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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2/ 제11회 야훼의 표징 강의록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04 조회수596 추천수0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 2

 

제11회 야훼의 표징: 탈출 4,1-9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는 탈출기 4장을 읽으려고 하는데 먼저 텍스트를 함께

읽고 그리고 나서 강의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지금까지의 어떤 내용을 조금 한번 볼까요?

전체적인 탈출기의 구조를 저는 장소로 좀 나눠 본 겁니다.

 

 

 

 

탈출기의 구조

 

*1,1-6,27을 꼭 미디안은 아니지만 미디안에서 모세가 야훼의 부르심을 받는

그와 같은 큰 테마로.

 

* 6,28-13,16: 이집트(해방).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과 함께 해방을 얻어가는,

해방되어 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 13,17-18,27: 광야(탈출). 이집트를 떠나서 광야에 나오는데 이집트 군이 뒤쫓아

오지요? 하지만 갈대 바다를 건너서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그런 어떤

긍극적인, 결정적인 어떤 탈출의 장면으로 그 장면이 끝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이집트라는 얘기가 더 이상 안 나옵니다.

 

* 19,1-24,11: 시나이(계약)

이제 시나이에 가서 계약을 맺는 이야기를.

 

* 24,12-32,35: 시나이(증언판)

이제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증언판을 얻는 그와 같은 이야기로.

 

* 33,1-40,38; 시나이(성막).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시나이 산을 떠나서 여정을

시작을 해야 되는데 하느님과 함께 가야 되니까 함께 가기 위한 성막을 준비하는

내용으로, 예, 크게 여섯 단계로 이렇게 나눕니다.

 

여러분들 혹시 다른 탈출기에 대한 다른 책들을 보면서 조금 탈출기의 구조를

저와는 다르게 다른 신부님들이나 아니면 다른 주석가들이 제시할 겁니다.

누가 맞을까요? ^^*~~~ 저는 제가 ^^*~ 맞을 겁니다. ^^*~~~

저는 이렇게 보는 게 탈출기는 이해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하고

각각의 주석가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문학작품을 이용하는  틀이 있을 겁니다.

 

저희들이 이 여섯 단계 중에 어디에 있는 거지요? 아직 첫 번째 단계에 있는 겁니다.

그 첫 번째 단계를 조금 우리가 자세하게 생각해 봅시다.

 

 

 

 

미디안(부르심)

 

* 1,1-21: 이집트의 이스라엘 자손들

미디안에서의 어떤 부르심의 이야기인데  그 제일 첫 단계에서는 이집트의 이스라엘

자손들에 관한 이야기. 그러면서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억누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 번째 억누르는 방법은 그들에게 심한 노역을 시킴으로써 두 번째 또 억누르는

방법은 아이들을, 특히 남자 아이들을 죽이는 그와 같은 방법.

 

1장에 나오는 어떤 이스라엘이 맨 처음에 요셉의 시기에 이집트로 환영 받으면서

갔지만 하지만 그곳에서 이제 요셉을 모르는 파라오가 이집트의 임금이 되자,

그때부터는 어떤 억압 받는 민족이 되었다라는 하나의 어떤 전환적인 이야기를.

또 그 전환의 폭이 굉장히 큰 겁니다. 1장에서 하고 있고.

 

* 2,1-25: 모세(탄생부터 혼인까지)

그 다음에 2장에서는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나서 목숨을 구하는 이야기.

그리고 나서 이집트 왕궁에 들어가서 살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하고 뭐

이집트인을 때려 죽이고 뭐 하는 그런 과정에서 나중에 미디안으로 가서 혼인하는

이야기까지 일종의 모세의 사생활에 관한 그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 3,1ㅡ4,17: 야훼와 모세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가 읽고 있는 구절이지요? 하느님과 모세가 만나는 첫 만남

입니다. 첫 만남. 얼마나 중요합니까? 많은 그런 어떤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가 시작하면서 대개 무어를 설명할려고 애를 씁니까?

 

이 남자와 이 여자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처음부터 뭐 서로 좋아할려고 만난 게

아닌데 뭐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길에서 툭 부딪쳐서, 아니면 뭐 택시 잡느냐고

싸우다가, 아니면은 뭐 학교에서 뭐 어떻게 돼서 우연히 이렇게 만났는데 점점.

 

여기서는 야훼와 모세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여기서 뚜렷한 거는 뭡니까?

누가 누구에게 오는 겁니까? 야훼가 모세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겁니다.

