단 정해진 때에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그달에 너희가 이집트

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무도 빈손으로 내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 따라서 너희

조상들이 나올 때에도 내가 이집트 사람들을 시켜서 너희 조상들에게 은붙이와

금붙이를 주었다라는 그런 내용을 행간에서 우리가 읽어야 합니다.

 

탈출 34,20에서 "나귀의 첫 새끼는 양으로 대속해야 한다. 대속하지 않으면 그 목을

꺽어야 한다. 너희 자식들 가운데에서 맏아들은 모두 대속해야 한다. 아무도 빈손

으로 내 앞에 와서는 안 된다." 빈손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그런 제사의 중요성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지금 읽은 내용과 같은 내용이 탈출 11,2에 나옵니다. "백성에게 일러, 남자는 이웃

남자에게, 여자는 이웃 여자에게 은붙이와 금붙이를 요구하게 하여라."

탈출 3,22에서는 여자만 나오는데 탈출 11,2에서는 남자까지 등장합니다.

텍스트의 내용이 조금 변합니다.

 

*탈출 12,35-36

* 35절: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가 일러 준 대로, 이집트인들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가지를 요구하였다.

남자, 여자 구별하지 않습니다.

 

* 36절: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인들에게 호감을 사도록 하시어,

           요구하는 대로 다 내주게 하셨다. 이렇게 그들은 이집트인들을 털었다.

그들은 이집트인들을 어떻게 했다? 좀 이상해요. 털다니! ^^*~~~

 

여기서 '나살'이라는 동사가 사용되는데 그 의미는 '턴다'하는 뜻입니다.

근데 이상하죠? 이집트인들은 하느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인들에게 호감을 가지게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호감을 가졌대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발적으로 주었대는

거잖아요. 근데 여기서는 털었다고 그럽니다. 이건 어떻게 된 걸까요?

 

받는 입장에서는 턴거고, 주는 입장에서는 호감을 가지고 준 거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도둑이 들어 왔는데 나는 막 도둑을 보니까 멋있게 생겼어요.^^*~~

호감을 가지고, 돈은 여기 있구요. 금붙이는 여기 있구요. ^^*~~~ 도둑은 털어서

갔다? 그건 좀 설명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은 어떻게 이야기하냐하면, '나살'에는

'턴다'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구한다', '구해준다'는.

 

따라서 이게 굉장히 웃기는 표현인데 "이집트인들을 은붙이와 금붙이로부터 해방

시켰다." 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고, 또 다른 경우는 조금 신학적으로 이런 의미로

저는 읽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지금 탈출기에서는 파라오와 야훼 또는 이집트의 신과 이스라엘의 신이 서로 대결

하는 모드입니다만 하지만 나중에 신명기에 가서 등장하는 신관 중에 하나는 이

세상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겁니다. 그건 어떤 뜻입니까? 하느님은 이스라엘만 구원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집트도 구원해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탈출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만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로 해방돼야

되는 겁니다. 탈출 사건의 중요한 의미는 앞으로 텍스트를 읽으면 쪽 나오겠지만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야훼 하느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 플러스(+) 이집트인들이 야훼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

그 모든 것이 다 중요하대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모 대통령 후보 찬조 연설을 봤어요. 정해신 박사라는 분.

쌍용자동차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쌍용차의 피해자들과 그 아이들이 겪는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조금 더 이야기하면 선거법에 위반이 되기 때문에

더 말씀을 안 드리겠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그들을 쌍용차의 그 노동자들을 그렇게 무참하게 폭력으로 짓밟았던 경찰들과

용역들의 영혼도 역시 파괴된 겁니다. 우리는 그것까지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들이 월남전에 참전했었잖아요. 거기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 있어야 됩니다.

대한민국은 빠른 시간 안에 베트남 사람들에게 정말 미안하다라는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하지만 반면 월남전에 참전했던 그 군인들은 그때 조국과 민족의 명예를

위해서 또 국가를 위해서 거기에 가서 그렇게 열심히 싸웠지마는 그 안에서 그렇게

폭력을 휘두르면서 그 우리 군인들의 영혼도 역시 파괴된 겁니다.

 

그들을 누가 돌보아 줍니까? 그렇게 파괴된 영혼들. 우리 공동체가, 우리 국가가,

우리 민족이, 우리 교회가 그렇게 파괴된 영혼들, 세상에 난 상처들.

어떻게 보면은 누군가가 폭력을 휘둘렀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 중에 누가 더 큰

상처를 받겠습니까? 물론 물리적으로는 피해자가 더 큰 상처를 받지마는 그 영혼에

남는 상처는 가해자가.

 

저도 제 인생을 한번 쭉 뒤돌아 보면서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 있는데 그 기억들은

제가 누구한테 얻어 맞은 기억일까요?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잘못했던 기억일까요?

저는 누구에게 잘못했던 기억들입니다. 얻어 맞은 기억들로 힘들지만 제가 잘못한

기억들은 정말 제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어요.

 

모든 인간은 비슷할 겁니다. 그렇게 그 안에 난 상처들을 치유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역활이고 또 그것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그 이유래는 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11회 야훼의 표징: 탈출 4,1-9이 계속됩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