"너 나를 위해 일을 해 주지 않겠니?" 모세는 뭐라고 그럽니까?

싫다고 그럽니다. 이게 영화로 보면은 야훼는 좀 남성의 역활을 모세는 좀

이렇게 빼는 그와 같은 역활.

 

* 4,18ㅡ5,21: 부르심의 수행

이제 모세가 " 아, 그렇다면 내가 야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얘기하고 그

다음부터는 충실하게 야훼의 뜻을 수행하는.  따라서 4장 이후부터는 모세의

충실성이 드러나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부르심을 수행하는 것.

 

* 6,14-27: 아론(+ 모세)의 족보

창세기에서는 계속해서 나왔지마는 탈출기에서는 그 현상이 사라졌었는데,

창세기에서는 얘기가 쭉 진행된 다음 어떤 이야기가 나옵니까? 족보이야기가

나왔잖아요. 카인과 아벨 이야기가 쭉 나오다가 족보가 나오고,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와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중간 중간에 여러가지 족보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노아의 후손의 족보라든지 이런 족보 이야기가 중간 중간에 있었는데

탈출기에 가서는 그런 현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탈출기 시작 부분에서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을 얘기하는, 언급하는 그 정도였지

족보 얘기는 없다가 다시 족보 얘기가 되면서 첫 부분이 미디안에서 야훼 하느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그 첫 부분이 마무리가 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는 어떤 단계에 와 있습니까? 셋째 단계(3,1ㅡ4,17)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들 이 자리에 와  계시는 중요한 이유는 받아 적기 위해서 와

있는 게 아니라 저랑 같이 생각하기 위해서 와 계신 겁니다. ^^*~~~

 

예, 그와 같은 셋째 단계를 다시 한번 쪼개 봅시다.

 

 

 

* 3,1ㅡ4,17 야훼와 모세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자기를 누구인지 소개하는 대목(3,1-6: 하느님의 자기계시 1)

이 있었고 그 다음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뭔가 부르시고 시키시는, 모세에게 임무

를 주시는 그와 같은 대목(3,7-12: 하느님의 부르심 1) 그 다음에 자기를 누구인지를

계시하는 대목(3,13-15: 하느님의 자기계시 2)이 그리고 다시 한번 모세에게 두 번째

로 뭔가를 해 주지 않겠니?  나를 위해 이런 일을 해 주지 않겠니? 라고 부르시는

대목(3,16-22: 하느님의 부르심 2)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3장의 내용은 끊임없이 뭡니까? 자기계시와 부르심, 자기계시와 부르심.

내가 누구인지를 얘기하고 모세에게 이런 내가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데 니가

들어주지 않겠니? 하는 얘기가.

 

그 뭐죠? 샌드위치라 생각하면은 두 층으로 반복돼서 이루어지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와 같은 자기계시와 부르심을 마무리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표징을 보여 주십니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얘기 했는데 우리 식으로

논리를 따지자면은 이런 겁니다.

 

"당신 말만 듣고 내가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그 표징을 보여

주시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에 관해서 얘기 하는데 그 은총에 관해서 이야기를

많이 듣지마는 그 은총을 눈으로 좀 보고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을 가시적으로 교회가 갖고 있습니다.

눈에 보일 수 있는,눈으로 볼 수 있는 그와 같은 표징들을 교회가 지니고 있습니다.

그걸 뭐라고 부릅니까? "성사입니다." 맞습니다.

 

성사가 뭐냐하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의 가시적인 표징이다."라는 것이

칠성사에 관한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칠성사엔 어떤 게 있지요?

여러분들 일행을 한번 쭉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받고, 견진받고 그 다음에

혼인하고, 그 다음에 아프잖아요. 병자성사, 그 다음에 혼인하지 않는 사람들은

신품성사, 또 매일 매일 일상 안에서 우리가 성체성사, 그리고 우리가 죄도 짓고

그러니까 거기에서 고해성사.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 칠성사: 세례, 견진, 혼인, 병자, 신품, 성체, 고해

 

본래 그렇다면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모습이라면은 우리가 하느님을

잘 믿고 이런 눈에 보이는 것 없이도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면은

어쩌면은 그 같은 성사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혼인할 때도 "나는 당신을 영원히 내 배우자로서 사랑하고 지켜주겠습니다."

라는 맹세로 충분할 텐데 눈에 보이는 뭐가 있어야 됩니까? 반지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엊그제도 혼배 성사가 하나 있었는데 제가 기분이 좋았어요. 왜냐하면 신랑이랑

신부랑 반지를 어떻게 맞췄는지 너무 꽉 껴가지고 ^^*~~~ 이렇게 옆에서 끼는데

보니까 다시는 뺄 수 없을 것 같이 ^^*~~~ 이렇게 했더라구요. 그래서 야, 너희는

분명히 잘 살겠다. ^^*~~~~

 

예, 아무튼 그런 어떤 표징 그런 것들이 필요하고 교회 안에서 성사는 그런 역활을

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분들이 사실은 그와 같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특히 이제

칠성사 중에 자꾸자꾸 좀 이렇게 부족한 것이 이런 성사에 대한 신뢰를 약하게

하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저희 본당에서 고백성사를 할 때, 신부님들을 많이 청해요. 여섯 분, 일곱 분

이렇게 청합니다. 그 다음에 한 세 분 정도의 신부님은 우리들이 평소에 판공 보는

식으로 그냥 크게 성찰할 죄가 없는 분들이 많이 있을 거 아니예요.

 

뭐 고해성사 듣다 보면은 "신부님 뭐 주일 미사 두번 빠졌구요. 더 이상 고백할

내용이 없습니다." 이런 짧은 분들은 그 신부님한테 가고, 그것이 아니라 내가

조금 하느님 앞에 마음을 열고 길게 면담하면서 성사를 보고 싶다 하는 분들은

다른 신부님들 세 분한테 가서 길게 성사를 보십시오. 뭐 이런 어떤 조금 나누어서

성사를 보실 수 있게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뭐 한 해, 두 해 그런 체험들이 생기니까 저한테 그런

이야기들이 본당 안에서 신자분들이 그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아, 지난 번에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쁜, 자기 본인에게 의미있는

고백성사를 봤습니다." 하는 그런 어떤 이야기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렇지 않고 본당에서 제가 혼자 신자들의 고백성사를 준다면은 그렇게 드릴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뭐 줄이 30m, 40m 서 있는데 "어, 천천히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 해 보십시오." 이 얘기 절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 어떤 사목적인 탄력, 내지는 융통성은 조금 필요한 거 같습니다.

 

자, 4장 1절. 그리고 모세가 대답을 합니다. 3장에서의 주된 문제는 이런 거

였습니다. 여러분들 기억 나십니까?

 

 

 

3,11: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첫 번째로 하는 대답이 이겁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이 백성을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 다음에 어떤 신이

너를 보냈느냐고 그러면, 3,13: "제가 그들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주된 문제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나에게 나타난 당신은 누구고 그리고 이제 이집트를 떠나서 도망 와 있는 도대체

내가 누구길래 당신이 나에게 그와 같은 일을 시킵니까? 라는 겁니다.

정체성에 관한 그와 같은 문제입니다.

 

4장 1절에서부터 보도되는 모세의 문제 역시 야훼의 표징이라는 제목은 붙였지만

그 안에서의 문제 제기 역시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앞선 문제가 파라오가

"네가 도대체 누구길래 이런 일을 하느냐?" 라고 묻는 것이 문제라면 여기서의

문제는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제 말을 듣지 않으면서.

 

여기서 그들은 누구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 또는 백성들을 대표하는 원로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 여기를 보십시오. 그 앞에 보면은 3,16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할 때 뭐라고 말씀하시냐하면 "가서 이스라엘 원로들을 모아 놓고"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그들이라는 대명사는 고 앞에 있는 문단과 연결 시킨다면 이스라엘 원로들이

되겠습니다.

 

자,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우리 말에서는 단순히 이렇게 얘기했지마는 '믿는다'

라는 동사는 히브리 말로 '아만'이라는 동사입니다. 그 '아만' 이라는 동사에서

우리가 요새 교회에서 사용하는 '아멘'이라는 말이 역시 나오는 겁니다.

'믿습니다'라는.

 

누군가가 이렇게 뭐라고 기도를 하면 기도하고 나서 마지막에 '아멘' 하잖아요.

그러면 "나는 당신이 저 기도를 들어 줄 것을 믿습니다."라는 하느님에 대한 어떤

믿음의 표시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 내가 아멘 할 때는 그 앞에 어떤 기도가

있었는지를 생각하셔야 됩니다.

 

예를들어 좋지 않은 기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아, 나는 독재자들이 우리

힘없는 백성들을 더욱더 억누를 수 있도록 당신이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얘기하면 그 뒤에 '아멘'이라고 붙여야 할까요? 가만히 있든지 하여튼 뭐 아멘의

반댓말이 뭔지 좀 연구해 오겠습니다. ^^*~~~ "그건 안 됩니다."라고 얘기하든지

올바르지 않은 기도라면은.

 

"아, 다음 번 대학 시험에 우리 애만 딱 붙고 다른 애들은 다 떨어지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한다면 '아멘'이라고 응답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모든 기도의 내용에

내가 정말 마음으로 동의하고 그것은 나의 기도이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이루어주시

리라 믿습니다. 이루어 주실 것을 내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는 그 얘기가 아멘

이라는 응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주일날 성당 가서 미사 하실  때 신자들의 기도 하지요?

그 기도 내용 잘 듣고 아멘 하십니까?  ^^*~~~

그냥 남들이 하니까 나도 아멘  해야 되나보다라고 하는 거죠.

미사 드리는 경문에서는 신자들이 아멘으로 응답하는 전례적 응답이 있습니다만

보통 기도하실 때 그 기도가 정말 나의 기도일 때 아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그 점에

관해서 조금 유념하시면서 형식적으로 아멘 하는 것을 조금 피해야 된다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아무튼 여기("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주님께서 당신

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소.' 하면 어찌합니까?")서 모세가 야훼를 만나 그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그런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어떻게 믿게 할 것인지 더 나아가

그들이 파라오의 권력보다, 세속적인 인간적인 권력보다 하느님의 권능을 더 신뢰

할 수 있도록 어떤 길이 있는지에 대해 모세가 여기서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예, 따라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첫째, "그들이 저를 믿지 않을 것이고" 두 번째는 "듣지도 않을 것이고"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그냥 영어에서 hearing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listening 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말로는 도대체 뭐라고 그래야 될까요?

구별이 가나요? '듣는다', '경청하다' 뭐 이정도의 구분이 되겠지요?

 

"정말 주위를 기울여서 듣지도 않을 것입니다." 라는 두 사실을 두 동사를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세 번째 동사가 "그리고 말할 것입니다." 여기 우리 말 번역에서는 좀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첫째, 나를 믿지 않고, 둘째,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셋째, 말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조금 이렇게 상대방에 관해서 도전하는 겁니다.

"내가 니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라는 겁니다.

 

예,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할꺼라는 겁니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듣지도 않으면서, 주님께서 당신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소.' 직역한다면 이런 겁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소."

직역한다면, "너에게 야훼는 자신을 보여 주시 않았다."라는 겁니다.

 

우리 식으로 좀 의역한다면, "야훼가 너에게 자신을 보여주었을 리가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조금 더 의역한다면, "내가 너를 어떻게 믿냐?"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자, 그러자 계속해서 야훼께서는 모세를 부르시는데 모세는 야훼에게 부정적으로

맞서고 있는 거지요? 이게 이제 세 번째입니다. 앞선 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 "내가 무엇이라고",

두 번째, "제가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세 번째,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 어찌합니까?"

 

아직도 두번이 더 남았습니다마는 아무튼 세 번째,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겁니다. 여러 가지 근거를 대면서

"나는 안 가겠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야훼가 그에게 "내가 그렇다면 너에게 표징을 주겠다."라고 얘기합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지팡이 입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모세는 왜 지팡이를 잡고 있을까요? 모세가 엘로힘의 산에 간 이유는 뭘까요?

자신의 장인의 양을 치기 위해서 간 거 아니예요? 목자들이 갖고 다니는 바로

그 지팡이입니다.

 

그 지팡이가 무엇이냐?라고 하자 야훼 하느님께서 "그것을 땅에 던져라."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땅에 던지니까 그게 뱀이 됩니다. 사막의 뱀들은 독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그것을 피해 물러나니까 다시 야훼께서 모세에게

얘기합니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아라. 그가 손을 내밀어 꼬리를 붙잡으니,

뱀이 그의 손에서 도로 지팡이가 되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서 뱀을 잡아야 되는 경우에

또는 뱀을 잡는 사람들을 뭐라고 그거죠? 아, 땅꾼. 그 땅꾼들이 뱀을 잡아야 하는

경우에 뱀의 꼬리를 잡을까요, 아니면 머리를 잡을까요? 머리를 잡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분명히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꼬리를 잡습니다.

꼬리를 잡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뱀의 꼬리를 잡으면?

뱀이 머리를 들어서 물 수가 있겠지요?

 

따라서 내가 굳이 잡아야 한다면 목이나 머리를 꽉 잡고 나를 못 물게 하겠지요?

그런데 야훼 하느님은 어디를 잡으라고 하는 겁니까? 꼬리를 잡으라고 합니다.

좀 이상하죠? 일반적이 아닙니다.

 

예, 사실 탈출기의 저자와 독자들도 뱀을 잡을 경우에 어디를 잡아야 할지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요즘에 우리는 서울에 살면서 뱀을 먹을 경우는 있지마는

보거나 잡을 경우는 없잖아요. 뭐 특별히 저희가 땅을 밟고 산에 살지 않으니까.

하지만 시골에 가서 살다보면은 저도 이런 저런 경우에 시골가서 있는 경우에는

일주일에 한번씩은 이렇게 저렇게 뱀을 보게 되더라구요.

 

이 사람들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쓴 겁니다.  그것은 여기서

일부러 뱀을 잡아라 하지 않고 꼬리를 잡으라고 한 것은 의도적인 겁니다.

왜 그와 같은 의도적인 거를 얘기하느냐?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야훼의

권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주 인간의 상식을 뛰어 넘습니다.

인간이 생각하기에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꺼꾸로 하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보면 장자가 상속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창세기에서 보면, 이스마엘과 이사악이 있을 때 누가 상속합니까? 이사악이.

에사우와 야곱이 있을 때 누가 상속합니까? 야곱이. 야곱의 아들들 중에

열둘이나 있는데 르우벤이나 유다와 같은 형제쪽에서 상속하지 않고 요셉에게.

그런 것들이 내려오는.

 

뭐든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적인 상식, 인간적인 것은 좀 뛰어넘는 그와 같은

모습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꼬리를 잡아라." 그런데 모세가

세번에 걸쳐서 그렇게 합니다.

 

자, 봅시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아라. 그가 손을 내밀어 꼬리를 붙잡으니, 뱀이 그의

손에서 도로 지팡이가 되었다." 우리 말로는 다 손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손을 내밀어 꼬리를 잡아라.'하는 건 '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가 손을 내밀어 꼬리를 붙잡으니' 이것도 '손'입니다.

 

그런데 '뱀이 그의 손에서 도로 지팡이가 되었다." 할 때는 원문에는 조금 다른

단어가 쓰여져 있습니다. 그 때는 '손'이 아니라 약간 '손바닥'의 어감을 갖고

있는 '그의 손바닥'에서 내지는 '그의 손바닥 안'에서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라는 그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자, 주석가들은 이런 거 있을 때 끝까지 쫓아가 봅니다. 혹시 뭐랑 연관이 돼

있나? 참 이상한 게 이집트에서 오늘날까지도 실지로 뱀을 갖고 하는 마술이

있어요. 뱀을 훈련시켜 가지고 딱딱하게 자신을 만들도록 합니다. 그래서

지팡이처럼 보이게. 이렇게 쥐고 있다가 딱 땅에 던지면 뱀이 되는 그와 같은

마술을 이집트에서도 하는 거를 어떤 주석가가 보고 왔어요.

 

그리고 나서 그와 같은 마술이 고대에도 있었고, 나중에 보면은 열 가지 재앙

부분에 가면은 이집트의 마술사들이 나오잖아요. 따라서 고대 이집트에서도

있었던 그와 같은 마술이 조금 이 안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이 부분을

해석하는 주석가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탈출기 저자는 여기서 모세가 야훼를 통해서 마술을 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탈출기 저자가 하고 싶은 것은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보여 주시는 표징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은 겁니다.

 

자, 5절에서 "이는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인 주님(야훼)이 너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그들이

믿게 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전체적인 글의 흐름으로 볼 때

다소 좀 급박하게 들립니다. 무엇보다도 야훼에게 중요한 것은 모세가 믿는

겁니다. 누구를 믿는 걸까요?  첫째는  야훼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겁니다.

 

예, 하느님께서 저에게 "니가 나를 위해서 사제가 돼 줄 수 있겠니?"라는 부르심을

주셨을 때 저도 어떻게 생각을 했을까요? "어유~ 주님, 저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못 됩니다." 나중에 사제 서품을 받을 때 그때는 "아, 내가 사제가 될 자격이 있다."

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때 사제 서품 받기 직전에 김수환 추기경님이랑

마지막 피정을 하면서 마지막 면담을 합니다.

 

모든 사제들이 그와 같은 면담을 합니다. 자신의 주교와. 저도 그때 면담을 하면서

저는 그때까지 학생으로 공부만 했기 때문에 굉장히 준비가 안 돼 있어서 추기경님

한테 들어가 가지고 "추기경님, 저는 요번에 서품 때 못 받겠습니다. 제가 암만

생각해도 제가 준비가 안 돼 있습니다." 그랬더니 추기경님이 저를 보고 웃으시는

거예요.

 

추기경님 그 특유의 좀 비웃으시는 듯한 ^^*~~~ 그런 웃음이 있어요. ^^*~~~

한편으로 보면 인자한 웃음인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좀 비웃는듯한 ^^*~~~

그런 웃음이 있어요. 그렇게 웃으시더니 저한테 그 말씀을 하셨어요.

"자네 평생 사제 생활 하면서 지금과 같음 마음으로 살아가게!" 그러구

"나가!" 그래서 쫓겨 났어요. ^^*~~~ 이틀인가 삼일 있다가 신품을 받았습니다.

 

예, 모세가 누구를 믿지 못하는 겁니까?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의 자격에 관한 이야기를.

첫째 중요한 거는 야훼가 누구인지 야훼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이거를 철학적으로 얘기했을 때 정체성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건데 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얼마나 큰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을까?"에 관한 그와 같은 믿음입니다.

 

예, 그리고 그거 하나로는 조금 부족했던 거 같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품에 넣어 보아라." 여기서 품이라는 단어는 번역하기가 좀 애매했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한 거로 보는데요. 직역한다면은 '가슴'입니다. 그러니까

옷을 열고 옷 안에 가슴에다 이렇게 집어 넣으래는 겁니다.

 

내 눈 앞에서 손이 이제 안 보이는 거지요? 그리고 가슴에 넣었다가 손을 빼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 손이 나병에 걸려 하얀 눈처럼 되어 있었다." 직역하자면

이겁니다. "보라, 그의 손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았다." 여기서 '눈과 같다.'라는

그와 같은 표현은 민수 12,10 그리고 2열왕 5,27에도 등장합니다.

 

민수 12,10: 미르얌이 악성 피부병에 걸려 눈처럼 하얗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2열왕 5,27: "나아만의 나병이 너에게 옮아 네 후손들에게 영원히 붙어 다닐

것이다." 게하지가 엘리사 앞에서 물러 나오니 나병으로 눈처럼 하얘졌다."

 

모두 나병과 관련이 됩니다. 여러분들 그 병은 옛날 사람들에게 천벌이었습니다.

여러분들 나병환자 한번쯤 보신 적이 있지요? 처음에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도 맨 처음에 영화에서도 보고, 사진으로도 보고 그랬는데 신학생 때 처음으로

나환자 촌에 가서 한센병 환우들을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하느님한테 기도했습니다.

뭐라고 기도했냐? "주님, 제가 뒷걸음질 치지 않게 도와 주십시오." 자꾸 발걸음이

뒤로 가는 거예요. 그만큼 어떤 외모라든지 뭐 이런 거.

 

서양 말로는 그 별명을 '리포스(lupus) 그러는데 그게 뭐냐하면, 사람의 모습이

늑대처럼 된대는 겁니다. 우리 말로는 나병이라고 합니다만.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그 병은 따라서 누가 내리는 병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인간이 잘못 했을 때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무서운 병.

 

오히려 그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병이라고 생각하는.

그래서 우리도 옛날에 보면 어떤 이야기가 있습니까? 저 어렸을 때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너 어디 혼자 나가지 마라. 문둥이가 잡아간다."

뭐 그런 얘기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문둥이들이 뭐 아기를 잡아 먹으면은

병에서 낫는다 뭐 그런 이야기들과 함께 나병 환자들이 굉장히 공동체로부터

멀리하는, 조금 이렇게 죄악시 하는 그와 같은 이야기들이 있었던 것을 우리가

기억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 그런데 레위기에서 등장하는 율법 규정 안에서도 우리가 볼 수 있듯이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전염병이었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할 수가 없었고, 공동체

밖으로 나가야만 됩니다. 그러다 나병이 치유가 돼서 혹시 극적으로 병이 낫던가

치유가 되면은 다시 사제에게 와서 예물을 드리고 정결 예식을 거친 다음에 다시

공동체로 귀환할 수 있는 그런 대목을 우리는 레위기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8절을 읽어 봅시다.

"그들이 너를 믿지 않고 첫 번째 표징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다 하더라도,

두 번째 표징이 말하는 것은 믿을 것이다."

 

예, 표징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은 이거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스 말로는 '쎄메이온'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어디까지도 문제가 됩니까?

나중에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가르치자

그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와서 "당신이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따라서 구약 전체를 통해서 신약 성경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인 단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그럽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 줄 표징은 요나의 그런 표징 밖에 없다."

나중에 이제 본인이 죽었다가 부활하시는 부활 사건에 관해서 거기서 미리

말씀하시는 것인데 그와 같은 표징에 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예, 요즘 제가 예를들어 우리 서울 교구가 아니라 뭐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뭐

어떤 나라에 가서 여행을 하게 됐는데 주일이 됐어요. 그럼 미사를 해야겠지요?

그러면 어느 성당 가서 "내가 천주교 신부인데 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 하면

미사를 하게 할까요? 안 됩니다.

 

교회 법적으로 그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교회 법적으로 가장 합법적으로

할려면은 그 지역의 교구장에게 승낙을 받아야 됩니다. 또는 적어도 그 본당

신부님에게 내가 사제인 거를 증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사제들에게

주는 신분증 같은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와 같은 표징이, 이런 지금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보여 주시는

그런 틀 안에서 우리가 그가 어떤 신적 권능을 가졌다는 어떤 초자연적인 징표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정말 사제로 살면서 그런 점에서 부끄러운 거 같애요. 어떤 그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성직자들이나 뭐 아니면 신부님들에 대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거든요.

예를들어 성령기도회 때 이렇게 손을 얹으시면은 신자들이 뒤로 막 쓰러지고

그러잖아요. 저는 했는데 안 쓰러지더라구요. ^^*~~~ 제 옆에 있는 제 친구 신부는

안 쓰러져서 밀었대요. ^^*~~~ 저는 그렇게 까진 안 했습니다만 조금 섭섭하긴

했어요. 아무튼 웃으시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자, 그리고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 번째 표징이 등장합니다.

"나일 강에서 물을 퍼다가 마른 땅에 부어라. 그러면 나일 강에서 퍼 온 물이

마른 땅에서 피가 될 것이다."

 

나중에 우리가 스토리 라인을 알고 있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모세가 이스라엘

원로들에게 돌아가서 그들에게 보여주는 표징은 세 가지 중에 몇 가지입니까?

나중에 원로들을 만나서 보여주는 표징은 두 가지만 보여 줍니다.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다가 다시 지팡이로 변하는, 그 다음에 나병에 걸림. 고것만 보여

줍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파라오에게 가서 보는 열 가지 재앙 중에서 한 가지가 뭡니까?

나일 강의 물이 피로 변하는. 나일 강의 물을 퍼오니까 피로 변하는 게 아니라

나일 강의 물이 피로 변하는 그와 같은 표징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것을 좀

우리가 상기해야 될 내용입니다.

 

창세 4,10을 보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 네가 무슨 짓을 저지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저주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 날 것이다.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메는 신세가 될 것이다."

 

아우의 피가 땅에 흘렀는데 그 땅이 입을 벌려 그걸 마셨잖아요.

피라는 거는 전에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드렸던 말씀인데

이 세상에는 세상에 속한 것과 하늘 나라에 속한 것이 있지요?  거룩한 것들.

성스러운 것들.

 

그건 세상에 있지만 하늘 나라에 속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들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과 함부로 접촉해도 됩니까? 안 됩니다. 땅은 세상에 속했습니까?

하늘 나라에 속했습니까? 세상에 속했습니다. 피는 세상에 속했습니까?

하늘 나라에 속했습니까? 피는 거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가 땅에 흘렀으니

땅이 이제 정결하지 못하게 된 겁니다. 땅이 오염된 겁니다. 따라서 저주 받은

땅은 수확을 내지 못하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같은 내용입니다. 물을 퍼다가 마른 땅에 부었는데 그 물이 피가

된다면은 땅은 예, 저주를 받는 겁니다. 자기가 접촉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것과

접촉하게 되는 겁니다.

 

나중에 열왕기 쪽을 가서 이렇게 이야기를 읽어보면은 나중에 다윗에 관해서도

문제가 되는 게 뭐냐하면 다윗이 야훼 하느님을 섬겼지마는 전쟁을 너무 많이 한

거예요. 전쟁을 하면서 어떤 일이 자연히 벌어집니까? 땅에 피를 흘린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그 다윗의 어떤 죄를 묻고 열왕기랑 역대기 쪽에 특히 역대기쪽이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흐름은 뭐냐하면, 그래서 결국 다윗이 하느님의  그 집을 지을 수 없었다

라는 그와 같은 하나의 신학적인 논거들이 등장합니다. 다윗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전쟁을 했지만 하지만, 땅에 피를 흘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느님의 집을 지을 수 없었다라는 그런 논거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일 강에서 퍼 온 물이 마른 땅에서 피가 된다는 거는

굉장히 무서운 그와 같은 표징입니다. 예, 생각해 봅시다. 탈출 4,1-9에는 여러

가지 신학적 주제들이 제공됩니다. 그 중 이스라엘 원로들로 사용되는 그들을

이라는 표징이 등장하는데 이스라엘 원로들은 단지 몇 사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탈출기의 흐름 안에서 계속 맨 처음에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렇게 누구누구 개인 가족 이런 이야기였다가 이제는 점점점 시야가 확장이

되잖아요. 어떻게 확장이 됩니까? 개인에서 집단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확장이

되는데 이제 그 원로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역활을 하는 대표성을

갖고 있는 집단이고 이와 같은 원로들에 대한 이야기는 모세 오경 전체를 통해서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 옵니다.

 

지파의 대표자들로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갈대 바다를 건널 때까지는 야훼와

파라오의 갈등입니다. 하지만 갈대 바다를 건너는 순간부터 갈등의 촛점이 바뀌어

갑니다. 야훼와 이스라엘의 갈등으로,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대해서 불평하는 그와 같은 대목들이 등장하면서 야훼 하느님께서 정말

이스라엘이 나를 신뢰하는지 신뢰하지 않는지에 관한 그와 같은 어떤 갈등의

단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자, 그런 가운데 그런 이스라엘의 불평이 누구를 통해서 대표될까요? 계속해서.

이스라엘 원로들을 통해서 대표가 되고 그리고 나중에 그런 어떤 뭐 금송아지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다른 이런 이야기들 안에서 이스라엘 원로들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대표자들이 그런 이스라엘을 야훼 하느님으로부너 멀어지게 하는 그와

같은 역활을 하는 내용으로 그 전체적인 흐름이 갈등의 중심이 옮겨져 갑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는 결국 어떤 것과 연관이 될까요? 나중에 왕정 시대로 들어

오면은 원로가 아니라 누가 이스라엘을 대표합니까? 왕이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근데 그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잘 이끌어서 야훼 하느님을 섬기도록

합니까? 아니면은 그 왕들의 어떤 목적이, 정치적인 목적에서건 어떤 목적에서건

그 왕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고 또 백성들로 하여금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까? 두 번째입니다.

 

우리가 역사서를 통해서 만나는, 따라서 여기서 이스라엘 원로들에 대한 언급들은

앞으로 오경 안에서 있게 될 그와 같은 언급들은 나중에 장차 왕국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어떤 예표적인 그런 기능을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그런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원로들 그리고 야훼의 그와 같은 갈등은

단지 요 사건의 문제가 아니라 광야에서 유랑하는 모든 시기의 문제이고 더 큰

관점에서 본다면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역사적인 그리고

실존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입니다.

 

예,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탈출 4,1-9은 믿음과 표징의 관계를

제시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사건을 초월적 권능과 연결되어서

받아들여 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표징의 전달자가 갖는 일정한 종교적인

권위는 이제 합법화 됩니다. 그가 그와 같은 표징을 통해서 그가 갖고 있는 권위가

인정되느냐, 인정되지 않느냐의 그와 같은 문제입니다.

 

그런 종교적인 전통을 살아온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아까 말씀드린대로 예수에게도

표징을 요구합니다. 마태 12,38 이하, 그리고 16,1 이하, 그리고 마르 8,11 이하

뭐 이런 대목들을 보면 그렇게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요구가 등장합니다.

루카 복음과 요한 복음에서는 더 많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오 사도는 1코린 1,22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유다인들이 요구하는 표징도

그리스인들이 연구하는 지혜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덕목이 있다면 세속적인 면으로 본다면은 그것은 어리석음

밖에는 없습니다." 라는 그와 같은 대목의 이야기들을 우리가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12회 모세의 입 아론:탈출 4,10-17/ 미디안에서 이집트로: 탈출 4,19-23/

할례: 탈출 4,24-26 이 계속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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